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라이프&스타일]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씨 숨 쉬는 옷, 숨 쉬는 집 자연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생의 계획은 어린 시절에 달려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달려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씨. 그는 어린 시절 장난스럽게 세운 계획을 하나씩 차곡차곡 이루어가고 있다. 그가 걸어온 삶과 디자인, 패션이 하나로 응축된 공간, 그의 ‘패션 하우스’를 찾았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있다. 어릴 때 경험인 만큼 강렬함은 더해진다. 하얀 종이 위에 아로새긴 듯한 기억. 주변 상황이 어렴풋해 더 강렬한, 무의식 속에 존재해 아마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기억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하얀 면이나 레이스만 보면 무척 설렌 기억. 종이옷이 아닌 진짜 천을 오려 인형 옷을 만들던 기억. 또래 아이들이 ‘대통령’ 혹은 ‘교사’를 꿈꿀 때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또박또박 이야기하던 기억. 마음대로 옷을 지어입고 싶어 가방에 천을 한가득 싸서 반나절 가출을 감행한 철없던 시절의 기억. ‘3층 집을 지어 2층에는 내가 만든 옷을 걸고, 1층에는 편안한 소파를 두어야지’라며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그 소녀는 15년 후 ‘진짜’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 그리고 일본으로, 파리로, 세계로 뻗어 나간다.

기술이 완성되고 예술이 시작된다 대구 시내에서 속옷 공장을 하던 양옥집의 야무진 넷째 딸 미화. 지천에 널려 있는 레이스를 주워 초등학생 시절부터 스커트나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는 그를 보고 아버지는 늘 못마땅해 하셨지만 결국 끓는 피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80년대 초, 고등학교 졸업 후 ‘와라’라는 패션 회사에 입사했어요. 다섯 명의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이상봉 씨였지요.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 만든 옷만 안 팔린다는 거예요. 품평회 날이면 ‘고쳐라’ ‘싫다’ ‘안 한다’를 반복했죠. 참 고집스러웠어요. 그러다 패턴과 마케팅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자인은 감각이다. 감각을 팔려면 ‘디자인’보다 앞서 ‘마케팅’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채택되지 않는 디자인 스케치는 그저 만화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왼쪽) 서울 성곽길 골목에 자리 잡은 홍미화의 패션 하우스. 남편 쿠지히데주 씨와 디자이너들은 이 한적한 오피스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1 겉은 엉성한 거즈, 속창은 쫌쫌한 거즈로 만든 재킷은 오래 입어 겉이 떨어지고 헤질수록 깊은 맛이 나는 옷이다. 1997년 컬렉션.
2 1994년부터 파리, 뉴욕 등 유수의 해외 컬렉션에 참여했다. 거즈, 리넨, 니트 등 자연스러운 소재를 사용하고 내추럴한 실루엣을 강조해 1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멋스럽다.

3 천장 아래 다락방은 그의 지난 작품들을 보관하는 보물 창고.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숨은 수납공간이 많다는 것이다. 옷의 실물을 하나하나 그려 수납함에 붙여두면 찾을 때 편리하다.
4 1층 디자인 사무실의 조명등 역시 그가 디자인한 것. 쉽게 구할 수 있는 색 알전구를 불규칙하게 달아 연출했다.

 
그가 다닌 동경문화복장학원은 요지 야마모토, 꼼데가르송, 이세이 미야케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은 패션 마케팅 분야에서 뉴욕을 벤치마킹해 감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마침 요지 야마모토가 꼼데가르송과 함께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할 때였고, 무지 MUJI, 톰사 등의 가구 브랜드가 생활 잡화로 영역을 넓혀 의류 라인까지 선보이는 등 작가주의와 실용주의가 교차하고 있었다. “당시 이세이 미야케는 파리 컬렉션에서 훨훨 날고 있었지요. 감각을 익히고 싶으면 파리로 갔겠지만 파리의 감수성은 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술을 완성해야 예술이 시작되는 법. 동경문화복장 학원에서 4년간 디자인 기본기를 충분히 다진 그는 졸업 후 한국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비즈니스 비자를 받는다. 그리고 일주일에 3일은 톰사에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고, 3일은 패션 업체에서 마케팅 실무를 익혔다. 12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그가 국내에 첫번째 론칭한 패션 브랜드가 바로 (주)데코의 ‘텔레그라프’다. 그러다 1993년, 동경문화복장학원에서 만난 남편 쿠지히데주 씨와 귀국해 ‘홍 크리에이션 코리아’를 설립하고 브랜드 ‘미화 Mi Wha’를 선보인다. 1996년에 브랜드명을 ‘홍미화’로 바꾸고 한일합섬의 ‘레주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미화 홍’으로 홈쇼핑에 자신의 이름을 건 침구 브랜드까지 론칭하며 누구보다 숨 가쁜 행보를 거친 그는 2006년 이후, 별안간 매체 홍보를 중단한다.

“어느 날 ‘마케팅이 패션을 망칠 것’이라던 요지 야마모토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결국 옷이라는 본질은 잊힌 채 로고와 가격표만 난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던 그의 예견이 맞은 거지요.”

(오른쪽) 양수리 집 근처에서 발견한 통나무에 바퀴를 달아 작은 의자를 만들었다.

숨을 불어넣은 옷으로 대중과 소통하다 정말 오랜만의 인터뷰다. 물론 한동안 소식이 뜸한 그를 두고 ‘옛날엔 잘나갔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이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우리가, 자신이 잊고 있는 ‘옷의 본질’을 찾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을 뿐이다.

그가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친 것은 1994년 7월, 파리 프레타 포르테(기성복)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부터다. 쇼는 파리 인근 벵센느 숲에서 진행되었다. 나무에 표지판을 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벵센느 숲에서, 패션쇼라니! 파리 현지 쇼 기획자를 겨우 설득해 숲 사용 허가를 받기까지 성공하니, 이번에는 인공조명 대신 달빛 조명을 제안한다. “쇼 담당자는 제가 무슨 얘기만 하면 계속 ‘오 몽 디우 Oh mon dieu’를 외치며 머리를 부여잡았어요. 하절기라 밤 10시나 되어야 해가 지는데, 달빛이라니! 보통 쇼를 하고 난 다음 파티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먼저 파티를 하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리고 반딧불이를 날렸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프랑스 현지에 반딧불이가 없어서 일본의 반딧불이 학자에게 부탁하자 그가 직접 지푸라기로 만든 상자에 반딧불이 500마리를 담아 쇼 당일,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더군요. 돌고 돌다보니 바깥이더래요. 그 때문에 검역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패션쇼장까지 도착했죠. 비록 옷 가방은 못 찾았지만요.”

달빛 아래 우거진 숲 속에서의 패션쇼. 반딧불이가 풀풀 날아다니고 별빛은 영롱하게 반짝였다. 여기에 하나 더, 한복의 치마저고리를 모티프로 한 의상과 그와 잘 어우러지는 청사초롱은 파란 눈의 패션 피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쇼의 이름은 <눈물이 나도록 행복한>. 그렇게 첫 번째 컬렉션이 끝나고, 동양에서 온 ‘미화 홍’은 스타가 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패션쇼 장소로 센 강 위에 둥둥 떠 있는 배, 오래된 고성, 뮤지엄 등 특별한 곳만 찾았다(평창동 토탈미술관도 홍미화의 패션쇼를 위해 처음으로 공간을 오픈했다). 옷이 꼭 매장에 걸려 있어야만 옷인가? 의상도 전시장에 있으면 그림이고, 작품이 될 수 있다. 의상과 문화가 접목되었을 때 감동이 배가되는 그의 이러한 남다른 영감은 연극, 뮤지컬 등의 무대의상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 그의 집에선 유행하는 마감재나 값비싼 디자인 가구는 찾아볼 수 없지만 새 둥지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편안함이 배어 있다.
2 나무 선반장을 짜 넣고 바닥에 종류가 다른 타일을 자유롭게 배치한 주방.

3 가구는 대부분 미송으로 맞춤 제작했다. 
4 인공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그는 딱딱한 노트 커버 를 모두 패브릭으로 감싸 사용한다.


그는 지난여름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뮤지컬 <서편제>의 옷을 지었다. <바람의 나라>로 그와 연을 맺은 이지나 씨가 연출한 작품으로 모두 시대극이지만, 의상은 무척 현대적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고증의 개념은 조금 다르다. “일본과 비교해서 좀 그렇지만, 일본의 기모노가 얼마나 현대적으로 변했는지 아세요? 우리 의상도 꼭 ‘전통’을 고집할 게 아니라 전통의 모티프를 현재의 쓰임에 맞게, 혹은 디자인 미학으로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는 끊어질 수 없는, 그러나 끊어질 숙명 宿命을 지닌 예인 藝人의 이야기에 옷을 지어 입히며 그 옷에 ‘들숨’ ‘날숨’을 불어넣었다. 새하얀 옥양목, 거즈, 오간자 등 평소에도 즐겨 사용하는 소재는 한결같이 가볍고 투명하다. “무대의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질기고 땀이 배지 않는 그런 소재는 싫다고 했어요. 몇 개월씩 하는 공연인데 의상이 손상될 것을 염려하는 감독에게 중간에 뜯어지면 새로 짓겠다 했지요. 마치 공기 중에 부유하듯, 배우가 무대에서 날 수 있도록 옷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콘셉트였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가슴 저미듯 슬프고 숨이 넘어가도록 가쁜 것이다. 옥양목 한 조각, 거즈 한 겹만큼 작고 소박한 화폭에 기쁨을 함께 보듬는 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지만 관객들에겐 미래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들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숨을 담은 옷, 내 옷이 자연이면 좋겠다. _‘작가 노트’ 중

그가 만든 <서편제> 무대의상의 모티프는 배내옷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입는 깃도 섶도 없는 옷. 자연 섬유 그대로를 써서 어머니 자궁만큼이나 편안한 옷.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을 자연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보이게 하는 옷. 의미를 얹지 않는 것, 덜어내는 것, 비우는 것, <서편제>에서 본 의상이 바로 그가 이어가고픈 옷의 ‘본디’가 아닐까 싶다.

집은 용도 공학 ‘미화 홍’이라는 이름으로 침구와 도자브랜드를 론칭한 그는 패션뿐 아니라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현재 살고 있는 중구 신당동 집과 새로 오픈할 쇼룸, 경기도 양수리 전원주택 모두 직접 고쳤다. “더 이상 컬렉션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어요. 2006년 또 다른 도전이 필요했죠. 때마침 양수리 전원 주택으로 이사했고, 뚝딱뚝딱 집을 고치기 시작했어요.” 인테리어에 재미와 자신감이 붙은 그는 3년 전 남산에서 신당동으로 디자인 사무실을 옮기고 이 역시 손수 고친다.

서울 신라 호텔을 에두르는 서울 성곽길. 장충동에서 신당동으로 넘어가는 호젓한 주택가를 오르다 보면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단독 주택이 눈에 띈다. 마치 파리 마레 지구의 작은 쇼룸처럼 마네킹과 나뭇가지를 진열한 쇼윈도와 아치형 창문이 범상치 않아 들여다보니 ‘미화 홍’이라는 작고 빨간 깃발이 나부낀다. 1층은 브랜드 ‘홍미화’의 디자인 사무실. 직원들의 사무 공간과 재단실, 패턴실, 자재실이 집처럼 편안하게 꾸며졌다. “겨울에는 양수리 집이 추워서 거의 이곳에서 지내요. 사무실 2층을 살림집으로 개조했어요. 사실 제 옷이 누구나 소화할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집은 달라요.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모두가 좋아하지요. 한 아이는 저희 집이 새 둥지 같다고 표현하더군요.”

(왼쪽) 책상 위에는 집과 쇼룸을 레노베이션하기 위해 그가 직접 그린 도면이 수십 장 쌓여 있다.


1 새로 오픈하는 쇼룸은 현관문이 두 개다. 누구든 편안하게 둘러보라는 디자이너의 포근한 마음이 담겨 있다.
2 그는 상상하고 옷본 뜨고 재봉질하는 전 과정을 혼자 다 해낸다.


하얗게 칠해진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그제야 아이의 말이 이해가 된다. 천장을 털어내 생긴 박공지붕 아래 여유 공간을 다락방으로 꾸미고, 공간 곳곳에 미송으로 기둥을 세워 마치 숲 속 산장에 들어선 느낌. 그의 옷처럼 ‘숨 쉬는 집’이라는 표현이 딱 맞겠다. “나무, 돌 이런 자연 재료는 아주 작은 조각도 버리지 못하겠어요. 며칠 전 길을 지나는데 가로수를 자르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서 집에 왔다가 다시 갔어요. 버릴 거면 달라고 해서 가져왔지요. 1층 쇼윈도에 쌓인 나뭇더미 보셨죠?” 거실과 침실 등 가구는 모두 목공 작업 때 미송으로 맞춤 제작한 것이다. 거실 가운데 비스듬히 놓인 큰 테이블은 한쪽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작은 창문이 달린 나무 부스도 눈에 띈다. 뭐하는 곳이냐 묻자, 각종 공구와 청소기 등 수납하기 힘든 잔살림을 두는 곳이라 설명한다. 인테리어는 ‘용도 공학’이라고 설명하는 홍미화 씨.

“공간은 옷과 다르게 이유와 목적이 있는 디자인이에요. 이 공간이 무슨 용도인지, 무엇을 두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디자인이 술술 풀리지요.” 그는 지난해 옆 골목에 비슷한 주택을 한 채 더 마련했다. 1층은 그가 만든 도자 작품과 빈티지 소품으로 장식하고, 2층은 쇼룸으로 꾸몄다. 날이 따뜻해지면 마무리 작업을 더해 숙원하던 ‘패션 하우스’로 완성할 예정.


1 굉장히 비싼 물건이라도 인공적인 것이라면 과감히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홍미화 씨. 하지만 자연적인 것은 놓치지 않는다. 길에 떨어져있는 도토리 껍데기를 주워다 사람 표정을 그려 넣었다.
2 그릇과 컵, 항아리까지 도자 빚는 재미에 푹 빠진 그가 가장 최근에 만든 꽃 타일. 쇼룸 벽면에 장식할 계획이다.


누구나 들를 수 있는 문화 공간. 숨을 불어넣은 옷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그에게는 ‘공간’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그의 공간처럼 2011년 홍미화의 의상도 좀 더 내추럴한 스타일로 선보일 예정. 그간 지속적으로 선보인 한국적인 모티프는 계속 가져가는 것 이냐는 질문에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참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며 짚고 넘어간다. “가장 자기다운 게 가 장 세계적이죠. 샤넬은 샤넬다웠고, 아네스베는 아네스베다웠기 때문에 영원한 거예요. 자기다운 것, 남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오리지널리티고 세계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홍미화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우리 것을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아도 디자인에 한국적인 모티프가 배어나지요.”

(왼쪽) 홍미화의 패션하우스 옆골목에 위치한 쇼룸. 날씨가 따뜻해지면 오픈할 예정이다. 집처럼 꾸민 공간에서는 타일을 붙여 완성한 식탁과 테이블, 채반, 양철 냄비 등을 재활용해 만든 조명등과 도자 오브제 등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터득한 심미안을 발휘해 패션은 물론 아트, 리빙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디자이너 홍미화 씨.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은 패션이라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본분과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 “패션은 모든 산업의 시작입니다. 감각적인 것은 패션에서부터 비롯하죠. 의식주에서 왜 ‘의’가 가장 먼저 나오겠어요?”
자, 그럼 이제 찬찬히 그의 집을 살펴보자. 어쩌면 다음 컬렉션에 등장할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