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동성애자 말하다 한때 이성과 결혼했던 여성 동성애자의 입장에서 나는 그들의 문제를 얘기해보겠다. 나는 1980년에 결혼해서 2005년도까지 이성애 부부로 생활했다. 아들 둘도 낳았다. 현재 스물여덟, 서른한 살이다. 하지만 2004년, 나는 그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가정으로부터 독립했다. 그 이후로 여성 파트너와 산 적이 있다. 남편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아내에게 거부당했다는,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상처받았다는 심리 때문인 것 같다. 이혼 소송은 내가 먼저 했다. 이혼 사유는 뒤늦게 깨달은 나의 동성애 정체성과 가정 폭력, 소통 불가였다. 동성애 정체성을 이유로 제기한 이혼 소송은 내 경우가 첫 번째 사례였다. 나는 자녀들과의 문제는 별로 없었다. 아이들이 이미 성인이고, 나의 동성애 정체성에 대해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랐다. 다만 이혼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친척들에게 나의 성 정체성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 나머지 가족을 이해시키는 문제, 심리적 문제로 고통을 많이 받는다. 이런 과정을 해결할 수 있는 상담 프로그램, 관계 회복 프로그램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정작 동성애자에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이다. 더 큰 문제는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나이 든 부모를 설득하는 과정이다. 사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에게 이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형제나 자매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사회적 편견보다는 내 피붙이를 안타깝게 보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 역시 형제자매의 이해는 얻었으나 부모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남편과의 별거나 이혼을 숨기게 되었다. 내 상황이 자꾸만 왜곡되어 전달되는 것이 싫어 결국 부모에게도 동성애자임을 밝혔지만 따가운 질책이 돌아왔다.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로 인해 내가 겪은 고통 또한 컸다. 2005년 12월, 큰아들이 결혼하는데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양가에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가 아닌 척 내 신분을 숨기고 결혼식장에 얼굴을 내밀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성과 결혼한 경험이 있는 동성애자는 일반 동성애자에 비해 더 혹독한 비난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회적 한계, 제도적 한계 속에서 발생한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혼 여성 동성애자에게 무조건 결혼 제도에서 빠져나오라고 권유할 수도 없다. 주위로부터 비난과 모멸을 받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녀에 대한 친권이나 양육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것도 큰 충격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재산 분할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도 문제다. 동성애 정체성을 이유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자녀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 그리고 재산권에 대한 보장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 최현숙(진보신당 성소수자인권위원회)
남성 동성애자 말하다
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다 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얼마 전에도 ‘변태 가족 토크쇼’라는 이름의 토론회가 있었다. 비혼 커플, 남성 동성애자 커플, 여성 동성애자 커플, 싱글맘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 ‘지금 우리 집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관한 성토대회를 벌이는 자리였다. 동성애자이면서 파트너와 최소한 2년 이상 살아본 사람만 참가할 수 있었던 이 자리에 내가 낄 수 있는건 토론자 자격이 아닌 패널 자격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6년간 ‘가족구성권연구모임’에서 회원으로 활동한 보람이 있었다(혈연관계가 아닌 사람과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전문가 패널이라니! 아이러니하긴 했다).
성토대회의 시작은 ‘알리바이 방’에 관한 것이었다. 동성애 관계를 오래 지속한 커플 중에는 부모님이나 지인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속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 보니 ‘알리바이 방’이라는 걸 꾸며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애인의 가족에게 ‘연인 사이’가 아닌 ‘친구 사이’로 비칠 수 있도록 ‘증거’를 인멸한 방. 사람들의 리얼한 스토리를 듣다 보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저것이 바로 우리의 고달픈 인생이지… 내게도 언제 닥칠지 모를 일….’ 그런 생각이 들어 기분이 씁쓸해졌다.
동성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이야기지만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커밍아웃 노하우’ 같은 것도 있다. 커밍아웃이란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으로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성격에 따라(당사자보단 부모님의 성격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날짜에 따라(기념일, 명절, 생일은 절대 피하는 것이 기본이다), 장소에 따라(너무 우울하고 어두운 곳보다는 놀이동산 같은 곳이 의외로 좋다) 커밍아웃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물론 커밍아웃 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비단길처럼 고운 것만은 아니다. 누구나 꾸리고 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것을 이루지 못한 동성애자는 죽을 때까지 반쪽 인생을 살아간다. 서른넷이 될 때까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나는 이날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난생처음 묘한 감정을 느꼈다. 토론자로 나온 사람들이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 가끔 술자리도 갖는지라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모르는 시시콜콜한 집안일이 너무 많았다. 재미있는 건 그 얘기가 구질구질하거나 남의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대입해서 들리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숨 쉬는 집을 상상해 보았다. 기분이 좋아지고, 잘 삭은 홍어처럼 구수하고 알싸한 냄새가 훅 끼쳤다. ‘가
족의 냄새’. 나는 갑자기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글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행복> 4월호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컬럼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 씨에 의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성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재미있는 원고까지 써준 그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글 최현숙(진보신당 성소수자인권위원회),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 [동성가족]동성애자 가족 구성권이 필요한 이유 다르지만 행복한 그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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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가족 문화를 돌아보며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동성 가족’이라는 외로운 섬에 도착했습니다. 가족을 가족이라 부르지 못하니 외롭고, 사랑을 사랑이라 외칠 수 없으니 외롭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아 나와 같은 ‘성, gender’을 사랑하게 됐지만 세상은 그들의 팔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음지에 숨을 수밖에 없어 정확히 얼마만큼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250만 명이 넘는 동성애자가 존재합니다.‘남녀’가 아니라 ‘인간’의 결합이기에 그들이 사는 세상도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