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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의 이구동성] 남자들에게도 쫑알거림을 허하라
글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하고 싶은 말을 삭혀봐야 국도 못 끓여 먹고 화병만 난다’라고 돌아가신 할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어디서 들었는지, 세계적 심리 치료사 ‘비벌리 엔젤’은 자신의 책 <화의 심리학>에서 “화는 당신 몸에 내리는 경보 장치이며 자기 몸을 방어하는 수단이니 화가 나면 상대에게 그 감정을 전하라”고 고급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남편들은, 특히 아내와의 소소한 갈등에 있어서 자기 말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졸지에 ‘쪼잔한 남자’의 낙인이 찍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절대로 명랑한 부부 관계, 화목한 가정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남녀가 동등히 하고 싶은 말은 해줘야 즐거운 우리 집이 완성되며 여성보다 현격히 짧은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도 연장된다고, 본 연사 힘차게 외치는 바입니다. 하여, 후배가 선배에게 반말을 허락받는 ‘야자 타임’을 모방하여 ‘쫑알 타임’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화병의 불씨로 마음속 1500미터 암반 속에서 들끓고 있는 사연을 쫑알거릴까 합니다.

사실 고추밭의 고추 따듯 자기가 원해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의사 아저씨의 매운 손바닥보다 더 남자를 아프게 하는 건, 세상이 남자에게 부담 짓는 ‘대심 大心’에의 강요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면서 식솔의 목을 친 계백의 ‘대심’을 궁극의 사내다움으로 배우고 자란 어린 시절, 어쩌다 누이와 말싸움이라도 하면 아버님은 호통치셨습니다. “사내 녀석이 못나게 누이와 무슨 짓이냐?” 그 말에 뾰로통해서 입이 한 됫박 나오면 어머니는 결정적 한 방을 날리셨습니다. “사내놈이 기지배처럼 삐치기나 하고.” 연애할 때 아내도 자기가 불리할 만하면 이런 대사를 날렸습니다. “무슨 남자가 그런 걸 가슴에 품고 있어? 왜 이렇게 소심해.” 그런 언어폭력 앞에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불만 사항은 깨갱의 신음으로도 발화되지 못한 채 안으로 기어들어간 통곡의 한평생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억울한 사연을 쫑알거려 보겠습니다. 몇 달 전, 맏사위 노릇 한다고 장인, 장모님 모시고 자연산 송어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대기표를 끊을 정도로 사람 많은 곳에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어르신들 심심할 새라 미스코리아 미소를 지어가며 고군분투하고 있자니 밑반찬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맛있게 먹던 연근조림을 아내가 냉큼 뺏어 장모님 앞에 놓아드리며 “엄마 이것 좀 드셔 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모님이 “윤 서방 잘 먹는데 윤 서방 줘”라고 하셨고, 아내가 되받기를 “윤 서방은 고기만 좋아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그 쫀득한 연근조림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자기가 왜 내 입맛을 왜곡하고 조작하며 편집질 하는 것입니까?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더니 “어머, 이 사람 왜 이래? 그깟 반찬 가지고. 엄마 윤 서방 얼굴 좀 봐, 오호호.” 이러는 겁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날 너무 기분이 나빠서 송어회를 먹었는지 망둥이회를 먹었는지 지금까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이왕 쫑알거린 김에 하나 더 하겠습니다. 지난번 조카가 제대할 때, 옷장 좀 정리해서 안 입는 내 옷 좀 보내라고 했습니다. 몇 번 입지도 않고 살이 쪄서 그대로 있는 새 옷들을 세탁하거나 조금 손질하면, 비싼 돈 주고 산 옷이니 조카에게도 얼마나 좋은 선물이겠습니까? 그런데 옷 정리를 하며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머, 이 옷은 아직도 당신이 입어도 되겠네. 어머, 이 니트는 세탁기에 돌리면 줄어들어서 내가 입으면 딱이겠다.” 결국 청바지 한 벌로 마무리한 ‘당신’께서는 한 달 후 처제가 놀러오자 내가 사준 버버리 코트를 시원하게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코트는 내가 바쁜 런던 출장길에 매장 가서 직접 골라온,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습니다. 출장비 아끼고, 용돈 안 써가며 아내에게 명품 하나 입히려는 남자의 로망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단지 소매가 조금 길다는 이유로 그걸 화끈하게 처제에게 주면서,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어 죽겠는 내게 형부가 한마디 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럼 내가, 미워 죽겠다고 해야 합니까? 역시 처제가 입으니까 너무 이뻐, 라고 말은 했지만 아니 내 조카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고 당신 동생은 하늘이 내린 공주님이란 말인가요. 그걸 불평하면 분명히 “당신 왜 이래? 나이 들면서 여자가 돼가는 거야?”라고 할 게 뻔하므로 여태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쫑알거릴 소재가 열두 폭 비단 치마에 돌돌 말기에도 부족할 만큼 차고 넘치지만, 후환이 두렵고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도 없기에 이쯤에서 터진 입을 봉하려 합니다. 이만큼이라도 아주 속은 후련합니다. 오늘 밤 일기에는 이렇게 쓸 것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짹하고 죽어야 사내다!’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