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기러기 가족’을 자처할까?
우울 증상이나 불면증, 술 문제로 찾아오는 기러기 아빠를 진료실에서 심심찮게 만난다. 또 동료 의사나 교수 중에도 기러기 아빠가 꽤 있다. 이들과 얘기해보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심리가 있다. 첫째, 자신이 자라면서 경험한 비합리적이고 먹먹하던 고생의 기억을 아이들에게만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다. 부모 자신이 한국 교육 체계의 문제점을 관통하며 자라났다. 대학 학력이 평생을 좌우하는 서열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들이다. 현재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 원인이 교육에 있다고 여긴다. 행복은 성적순이기에 1등이 아니면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고 여긴다. 나는 이미 늦었으니 아이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부모는 주저 없이 아이를 외국에 보내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시키고, 이를 위한 자기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상대적 박탈감을 아이에게 투사한 것이다. 아이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에 의해 아이는 조기 유학을 가고, 가족은 결국 생이별을 한다. 대부분의 아이가 처음에는 유학을 안 가겠다고 반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아이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라 여기는 강한 가족 자아다. 일본의 분석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대담을 하면서 한국인의 가족 특성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한국인은 가족을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가족 자아(family ego)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자기가 하는 일의 영역을 동일시의 기초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인은 가족 중에서 특히 자식을 나의 분신이자 확장으로 여긴다. 우리 사회만큼 ‘나’와 ‘가족’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곳은 없다. 흔히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 하고, ‘내 아내’가 아니라 ‘우리 와이프’라 한다. 많은 부모의 마음 안에서 나라는 자아의 바로 옆 가까운 곳에 자기 자식이 자리 잡고 있다. 거기서 조금 멀리 떨어진 나와 우리 사이의 경계선쯤에 배우자가 서 있다. 부모로서 나의 자아는 자식을 나의 손발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인식하면 기러기 아빠의 생활은 희생이 아니라, 자기 수련이 된다.
셋째, 손해 보고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외국어가 사회생활의 기본이 된 세상이다 보니 외국 생활 경험은 이제 소수의 기회가 아니라, 안 해보면 안되는 기본 코스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일종의 인플레이션에 의한 피해다.
기러기 아빠는 외로워, 괴로워 이런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국의 가족들은 기러기 생활을 선택하고 감내해나간다. 그러나 이로 인한 현실적 문제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러기 아빠는 고립감과 거리감을 호소한다. 비록 외국의 가족과 자주 전화 통화를 하고,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평소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오죽하면 회사에서 절대 피해야 할 상사가 ‘돌아온 싱글’이나 ‘기러기 아빠’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겠는가.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고, 한밤중에도 전화로 업무 지시를 하며, 저녁마다 회식을 하자고 성화하는 상사라면 기피 대상 1호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은 ‘피해 의식’이라는 위험한 생각이 채우기 쉽다. ‘나만 빼놓고 너희는 행복하게 지내니까 좋지?’ ‘내가 뼈빠지게 벌어서 송금하는데 놀러 다녀?’처럼 유치해 보이는 심증이 점점 괴물같이 마음 안에서 스멀스멀 자라나 어느새 생각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런 생각이 감정의 받침대가 되고 나면 얼굴 맞대고 얘기하면 5분이면 풀릴 오해가 짧은 이메일이나 전화로 소통하다 보니 눈덩이처럼 커지기 쉽다. 심증이 확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기러기 아빠는 ‘저쪽에 있는 가족’이 똘똘 뭉쳐서 아빠만 일방적으로 ‘괜한 오해를 한다’는 식으로 몰아간다는 압박감에 피해 의식이 더 커진다. 결국 가족 관계에 근본적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이와 아내와 다시 만나 살게 된 후에는 왠지 모를 서먹한 감정의 거리감이 쉽사리 메워지지 않는다. 서로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각자의 삶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행복한 기러기 둥지를 만들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건강한 기러기 아빠의 삶을 만들어가고, 또 다가오는 재결합을 현명하게 준비해나갈 수 있을까. 먼저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몇 년 동안 기러기 생활을 할 것인지 현실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외국에 있다 보면 조금 더 있고 싶거나, 더 좋은 학교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를 가족 모두가 설정하고 지켜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가장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기러기 아빠 쪽이 분명한 자기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이마저도 안 하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무리해서 유학을 보낸 중산층이라면 더더욱 처음부터 목표와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신체와 정신 모두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과 더욱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한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말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 규칙적 운동과 식생활, 수면 시간을 지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셋째, 기러기 아빠도 자신을 위해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 외국에 생활비를 보내다 보면 최대한 내핍한 생활이 일상이 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아껴 살다 보면 사람이 피폐해지고 날카로워져서 가족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일상의 리듬이 위태해질 위험이 있다. 몇백 달러를 더 송금해주기보다 차라리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즐기는 데 쓰는 것이 전체 가족 관계와 기러기 아빠 본인의 건강한 삶을 위해 크게 보면 더 좋은 일이다. 약간은 호사스러운 음식을 먹거나, 재미있는 취미 생활을 만들어 즐기는 데 돈을 쓰는 것에 죄의식을 갖지 않아야 한다. 기러기 아빠로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삶은 멈춰 있어서는 안 된다. 가족에게 자신을 희생자로만 보이려고 하기보다 도리어 부러워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가족도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돈 보내달라는 얘기를 할 때 외에는 전화가 없어.” 한 기러기 아빠의 푸념이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금전적 문제 이외에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자잘한 일이라도 놓치지 않고 알리고,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기러기 아빠의 고립감과 박탈감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외국 생활이 길어지다 보면 간과하게 되거나, 점차 그 빈도가 줄어들기 쉽다. 또한 부부 사이에서는 스킨십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마음도 멀어질 위험이 있다. 잠깐 만나는 시간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거나 여행을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이들 없이 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섹스를 포함한 스킨십을 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으로 부부 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오랜만이라 서먹할지 모르나 꼭 필요한 과정이며, 나중의 재결합을 무난하게 이룰 탄탄한 교두보를 만드는 단계가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다.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 누가 더 많이 희생하고 고생을 하는지 경쟁하는 구도는 고통을 각인하고 관계를 뒤틀 뿐이다. 가족들은 그곳의 생활을 즐기며, 한편으로 고생하는 아빠에게 소소하고 일상적인 감사를 표시하자. 그리고 아빠는 기러기 가족 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면, 최대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희생을 감내하는 수많은 기러기 아빠들이 마음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정언 명제는 바로 ‘오늘을 즐겨라’다.
글을 쓴 하지현 박사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아우르는 현미경 접근법으로 도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소통 전문가’입니다. ‘부부의 속마음’ ‘우리 시대의 중독’ ‘성질 연구’처럼 일상 생활과 맞닿은 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와 치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심리학> <소통의 기술> <당신의 속마음> 같은 책도 펴냈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와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그의 책 <도시 심리학>에는 기러기 아빠와 가족의 심리를 찬찬히 분석한 글이 수록돼 있습니다.
디자인 여유미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조경택 캘리그래피 강병인
-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마음까지 건강한 기러기 가족이 되기 위해 오늘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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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