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 참 따뜻하다.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름이다. 부모님의 가슴에 안기면 편안함과 동시에 애틋함과 같은 감정이 솟아오르지만,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가 된다. 무슨 짓을 해도 다 들어주고, 안아주고, 이해해주실 것만 같은 안도감이다. 부모라면 아마도 따끔하게 한마디 할 일 마저도 조부모에게서는 무한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손자, 손녀… 역시 뭔가 다르다. 아직은 손자, 손녀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 낳은 아이니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엽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키우던 개가 낳은 강아지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보내는데, 인간이라면 더하지 않겠는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손녀, 손자 사이의 관계는 남다르다. 절대적인 사랑과 존중 같은 것이 있다. 그것도 아주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 무릇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감정의 오고 감이 존재한다. 부모 자식 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한 지원을 해줘야 하고, 훗날이 되면 자식은 부모를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조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이해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적다.
게다가 조부모와의 사이에는 균형 감각이 존재한다. 부모와의 사이가 틀어지면 양쪽 다 힘들 수밖에 없다. 장성해서 결혼을 했다면 좀 낫겠지만, 같은 집에서 사는 경우라면 아주 불편하다. 안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다. 좋은 감정일 때에는 돈독하게 지낼 수 있지만, 나쁜 감정이 끼어들면 이보다 불편한 사이도 없다. 다행히 가족은 그 존재만으로도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자식과 부모 사이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곤 한다. 하지만 조부모와의 관계는 다르다. 서로 불편하면 떨어져 지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 된다.
우리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식처이자 보호막이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손자, 손녀는 절대적 내리사랑의 대상이다. 둘 사이에는 균형감 있는 애정의 소통이 가능하다. 따뜻한 애정의 소통은 그 관계 안에 있는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어릴 적 할머니가 “내 새끼!”라고 부르시면 괜히 우쭐해졌다. 그때는 그 우쭐함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절대적인 사랑의 표현에 대한 반응이었다.
부모의 부재로 ‘유기 불안’을 느끼는 아이들
세상이 많이 변했다. 대한민국은 쇼트트랙, 양궁, 핸드볼만 세계 최고가 아니다. 자살률과 더불어 ‘이혼율’이 OECD 국가 중 최고다. 물론 이혼이 부부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함께 사는 것보다 따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따로 있어야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이혼이 약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부부로서 연을 맺고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자녀다. 자녀가 혼자 독립할 만한 나이가 되었으면 모르겠으나, 양육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에게 부모의 이혼은 트라우마(외상성신경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다. 정서적 불안정과 더불어 지적 발달은 물론, 신체 성장에까지 장애를 일으킨다. 성인이 되면 대인 관계가 불안해지거나 우울증 또는 불안증에 걸릴 수도 있고, 이성 교제나 결혼에도 남다른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이 모든 증상은 부모에게서 버려졌다는 ‘유기 불안’에서 비롯된다. 조부모가 계시면 그나마 다행이다. 조부모와 손자, 손녀의 관계에는 남다른 애정의 소통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애정의 소통은 손자와 손녀의 부모가 존재할 때에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손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조부모
“이 새끼가 일부러 그래요! 이 나쁜 새끼! 뒈져라, 뒈져!” 할머니는 몹시 화가 나 있다. 여덟 살 된 손자 녀석이 오줌을 싼 걸 걱정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왜 그토록 화가 났을까? 부모가 이혼한 후 할머니 손에 맡겨졌는데 최근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아이 엄마가 연락을 끊자, 아이가 갑자기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엄마와 계속 연락을 하면 아이가 자라면서 힘들어할 것 같은 생각에 왕래를 끊었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손자와 할머니의 관계가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했다. 그전에는 놀러 왔다가도 할머니와 자고 간다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혼한 아들도, 두 사람이 잘 맞으니까 좀 낫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 일 없는 듯했다. 할머니도 힘에 부쳤지만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한 달에 한 번 왔다 가면 손자 녀석이 심통을 부리고 잘 먹지도 않으며 울기만 했다고. 이렇게 계속 두면 아이 마음에서 엄마가 지워지지 않아 큰일 나겠구나 싶은 생각에, 아이 엄마를 불러 설득하고 윽박지른 끝에 결국 아이가 다 자라 성인이 된 후에 보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 후부터 아이의 ‘유뇨증’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야뇨증’은 밤에 소변을 지리지만, ‘유뇨증’은 낮이고 밤이고 바지에 소변을 싸는 병이다. 힘들고 마음도 아팠지만 그래도 밝게 지내던 손자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자 할머니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고 달래기를 일주일 정도. 갑자기 할머니가 돌변했다. 손자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안 들으니 속상하고 화가 나서 그러겠거니 생각했는데, 매를 대는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손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할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으신 것이다. 할머니와 상담을 했다. 격하게 화를 내시던 할머니는 마음이 진정되자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 내 잘못이에요. 아이에게 어미를 떼어놓으려 한 내가 잘못이지요.” 할머니는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장래를 위해 엄마와 떨어져 있도록 했지만, 결과가 아이의 비정상 행동으로 나타나자 손자를 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 화살이 아이에게 향한 것이었다. 아이도 불쌍하지만 할머니 또한 그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조부모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조손 가족 형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지나친 책임감이다. 정상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처럼 키우고 싶은 조부모의 무거운 책임감. 내 손자, 손녀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모가 있는 정상 가정의 아이와 똑같이 자랄 순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최선은 다하되 조부모로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손자, 손녀의 상처를 완벽하게 회복시키거나 지우려 하지 말고 상처를 부둥켜안고 잘살 수 있도록 키운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또 사랑만큼 좋은 약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상처받은 손자, 손녀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가 무한한 사랑이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된다면 사랑만으로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조부모에게는 부모처럼 훈육하고 체벌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 잘못되면 모두 내 탓이란 걱정도 있다. 하지만 강한 교육은 오히려 아이를 멍들게 하기 쉽다.
할머니 손에 자란 버릇없는 아이가 주눅 들어 고개를 못 들고 사는 아이보다 낫다. 부모를 상실했다는 큰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에게는 유기 불안이라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다. 지나치게 말을 잘 듣고 소심한 아이의 마음속에는 ‘혹시 조부모마저 나를 버리면 어떡하나?’라는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 두려움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절대적인 사랑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당신들의 건강을 우선으로 챙기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길게는 20년을 부모 아닌 부모가 되어야 한다. 덜컥 병이라도 나면 남은 가족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손자, 손녀를 부모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도 전에 조부모를 잃는 또 한 번의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려면 생활 습관부터 바꿔야 한다. 열심히 움직이고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만드는 것이 좋다. 지나친 책임감은 버리고 사랑으로 키우고, 당신들의 건강을 먼저 살피는 것! 조손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글 김진세(고려제일정신과의원 정신과 전문의, www.mindhealth.kr)
- [조손가족]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씨가 조언하는 조손 가족이 살아가는 법
-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