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지혜로운 ‘현실파’ 동물 “몸집이 작은 초식동물로 태어난 토끼는 ‘쫓기는 자’의 상징이 될 것이다. 호동그란 눈과 큰 귀의 예민한 정보력, 짧은 앞다리와 긴 뒷다리의 민첩한 주행력 그리고 교토삼굴 狡兎三窟의 용의주도한 지력. 그 모든 것은 피하고 숨고 도망가기 위한 약자의 생존 장치다. (중략) 그러나 동아시아의 십이지신이라는 문화로 옮겨오면 토끼의 위치는 당당하게도 호랑이와 용 사이에 끼어 있다. 그것이 십이지에서 정동 正東의 방위신인 토끼 묘 卯다. 이 한자는 초목이나 생명이 번성하게 자라는 것, 왕성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토끼가 결코 약자가 아니라 어느 짐승보다 생명력에 가득 찬 상징물로 본 것만은 분명하다. 오방색 가운데 토끼는 푸른색을 뜻하고 사계절로서는 봄의 한가운데다. 음양오행 코드에서는 양 陽이요, 목 木이다. 십이지의 동물 나라에서 토끼는 당당히 동방의 위치를 점하며 청춘의 상징으로 힘차게 도약한다.” 이어령 선생은 한・중・일 비교문화 시리즈 중 하나인 <십이지신 토끼>에서 토끼라는 동물에 담긴 영화로운 뜻을 밝혀주었다.
또 토끼에게 ‘영원히 사는 도망자의 힘’이라는 근사한 레테르까지 붙여주었다. 비탈길을 만나면 짧은 앞다리와 긴 뒷다리로 누구보다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토끼야말로 ‘고난의 때 강자보다 생명력이 세지는 약자’라는 이야기다. 토끼보다 주력이 빠른 짐승도 토끼가 산언덕으로 도망치기만 하면 따라잡기 힘든 걸 떠올리면 ‘영원히 사는 도망자의 힘’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지 무릎을 치게 된다.
바야흐로 열두 띠 중 가장 생기가 발동하는 토끼해 신묘년 辛卯年이 밝았다. 총명하고 날쌔며 구김살이 없는 이 ‘현실파 동물’처럼 날쌔게, 지혜롭게 인생의 산언덕을 내달려볼까? 아니면 달 속의 옥토끼처럼 약방아, 떡방아를 찧으면서 불로불사의 상징물로 영원한 삶을 꿈꿔볼까? 우리 조상들이 맹수를 제치고 영험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꼽은 토끼의 해가 찬연하게 밝아오고 있다.
사실 토끼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예술가의 편애까지 받아온 동물이다. 동화를 넘어서 철학, 심리학, 언어학 등이 압축된 명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를 끌어들여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막중한 임무를 흰 토끼에게 맡긴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존 업다이크는 <달려라 토끼> <돌아온 토끼> <토끼는 부자다> <잠든 토끼>라는 ‘토끼 연작’을 통해 현대 미국 중산층의 물질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요셉 보이스가 작품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고 자신과 동일시한 동물도 토끼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는데, 토끼는 토양과 생식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가장 흡사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백남준 역시 달과 토끼를 상상력의 상징이자 창작의 원천으로 생각해 작품에 자주 끌어들였다.
21세기의 옷을 입은 별주부전 2011년 <행복>의 첫 번째 표지를 장식한 작품도 이민선 작가의 ‘별주부전’ 속 토끼다. 거만스레 팔짱을 낀 채 서 있지만 호동그란 눈에서 설핏 두려움이 지나간다. 이 ‘읽어야 보이는 그림’을 그린 젊은 작가의 자분자분한 설명을 좀 들어볼까? “토끼가 반짝반짝 빛나는 명품 금 가방을 들고 도망쳐요. 뒤따르는 육중한 별주부의 모습이 힘겨워보입니다. 별주부가 소리칩니다. ‘금 가방을 사줬으니 어서 간을 내놓아라!’ 이에 토끼가 뒤돌아보며 말한다. ‘세상에 간을 떼어놓고 다니는 동물이 어디 있나? 세상 물정 좀 더 배우고 오시오.’ 별주부는 힘을 다해 쫓아가지만 숨이 차는지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지요. 한데 도망가는 토끼는 맘이 마냥 편할까요? 거만스레 팔짱까지 끼고 객기를 부려보지만 토끼도 분명 이 상황이 걱정되긴 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림 속에 촘촘한 재미를 넣어 ‘읽는 그림’ ‘읽어야 보이는 그림’을 만든 이민선 씨는 대학에서 희곡 창작을, 대학원에서 ‘컨텐츠 디자인’을 전공한 신예 작가다. 글과 그림을 모두 섭렵한 그만의 장기를 살려 ‘스토리텔러’로 나섰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잘 그린다는 평도 받았지만 아버지(그녀의 아버지는 ‘가장 한국적인 현대 화가’로 불리는 이만익 선생이다. 대중에게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포스터를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만큼 그릴 수 있을까란 부담에 그림을 택하지 못했죠. 대신 희곡을 쓰고 싶어 극작과에 들어갔는데, 점점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되살아나더라고요. 대학원에서 ‘컨텐츠 디자인’이라는 전공을 택했는데 이름 그대로 디지털 미디어로 ‘이야기’를 디자인하는 분야죠.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꿈이 된 제게 마침맞은 전공이었어요. ‘별주부전’ 속 토끼는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인 세화 歲의 표현 방식을 따라 그렸어요. 화원들의 기법이니 민화 기법보다는 세련되고 객관적으로 보이죠. 물론 해학적이고 자유로운 민화의 느낌도 함께 담았고요. 이 그림은 붓 대신 포토샵으로 그린 디지털 페인팅이랍니다. 고유의 이야기인 설화를 디지털이란 도구로 그렸으니 21세기가 찾아낸 스토리텔링 기법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 표지 작품은 21세기용 맞춤옷을 입은 ‘별주부전’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왼쪽) 이민선, <단군 신화> 중 ‘웅녀 변신도’, 종이에 아크릴, 2010
그녀는 전통 설화나 신화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에 관심이 많다. 대학원 졸업 작품도 우리의 국조 신화인 ‘단군 신화’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다. 갈피마다 충실한 ‘이야기’로 채워진 그림책이다. 이제 스타트라인에 선 이 젊은 작가는 앞으로 어떤 21세기형 스토리 텔링을 보여줄까. 하나 분명한 건 그가 앞으로 채워갈 삶의 밀도만큼 그의 그림도 풍성한 이야기로 촘촘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
이민선 씨는 서울예술대학 극작과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콘텐츠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원의 콘텐츠디자인 랩에 서 함께한 <토종전-생각도안 두 번째 이야기>(2009년 제로원 디자인 센 터에서 열렸다) 중 ‘별주부전’으로 첫 전시를 시작했다. 앞으로 잊혀가는 우리 전통 설화나 신화를 디지털 화폭에 그려내는 작업에 힘쓸 계획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