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혹시 겨울 바다를 꿈꾸십니까.
머리카락 휘날리며 수평선을 바라보거나 철 지난 백사장에 홀로 발자국 남기며 기러기 날아가는 푸른 하늘을 향해 입김을 쏘아보는 모습. 그렇죠, 겨울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이죠. 아, 더 있습니다. 이젠 됐어, 툭 떨어지는 동백꽃과 어장에서 돌아오는 늙은 어부의 흰 머리카락, 모자반 줄기를 널고 있는 아낙의 손등. 그런 것을 사진이나 마음속에 담아둘 수도 있고요.
“나는 겨울 바다가 좋아”와 “나는 바나나 우유가 좋아” 중에 사람들은 어떤 말을 더 자주 할까요. 뒤쪽이면 간단합니다. 사 마시면 되니까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겨울 바다를 택할 것입니다. 그럼요. 바다고 그리고 겨울인데요. 손을 담그면 순식간에 물이 들어버릴 것 같은 겨울 바다는 너무 푸르고 처연해서 독한 이별의 아픔을 겪은 화가의 수채화 같습니다. 그만큼 쓸쓸합니다. 혹독할 정도로 스산합니다. 그런데 대도시 속에서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그 복잡하고 번잡한 곳에서도 외롭기는 매한가지 아니던가요. 우리는 어쩌면 쓸쓸함을 견뎌내보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먼저 기차를 타세요. 사람들이 종종 호남선이라고 착각하는 전라선을 타면 종착역인 여수항에 도착할 것입니다(호남선은 목포로 갑니다). 항구에 만족하시면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서도 좋습니다. 여수에는 근사한 바닷가 카페와 횟집이 많으니까요. 야경도 볼만합니다.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완벽하게 숨겨놓은 게 야경이죠. 하지만 무언가가 그대를 끌어당기거나 자꾸 밀어낸다면 더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어떤 것은 퀴즈 쇼의 맨 마지막 문제처럼 가장 먼 곳에서 기다리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그곳까지 가야 하죠. 이곳은 바다니까 당연히 배를 타야 합니다.
이제 그대는 바람과 자신이 탄 배가 같은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겨울은 북서 계절풍의 시기입니다. 북서쪽 대륙에서 불어오는 것으로 먼 옛날 일본이나 오키나와로 갈 때 이용했던 바람이기도 합니다. 여름철에는 반대로 남동 계절풍이 붑니다. 그 바람은 습하고 따뜻하죠. 그러니까 여름에 바다가 습하고 따스한 편지를 대륙에 보냈는데 이렇게 차갑고 냉정한 답장을 받는 것이죠. 아마도 잔파도가 끊임없이 일며 하얗게 부서지고 있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표창이 무수히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그 풍경은 보는것만으로도 부르르 떨리지만 어쩌겠어요. 그런 게 겨울 바다인걸요.
거문도에 딸린 반놀섬의 아침노을. 노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작은 무인도다.
1 등대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거문도 전경. 왼쪽 서도와 오른쪽 동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2 테트라포드에서 낚시하는 모습. 겨울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고등어와 전갱이 따위를 낚는다.
이곳에 오시려면 우선 세 군데 섬을 들러야 합니다. 먼저 나로도에 배가 닿을 것입니다. 그 섬에는 예전에 떡을 팔던 아주머니들이 있었습니다. 배가 잔교에 닿으면 떡 함지를 인 여자들이 몰려들었죠. 떡을 올리는 손과 돈을 내리는 손이 서로 교차하여 멀리서 보면 마치 먼 항해를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장면 같기도 했죠. 아, 지금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장면이 어디 한두 개인가요.
나로도를 떠나면 만 灣이 끝납니다. 육지의 흔적이 사라지고 오로지 섬의 세상이 됩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섬, 섬들. 육지의 여행은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서로 이어지는데 바다는 다릅니다. 이면우 시인의 시 중 “서로 다치지 않을 만큼의 간격이 눈물겹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인이 숲에서 나무들을 보면서 한 말입니다. 문득, 한 치 빈틈도 없이 맞닿아 있는 육지의 국경이 떠오릅니다. 맞닿아 있으면, 다치기 십상이죠. 섬과 섬 사이에도 그 간격이 있습니다. <어린왕자>와 <은하철도 999>에는 별을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소혹성들. 섬이 꼭 그렇습니다.
저는 일곱 살 정도 되었을 때 그대의 행보와는 반대로 바다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고 자란 섬에서 처음으로 여수항에 가본 것입니다. 섬이 하나씩 다가올 때마다 낯선 세상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주선과 배는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공통점이 있기도하죠. 그래서 섬은 각자 독립된 공화국 같습니다. 하긴, 사람 하나하나도 독립된 공화국입니다. 저마다의 보폭과 기준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곳으로 오는 그대는 어떤 이름의 어떤 공화국입니까. 다음 도착은 손죽도입니다. 신우대가 많아 붙은 이름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조개더미가 발견된 곳이며 선조 20년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이 100여 명의 수하를 이끌고 왜구와의 전투 끝에 순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순직의 이유가 그의 공을 질투한 상관의 무리한 출병 명령이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함량 미달인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서 죄를 짓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배는 손죽도에만 대지만 그 주변으로 몇몇 유인도가 있습니다. 소거문도가 있고, 평도와 광도가 있지요. 이동의 불편함 때문에 거기는 섬속의 섬 같은 곳입니다. 손죽도를 출발하면 풀의 섬, 초도가 나타납니다. 마을이 세 개 있는 곳이죠.
예전에 이곳 초도중학교에 강연을 간 적이 있습니다. 전교생이 11명이었죠. 그 애들은 밥을 스스로 해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반찬만 싸옵니다. 순번인 학생이 전기밥솥에 밥을 하자 다섯 개의 반찬통을 놓고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더군요. 남은 여섯 개는 저녁밥용이랍니다. 참 기특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려 함께 탁구를 쳤습니다. 변방의 순박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아이들과 헤어진 다음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시간이 좀 남자 저를 초청한 교사분이 저를 데리고 초라한 가게로 가더군요. 가게 안에는 탁자 두 개와 예닐곱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맥주 두 병과 복숭아 통조림을 시키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우리 학교 교사들 유일한 회식 자리입니다. 메뉴도 늘 같습니다. 통조림과 과자.”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섬입니다. 배는 초원을 건너는 거대한 초식동물처럼 다시 출발합니다. 여기서는 배가 조금 더 흔들릴 겁니다. 늘 파도가 높은 곳이죠. 그렇지만 다와간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대가 탄 배는 쾌속선입니다. 여수에서 이곳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리죠. 저 어릴 때는 여덟 시간 걸렸습니다. 그것도 늙은 사내들의 화투와 소주와 담배 연기와 가래침 긁어 올리는 소리 속에서 말입니다.
1, 2 백도 모습. 거문도에 속해 있는 무인도로 유명 관광 명승지이다. 거문도에서 28km 떨어져 있으며 부정기선이 다닌다. 현재는 상륙이 금지되어 배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
거문도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끝없는 수평선과 바람에 고개를 꺾고 있는 털머위 잎사귀와 고개를 웅크리고 종종 걸어가는 주민들이 보일 것입니다. 오후 배로 왔다면 오래지 않아 날도 저물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멀리 와버린 것에 대해 후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후회는 새벽 4 시에 한다고 해도 늦은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이곳 사람들은 수백 년간 대를 이어 그 겨울 바다를 보면서 살고 있는데요, 뭘. 거문도 하면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당장은 유명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찾아와 심심하기 짝이 없는 게임을 하며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다간 것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잊어버리셔도 좋습니다. 연예인의 의미 없는 놀이와 칭얼거림은 채널마다 넘치니까요. 거문도 사건 (1885년 4월부터 약 2년간 영국의 동양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있습니다. 지금도 몇몇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행은, 특히 겨울 바다 여행은 여행지를 매개로 해서 내가 그 무언가를 만나는 행위 아니겠어요? 그대, 사랑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왔다면 밤바다로 나가시죠. 밤바다는 비밀스럽습니다. 바다에 밤이 들면 더 많은 비밀이 바다에 녹아듭니다. 그것 때문에 바다는 고양이처럼 행동하고 나무처럼 침묵합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되겠지요. 파도가 갯바위에서 부서지고 있습니다. 이 파도는 세상 저쪽에서 아주 먼 거리를 달려온 것들입니다. 옆집 처자를 흠모해도 멀기만 한 게 사랑의 속성이지만, 이 사랑보다 더 강렬하고 오래 걸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구 반 바퀴. 어떤 그리움이 있는지 몰라도 끔찍할 정도의 집착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서져버립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던 열망이 바위를 만나는 순간 물보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연모의 끝. 하지만 물거품이 아닌 사랑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별이 그랬고 성공한 사랑의 권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파멸 직전에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직전의 미학. 누구랑 헤어지기 직전에 가장 정이 깊게 드는 것과 비슷한 것일 테죠.
그런데 말이죠, 파도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부서진 파도가 채 밀려나기 전에 다음번 파도가 달려듭니다. 막 도착하기 직전에 조금 전 파멸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만나고 그리고 뒤섞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이미 다녀온 이들과의 만남이죠. 이를테면 산에 올라오는 이들과 내려가는 이들끼리의 조우 같은것 말이죠. 그대가 타고 온 배 있잖습니까. 그대가 서 있는 자리에 어젯밤에 서 있었던 이는 오늘 그 배를 타고 나갔습니다. 선착장에서 서로 언뜻 스치기도 했겠죠. 다음 날 또 다른 이가 그대 떠난 그 바위를 찾아올 것이고요. 마치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산은 맺히게 해주지만 바다는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산에 가고 상처를 입은 이는 바다로 옵니다. 그러니 그대, 복잡한 심사를 억지로 풀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바다만 바라보세요.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치유는 이미 시작됩니다. 무심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골머리 끙끙 앓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저는 오랫동안 그 바닷가를 배회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왼쪽) 간혹 산책을 가는 서도 끝 녹산등대. 사람들이 인어를 보았다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오래 바라보는 것을 닮아갑니다. 우리가 죽을때 콘크리트 벽이나 비씨카드를 닮아 있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허수경 시인의 글 중 장터 여인네가 슬퍼서 밤새 울다가 새벽에 배가 고파 밥 먹고 계속 울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배가 든든해야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먹어야죠. 이 먼 곳까지 오셨으니 여기서만 가능한 것을 맛볼 차례입니다. 아, 숙소는 걱정 마십시오. 여기는 나름 유명 관광지라 여관과 민박집이 지천입니다. 겨울 여행의 좋은 점 하나는 숙소 잡는 데 걱정이 없다는것이죠. 초도와 달리 식당도 많고 술집도 여럿입니다.
지금은 삼치 시즌입니다. 삼치 아시죠? 보통 식당에서 구이로 드셨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회로 먹습니다. 마을 어부들이 섬 뒤편 바다에서 줄낚시로 잡아오죠. 수협 어판장에 넘기기도 하고 몇 마리 되지 않으면 그냥 집으로 가져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식당은 많아도 삼치회를 파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삼치는 수협 어판장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한 마리도 가능합니다. 사전에 회를 떠주는 식당을 물색해놓고 삼치를 가져가면 고소하기 짝이 없는 삼치회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 먹어보아도 너무 멀리 왔다는 후회는 씻은 듯 사라질 것입니다. 깊은 겨울 바다의 기운이 통째로 몸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열역학 2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언뜻 보면 어려운 소리 같지만, 그저 세상은 질서와 무질서가 반씩 공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질서가 만들어지면 어디선가 그 비율만큼 질서가 창조된다는 소리죠. 그대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돌아가서 다시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대의 행보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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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창훈 1963년 전남 여수 거문도 출생.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닻>이 당 선됐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등을 썼고, 최근 산문집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를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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