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흰 눈이 쌀밥이었으면 하는 허기진 사람들의 어깨에도, 떠나보낸 잎사귀를 그리워하는 겨울나무의 어깨에도 축복처럼 흰 눈이 내렸다. 이 눈은 세상 어딘가에 잠복해 있던 시간 여행 유전자를 부추기는 것 같다. 눈에 덮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차원 이동을 해버린 듯하다. 이 풍경 속에 스노우맨이 서 있다. 상상의 숲에서 걸어 나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아저씨. 올해로 서른두 살이 된 명작 동화 <눈사람 아저씨> 속의 스노우맨이 생각나 나는 벙싯 웃었다. 레이먼드 브리그스가 지은 <눈사람 아저씨>의 스토리를 떠올려본다. 눈사람을 만들고 잠이 든 소년에게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 아저씨가 찾아온다. 소년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저씨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눈사람 아저씨는 소년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 얼음탑과 얼음성의 동네인 북극으로 데려간다. 다음 날 아침, 꿈에서 깬 소년은 목도리와 모자만 남긴 채 녹아내린 눈사람을 보게 된다. 이 단맛 나는 그림 동화를 김은기 작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로 세공해 한 폭의 유화로 만들어냈다. 바로 <행복> 12월호 표지 작품인 ‘스노우맨’.
“그림 동화책은 이야기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풀어낼 수 있지만, 회화는 한 화폭에 상징적으로 압축해야 하죠. 이번 표지 작품에도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어요. 상상의 숲에서 현실로 차원 이동해 우리 집을 방문한 스노우맨, 자신이 주인공이 된 그림책 <눈사람 아저씨>를 가슴에 품은 스노우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죠. 실재하는 책이라는 현실을 화면 맨 앞에 등장시키고, 책을 품에 안고 날 찾아온 스노우맨은 상상 속의 미래가 되게 하고, 뒤로 보이는 희미한 숲은 다른 원근의 세계, 곧 과거의 일이 되게 했죠. 한폭의 그림에 또 다른 그림이 숨어 있는 동시에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이죠.” 레이먼드 브리그스의 그림 동화 <눈사람 아저씨>와 그의 회화 ‘스노우맨’이 다른 지점이 이것이다.
동화를 모티프로 한 그의 작품 <비밀의 화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빨강 머리 앤> <마법의 설탕 두 조각>에서도 그가 겹겹이 쌓아놓고 숨겨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토끼를 쫓다 토끼굴 속으로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가 겪는 일들이 루이스 캐럴의 동화라면, 그의 그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토끼가 정장 차림으로 차를 마시고, 앨리스는 블라블라 인형이 되어 있다. 마티에르가 느껴지지 않는 밝은 파스텔 톤 화면이 상상 속 이야기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오른쪽)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2008
사소한 일상으로 초대 지금보다 훨씬 새파란 청춘 시절, 그는 내면세계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에 몰두했다. 초현실성의 붓질이 눈에 띄는 그림이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짐이기도 하지만 덤이기도 한 여자의 일상을 쌓아가느라 그림 그리는 꿈을 잠시 접었다. 쌉싸래한 인생의 고비를 겪으며 밥벌이의 고단함을 알게 된 그때, 그에게 온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결국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은 나와 동떨어져 있는 바깥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라는.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쉬워졌고, 일상의 것들이 등장하는 ‘사소한’ 그림이 됐다. 쿠션, 오솔길, 커피잔, 책 등이 사소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푸근한 그림.
그는 이 사소한 물건과 일상 옆에 숨은그림찾기 같은 이야기도 그려 넣는다. 예를 들면 ‘여행’이라는 작품은 창문, 테이블, 책처럼 일상 사물이 등장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팝업북 속에 여행 중인 부부, 이 부부의 미래의 삶이라 짐작되는 사물(아기 바구니, 아담한 집 같은)이 작게 그려져 있다. 일상과 판타지가, 현재와 미래가 넘나드는 풍경이다. 이처럼 그는 창문 너머, 벽 속에, 책 속에, 꿈의 서사를 새겨놓는다. 이때 책, 창문, 가방, 새장, 문 같은 일상 사물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중요 연결 고리다. “이렇게 자잘한 일상의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이 그림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므로 산다는 건 별것 아니면서도 아주 특별한 기회라는 걸.” 그는 KBS 에서 현실과 상상 세계를 넘나드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집 안팎을 뱅뱅 돌며 일상에 휩싸여 사느라 낡아버린 우리 여자들은 그의 그림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고매한 철학을 강요하는 대신 달콤쌉싸래한 행복감을 안겨주니까. 그건 인생의 맛을 제대로 체득한 이만이 아는 행복, 실컷 울고 난 후의 청량한 행복 같은 것이다. “한 해 소출을 기대하며 충실하게 밭을 가는 농부처럼 저도 한해 한 해 성실하게 그릴 겁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 마음을 쓰다듬고 기름지게 하는 옥토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요?” 그의 올 한해 농사도 대풍이었기를.
(오른쪽) ‘여행’, 캔버스에 유채, 116×91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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