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37X26.5cm, 수묵담채, 2010
걷기는 말하기다 나는 일찍이 그토록 매력적인 걸음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는 몇 초 사이, 나는 한 남자의 성격과 인생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 남자였다. 프랑스 여자라면 모를까, 프랑스 남자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의 ‘걸음걸이’는 적어도 내겐 프랑스 남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유일한 ‘정보’인 셈이다. 그는 양팔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걸었는데, 그렇다고 옆구리에 딱 붙인 것은 아니고, 팔과 옆구리 사이에 얇은 초승달을 끼고 있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그는 분명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을 것이다. 어깨에 약간 힘이 들어가 있고 걸을 때 자신만의 포즈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상체를 꼿꼿이 펴려고 노력했지만 아주 오랜 시간 책상에 등을 수그리고 앉아 있던 흔적 때문에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등은 책을 읽을 때처럼 약간 굽은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독서광이 분명하다.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의 걸음걸이는 ‘어기적거린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턱을 30도쯤 위로 들고 입꼬리를 살짝 치켜든 당당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테이블 안쪽으로 밀어 넣고 양손을 허리 뒤로 가져가 가볍게 포갰다. 그러고는 천천히 성큼성큼 걸으면서 바닥에서 창가로, 다시 창가에서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왼쪽 창가를 바라봤을 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깐 멈칫 하는 듯했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는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예의를 다하며 사색을 즐기는 남자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주 소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설 만큼 까다로운 성격이지만 여자를 배려하는 일에는 더없이 관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몸짓언어인 걷기는 그 자체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된다. 몸의 자세나 걸음걸이, 걷는 속도나 보폭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 현재 상태나 목적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의 저자인 조지프 A. 아마토는 “옹색한 걸음이든 여유로운 걸음이든, 멈칫거리는 걸음이든 대담한 걸음이든, 모든 걸음걸이에는 걷는 사람의 에너지와 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우리는 걷는 동안 대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걷기 그 자체는 어떤 말보다도 강력한 언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함부로 걸어서는 안 된다. 걷기가 내포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의미를 되새기고, 어떤 걸음을 걸을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걷기, 우주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는 <걷기 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가 지구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왜 걷는지, 어떻게 걷는지, 걸어본 적이 있는지, 더 잘 걸을 수 있는지, 걷기를 통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문해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굉장히 놀랍다. 걷기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적, 심리적,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질문인데도 말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살면서 걷는 행위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걷지 않으면 삶의 동선을 이어나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몸짓이어서 전혀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발자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직립보행은 ‘우주의 원리’를 오롯이 담고 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행위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내딛으며 ‘지구를 계측하는’ 일은 인류적 관점에서 보면 ‘말하기’이고, ‘듣기’이고, ‘사유하기’이며, 우주적 관점에서는 ‘기하학’이자 ‘역학’이다.
먼저 걷기가 왜 우주와 소통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리스어로 ‘측량하다’를 ‘게오메트레인geometrain’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땅을 측정한다는 의미이고, ‘게오메트리아 geo-metria’는 ‘측지’, 즉 땅의 넓이를 재는 일을 말한다. 이 단어에는 걸음과 측정, 움직임과 균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늘날 아주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기하학은 본래 땅을 균등하고 공정하게 나누려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난 학문이다. 바로 이 측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인간의 걸음’인 셈이다. 18세기 말, 프랑스가 ‘코뮌’이라는 영토를 구획할 때 그 기준이 된 것도 ‘인간이 하루 동안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 였다. 이는 인간의 걸음이 기하학의 근간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무르는 <걷기의 철학>에서 인간의 걸음이 우주와 소통하는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별들 사이의 공간이나 태양계의 규모나 은하계의 숫자 따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알다시피 현기증 나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는 인간의 발걸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람은 그 무한성 속에서 제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방대한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행성을 측량하는 것, 즉 땅 위를 걷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고통’으로서의 걷기와 ‘이상’으로서의 걷기 영어로 ‘걷기 walk’는 ‘바다의 성질처럼 굽이치며 들까불다’라는 뜻으로 모든 생물이 바다에서 기원했음을 말해준다. 이 단어는 13세기 무렵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와 ‘돌아다니다’ ‘여행가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산업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도보로 가다’라는 뜻이 더해져 인간의 ‘걷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사실 과거에는 걷기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걷는 사람은지위가 낮고 권력이 없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탈것을 이용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걸었다. ‘걷는 인간’은 발과 똑같이 열등하게 취급당했고, 거칠고 더러운 신발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걸을 때는 발과 다리를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고상한 정신적 활동도 필요 없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걷기가 더욱 천대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여행의 고통 the travail of travel’이라는 말을 생겨났을까. 여행과 고통이라는 두 단어는 비슷한 어원을 갖고있는데, 이는 도보로 움직이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일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하지만 의식이 깨어 있는 작가들은 걷기의 긍정적인 면에 몰두하기도 했다. 브르타뉴 출신의 작가 피에르 자케 엘리아스는 그의 문학 작품에서 가난한 시골 농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을에서 농부는 자신의 속도, 즉 자신의 일상적인 리듬으로 움직인다. 여기저기가 움푹 팬 길,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흙길, 초원 등을 걸을 때 그의 걸음걸이는 도시의 보도를 걷는 사람들과 다르다. (중략) 도시에서 농부는 방랑자이자 구경꾼이다. 일종의 관광객인 것이다. (중략) 농부의 느린 움직임, 무겁지도 않고 서투르지도 않아서 경탄을 자아내는 경제적인 움직임은 그가 일을 하면서 익힌 리듬 덕분에 생긴 것이다.”
(왼쪽) ‘happy together’, 36X36cm, 수묵담채, 2010
지리학자로서 세계의 미개척지를 탐험한 데이비드 톰슨 또한 블랙풋 인디언(피에간 족)의 걸음걸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곧고, 가볍고, 편안하게 걷는다. 우아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초원에서 몸을 곧게 펴고 걷는 인디언들의 걸음걸이는 백인에 비해 대단히 유리하다. 인디언들은 로브(길고 헐거운 겉옷) 속에 팔을 접어 넣고 땅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백인들은 몸을 곧게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몸을 좌우로 흔들곤 한다.” 걷기를 먹고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아닌 뭔가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계기는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다. 걷기가 정신을 고양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아주 ‘시적인’ 이동 방법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걷기와 여행이 자아, 예술, 학문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수단이라는 인식도 높아졌다.실제로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이 걷기를 찬양하며 명언을 남기기 않았던가!
루소는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궁무진한 원천,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브르통은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은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라며 그 매력을 칭송했다. 그뿐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여러 주일, 여러 달, 아니 사실상 여러 해 동안 상점이나 사무실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내 이웃 사람들의 참을성, 혹은 정신적 무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걷지 않는 자들’을 비난했다.
‘보행 장애’를 앓는 사람들 많이 걷지 않는 사람은 감정이 메마르는 것은 물론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인의 5%는 발톱이 안으로 자라는 증세 등 발 관련 질환을 겪고 있으며, 미국 정형외과학회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무릎, 발목, 발, 발가락 부상으로 응급실을 찾는 사람이 거의 4백만 명에 이른다. 걷기의 생체 역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보행 장애를 금방 알아볼 수 있으며, 전문 용어로 그런 증세를 설명한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그런 증세를 ‘내반족’ ‘갈퀴족’ ‘평발’ ‘발끝 걷기’ ‘발꿈치 걷기’ 등으로 불렀다. 이런 증상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비만, 올바르지 않은 자세, 잘 맞지 않는 신발, 오래 서 있는 것 등이 원인일 수도 있고, 뇌, 눈의 내부, 신경계, 호흡기, 순환계의 문제가 원인일 수도 있다. 또한 속귀, 등, 무릎, 힘줄, 발목 또는 발 그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인간은 걷기 위해 태어났다 걷기를 찬양한 무수한 낭만주의자들의 염원과는 달리 도로의 보편화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간은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른바 ‘선택적 걷기’의 시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 중 집과 회사를 오르내리는 계단이나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는 몇 계단을 밟는 것 외에는 걷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걸을 것인지, 자동차를 탈 것인지를 고민한다. 결론은 언제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쪽이다. 걷기를 포기하고 자동차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내 삶을 얼마나 척박하게 만드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했듯 걷기의 미학을 깨달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걷기의 기술, 즉 산책의 기술을 이해하며, 한가로운 산책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평생 한두 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가을은 걷기에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인간은 걷기 위해 태어났다. 낙엽 떨어진 도로 위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두 다리를 성큼성큼 내딛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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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조지프A. 아마토, 작가정신)<걷기의 철학>(크리스토퍼 라무르, 개마고원)<걷기예찬>(다비드 르 브르통,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