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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가족] 교사 백화현 씨의 가정 독서 모임 “책에서 진짜 나를 찾자, 진짜 내 삶을 살자”
아주 소박한 이유로 일주일에 한번씩 한집에 모여 책 읽기 모임을 시작한 이 동급생 아이들은 ‘기쁘게,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자기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씩 즐기면서, 책을 읽고 쓰고 나누고 어울렸다’. 그렇게 7년 동안 함께 책을 읽으며 아이들이 얻은 건 논술 대비법이 아니라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지혜였다.


매주 일요일 저녁 백화현 씨의 집 거실에 함께 둘러앉아 책과 신나게 놀았던 아이들. 1기와 2기 모임 아이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서로 어울려 좇아 노니 비단 같은 글 두루마기가 상 위에 가득하고 뛰어난 말과 아름다운 글귀는 선반 위에 가득하다. 때때로 이를 낭독하면 낭랑하기가 금 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였다.’ (금원당 김씨의 <호동서락기 湖東西洛記> 중). 그 옛날 이 풍경이 2010년 10월의 서울 관악구 난곡동으로 시간 이동한 것 같다.‘삼호정시사’ 라는 시 모임을 함께한 그 옛날 김금원과 벗들처럼 이 아이들도 한자리에 모여 앉아 금 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처럼, 콩 볶는 소리처럼 정겹게, 도란도란 책을 읽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이, 눈길이오래 머문다.

‘나라는 존재의 귀중함을 깨닫기 위해 책을 읽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7년을 함께한 아이들과 선생님이다. 책이라고는 판타지 소설밖에 안읽던 아이, ‘취미’란에 독서 말고는 달리 쓸 게 없을 만큼 책을 좋아하는 아이, 책과 친하지 않아 30쪽도 채 읽어내지 못하던 아이, 국어 과목의 공부 방법을 좀처럼 모르겠다며 난감해하던 아이…. 이렇게 성향도 처한 형편도 다른 아이들이 함께 모여 매주 일요일 저녁 2시간씩 책을 읽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대학교 3학년이 되는 동안 책을 통해 자기 맘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다. 아이들을 모이게 한 건 ‘학교 독서 교육의 전도사’로 불리는 백화현 교사(봉원중학교)였다. 모임의 일원인 벼리와 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병치레도 잦고 공부도 잘 못하던 큰아들 벼리, 그래서 자존감을 잃어가던 아이가 모임의 단초였어요. 지나치게 성적을 비관하는 아이에게 책의 힘으로 자존감을 세워주고 싶었지요. 편독하지 않고, 폭넓고 깊이 있게 읽으면서 세상과 만나려면 모임이 필요하겠다 싶어 아이의 단짝 친구와 우리 집 가까이에 사는 제자를 불러모아 책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모임에 끼고 싶은 친구를 데려오되 입시 독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라, 프로그램은 따로 없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이 취지에 동의하는 아이들만 데려오라 했죠. 그렇게 해서 여섯 명이 모임을 시작했어요. 평소 독서 교육 운동에 매진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 모임을 통해 ‘진짜 나를 찾자, 내가 내 삶을 살자’라는 마음을 얻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는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매주 자신의 집 거실을 내주었다.

그렇게 소박하게 모인 아이들과 선생님은 함께 프로그램을 짜고, 규칙도 만들었다. ‘성실하게 참여하자-함께 만들어간다는 생각 잊지 않기, 못 오게 될 경우에 연락하기’ ‘자기 속도대로 한 걸음씩 꾸준히 걷자-잘하는 친구 시샘하지 않기,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구박하지 않기’ ‘손가락 새로 빠져 달아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자-독후 활동에 연연하지 말고 읽는 일 자체를 즐기기, 함께 만들어가는 추억거리 소중히 여기기’…. “아이들이 만든 규칙만 봐도 아이들이 이 시간의 의미를 체감했다는 걸 알 수 있죠.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이 시간을좋아했어요. 낙오하는 아이가 거의 없이 2년 동안 매주 모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책 읽기가 서툴러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아이도 있었지만 ‘저 친구보다 내가 덜 읽었다’가 아니라 ‘내가 이 모임에 오지 않았을 땐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는데, 그래도 여기 와서 내가 책을 읽게 된 게 기쁘다’라고 의젓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나도 아이들도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자기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씩 즐기면서, 읽고 쓰고 나누고 어울렸기 때문에 7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지요.” 이 이야길 전하며 백화현 선생님은 품에 안아주는 표정으로 웃었다.

처음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오카 슈조의 <우리 누나> 같은 그림책과 동화로 출발한 아이들은 어느새 호메로스를 읽고 셰익스피어를 건너 연암과 다산에까지 이르렀다. 책 한 권을함께 읽으며 각자 느낀바를 나누고, 책 몇 권을 비교해서 읽어보고, 장애우나 인권 문제 등을토론하며 첫해를 보냈다. 책 읽고 8컷 장면화그리기, 단편을 골라 읽고 책 속 인물과 인터뷰하기, 명작 동화 패러디하기처럼 ‘재미’라는 양념도 얹었다. 독서 퀴즈 대회를 열어 푸짐한 상품(도서상품권 그리고 과자!)도 선사했다. 의미와 재미, 사이 안 좋은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얻기 위해서였다.


1 이 모임의 단초가 된 큰아들 장벼리 군과 어머니 백화현 씨. 오른쪽은 연세대 국어국문과에 재학 중인 박유미 양이다.
2 독서 기행을 떠나기 위해 아이들이 만든 자료집.

1학기 끝무렵부터는 스스로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각자 정하고 책과 자료를 찾아 읽게 했다. 모임에 와서 그걸 발표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책을 읽은 후 친구들과토론을 하면서 내 사고의 틀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깨지고 변형되기를 반복했어요.” 은선이(조은선, 현재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3년)의 이야기처럼, 아이들은 ‘함께하는 독서’를 통해 생각의 가지를 나누는 넉넉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어렵고 딱딱한 독서 토론 모임이 아니라 친목 모임으로 생각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책과, 친구들과 보내며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이다. “은선이와 유미, 두 여자애들은 어찌나 책을 읽어대던지 겁날 정도였어요. 1주일에 2~4권씩 책벌레처럼 읽어나갔죠. 그렇게 1년 정도 함께 읽다 보니 책 읽는 속도도 빨라지고 책 읽기에 재미를 못 붙이던 아이도 어떤 분야의 책이든 편견 없이, 부담 없이 읽어내렸어요.

1년 활동이 끝나는 겨울방학 숙제로 내준 탐구 과제는 어른도 쉬 해결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그것도 그럴싸하게 해결해 오더라고요. ‘경제와 도덕은 만날 수 없나’ 같은 과제였는데 말이죠. 아이들은 찬찬히 책을 읽어나가며 서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나간 겁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몇 명의 낙오자가 생겨나자 이들은 ‘매주 갖는 모임을 줄이고 학기별로 독서 기행 프로젝트를 마련하자’고 뜻을 모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모여 그동안 읽은 책을 발표하고 여행을 준비해 떠나자는 것. 그렇게 해서 이들은 2년 동안 다섯 번의 독서 기행을 함께했다. 퇴계와 유학의 향기를 찾아 안동으로, <토지>와 <혼불>의 숨결을 따라 하동과 남원으로, 다산과 고산, 영랑의 숨결이 배어 있는 강진과 해남으로 떠났다. 책 속의 기쁨과 책 밖의 기쁨을 함께 느낀 것이다. 1기 모임 아이들이 고 3이 되어 더이상 모임을 이어갈 수 없게 되면서 작은아들 한솔과 그 친구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2기 모임을 꾸리고 있다. 1기 모임을 끝낼 때 아이들은 아쉬움에 눈물을 비쳤다고 한다.

‘시인과 농부’가 꿈이어서 대학에는 뜻이 없다던 큰아들 벼리는 어느 순간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 아직은 자신에 대해서 단정하기보다는 더 알아보고 싶다”며 혼자 학교 공부를 시작해 원광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다른 아이들도 연세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국대 등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입시에 방해가 될 거라던 독서 활동이 오히려 큰 힘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지식과 지혜와 생각의 폭을 넓혀준 책의 힘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모임의 대단함을 설명할 순 없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환경의 은선이가 중학교 3학년때 <갈매기의 꿈>과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쓴 글을 읽으면 이 모임에서 아이들이 책을 통해 얻은 위안과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속 잎싹은 애써 부화시킨 알도 자신의 온전한 알이 아니고 끝내는 족제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도전, 양계장 주인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기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초록머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 (중략)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불우한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거나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에 갇히게 되더라도 나는 잎싹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를 찾았듯이 나 역시 절망이나 슬픔에게, 혹은 그 누군가에게 내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중략) <갈매기의 꿈> 속 조나단처럼 많은 갈매기의 우러름을 받지 못하더라도, 훗날 그 누구에게도 칭송받지 못하고 작은 단칸방에서 후를 맞이하더라도, 나를 승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잎싹의 승화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작가의 명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진솔함과 뭉클함에 나는 잠시 울컥했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낯선 이를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내 안에 숨겨진 보물인 참 자아를 찾게 도와주는 낯선 이는 바로 ‘책’이다. 그 책 읽기를 한자리에 모여 즐거이 함께한 이 아이들은 ‘나는 누구이고 삶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진실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른이 됐다. 우리가 이 아이들과 이 가정 독서 모임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이다. 백화현 선생님의 고백처럼.“나는 이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함께 토론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자신을 튼튼히 키워가고 인간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아이라면, 결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거나 권력과 자본 앞에서 쉽게 무너져 버리는 무기력한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 독서 모임을 꾸리고 싶은 엄마를 위해
“초등학생을 둔 부모라면 먼저 부모들끼리 ‘책 모임’을 꾸려보세요.
엄마들끼리 책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책을 읽고 고르는 눈을 키우다 보면 자신감이 붙을 거예요. 그다음 아이들 모임을 꾸리는 게 좋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아이들의 독서 모임부터 욕심내다 보면 결국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따분해 하는 독서 토론 모임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니까요.
입시 독서를 위한 활동으로 치우치면 아이들은 책을 읽는 즐거움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책을 많이 읽고, 무조건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결과’에 집착하지 마세요. 단지 독서 모임을 통해 아이가 평생에 걸쳐 스스로 즐겁게 책 읽는 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해주세요. 아이들 모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아이 스스로 해보라는 수준으로 한 발짝 물러나세요. 부모는 코디네이터 역할로만 만족하시고요. 정해진 프로그램은 없어도 좋아요. 우리가 함께 만든 책 <책으로 크는 아이들>에 소개된 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빌려와 써도 좋고요.
아이의 독서 교육으로 고민하는 부모를 위해 제가 만든 블로그(blog.naver.com/bookiclub)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셔도 좋습니다. 물론 엄마들끼리 모여 책을 읽는 모임도 강추합니다.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엄마들이 책 모임을 통해 다시 자아를 되찾아가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요즘은 학교 내에 학부모 독서 모임도 많고, 도서관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성인 독서 모임도 있으니 찬찬히 살펴보세요.”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