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사람 꽃 하나가 허공에 피었다 진다. 우아한 피루엣(발레의 회전 동작)으로 물새처럼 공기를 가른다. 이 아이는 저 화려한 몸짓을 펼쳐 보이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했을까. 삶은 저렇게 홀로 겪어야 하는 공중 돌기가 아닐까, 하릴없는 생각이 스쳐간다. 8월 13일 한국 초연 무대의 막을 올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정진호 군.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키 150cm 이하 대한민국 소년 누구나’란 요강 아래 치러진 총 4차의 오디션, 8백여 명과의 경쟁, 1년 반동안의 오디션과 연습 과정도 기쁘게 치러낸 한국의 ‘빌리’다(한국판 <빌리 엘리어트>에는 총 네 명의 소년 배우가 더블 캐스팅되었다). 오디션에서 ‘싱 잉 인 더 레인 singing in the rain’에 맞춰 탭댄스를 선보인 ‘탭댄스 신동’은 해외 크리에이티브 팀의 탄성을 자아내며 한국 ‘빌리’로의 첫발을 뗐다. 진호는 여덟 살부터 시작한 탭댄스로 저잣거리에서 이름을 날리던 소년이다. 동년배의 사내아이들이 유희왕 딱지를 욕망할 때 진호는 탭댄스 스쿨에 드나들며 그 리드미컬한 춤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TV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탭댄스 신동’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진호는 수학으로 영재 교육을 받을 만큼 수학을 좋아해요. 탭댄스는한 동작 안에 많은 박자가 들어가는데, 센박·여린박·당김음처럼 수학적으로 구성되는 그 리듬에 진호가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탭댄스 신동’ 진호가 탭 슈즈를 신고 그 질서 정연한 춤을 선보인다. 따다닥, 탁탁, 따다닥, 탁탁. 컴퓨터 글쇠 소리 같기도, 젓가락 장단 같기도 한 그 리듬에서 진호는 수학적 규칙을 짚어내는 중이다. 어느 순간 진호의 발놀림은 리듬을 타고 아찔한 춤이 된다. 실제 공연에서는 무대 바닥에 1백10개의 마이크로폰을 설치해 진호의 발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사운드를 생생하게 들려줄 것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어떤 공연인가. 토니 어워드, 올리비에 어워드를 수상한 이 작품은 영화를 무대화하면서 무비컬(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의 모범이 됐다. 2005년 런던 빅토리아 극장에서의첫 무대 후 전 세계에서 4백20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브로드웨이에서 티켓을 가장 구하기 어려운 그 공연이다. 연출에 스티븐 달드리(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연출을 맡은 그가 뮤지컬 연출도 맡았다), 음악 감독에 엘튼 존, 안무에 피터 달링….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버쩍버쩍 마르는 스태프가 함께했다. 대처 시대 영국 탄광촌에서 파업으로 경찰과 대치하는 벼랑 끝 아버지와, 사나이답게 살기를 바라며 발레를 반대하는 아버지와 갈등 중인 소년 빌리. 시대와 자본과 가족애라는 중한 메시지가 한데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작사에서 TV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한 진호를 수소문해 빌리 오디션을 권유하면서 진호의 ‘빌리’ 되기 도전은 시작됐다. 4차에 걸친 오디션은 ‘빌리 스쿨’ 형태의 트레이닝을 겸했는데, 그 안에서 다각적 인성 검사까지 거칠 정도로(어린이 배우는 오랜 시간 함께할 동료 배우, 스태프와의 친화력, 적응력이 특히 중요하므로) ‘꼭 맞는’ 빌리 네 명을 찾아냈다. 빌리 스쿨에는 발레 마스터 이대원, 발레 코치 김민경, 탭 안무가 이정권, 아크로바틱 트레이너 조대현 씨 등이 참여해(공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라외칠 만한 스태프 구성이다) 아이들을 훈련시켰다. 방과 직후인 오후 3시부터 10시까지 매일 지속된 1년 반 동안의 트레이닝 속에서도 진호는 한번도 늦거나 결석하지 않았다. 1주일에 평균 14회의 클래스를, 30여 시간 동안 집중 트레이닝 받으면서도 주저앉은 적이 없다.
“빌리는 탭댄스, 발레, 아크로바틱을 모두 잘 춰야 해요. 그런데 전 오디션에 참가하기 전까지 발레를 해본 적이 없어서 유연성이 떨어졌어요. 등도 굽고 다리도 일자로 안 벌어지고. 발레의 턴아웃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너무 낯설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빌리 스쿨을 마치고 안양 집에 가면 밤 11시가 넘는데 매일 집에서도 발레 연습을 했어요. 엄마는 아랫층 이웃에게 피해가 간다고 말리셨지만….” “진호는 자면서도 허공을 향해 발레 동작을 취하고 탭 스텝을 밟을 만큼 빌리에 빠져 살았어요.” 마술처럼 그냥이루어지는 일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대견하게도 열두 살짜리 꼬마는 무대 위 영광이 있기까지 무대 뒤의 고독을 잘 견뎌냈다.
1 ‘탭댄스 신동’ 진호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위해 아크로바틱, 발레도 익혀야 했다.
2 진호의 꿈은 ‘춤추는 경제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엄마 임수진 씨.
4차 오디션에서는 아직 배우지도 않은 빌리의 노래들을 영어 가사로 외우고, 해외 동영상을 보면서 런던과 뉴욕 빌리의 동작을 죄다 외운 진호. 심지어 유투브 동영상으로 피터 달링의 <메이킹 빌리 스토리> 다큐멘터리도 부러 찾아봤다. “진호는 <빌리 엘리어트> 책과 영화를 찾아보면서 스스로 작품을 분석했어요. 해외 크리에이티브 팀과의사소통을 하려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했고요.” 대체 이 엄마는 신에게 어떤 공을 쌓아 이런 아들을 갖게 된 걸까.
<빌리 엘리어트>의 앵그리 댄스 신에서 빌리는 거친 욕을 내뱉는다. 바람이 불어 문이 꽝! 닫혀도 ‘죄송해요. 바람이에요.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말한다는 진호가 거친 욕설을 내뱉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채송화 꽃잎처럼 보드라운 심성의 이 아이는 이 장면을 위해 여러 번눈물을 쏟았다. 자신과의 팽팽한 기 싸움을치러낸 것이다. 지금 진호의 꿈은 ‘앵그리 댄스를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빌리’다.
3, 4 <빌리 엘리어트>의 공연 장면 중 ‘앵그리 댄스’와 ‘샤인’
꿈을 향해 tap tap tap! “저는 ‘더 레터’라는 신이 감동적이었어요. 윌킨슨 선생님이 빌리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자빌리는 엄마의 편지를 가져가는 거예요. 영화에선 그 편지를 읽기만 하는데 뮤지컬에선 죽은 엄마가 무대에 나타나요. 환영 속의 엄마는 ‘늘 자신에게 충실하라’라고 말하죠. ‘살러대러티 solidarity’ 장면도 좋았어요. 아빠와 토니 형은 탄광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고 빌리는 발레 스쿨에서 발레를 배우는, 세 가지 신이 다 들어가 있어요(편집자주; 아빠와 토니 형은 자본과 대치 중이고, 빌리는 세상의 편견·아버지의 반대와 대치 중인 상황이 한 장면에 조합돼 있다. 경찰과 광부가대치하는 장면과 아이들의 발레 장면을 병치해 광부들이 누구를 위해서 왜 싸우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중간에 광부 모자와 경찰 모자가 공중에서 엉키면서 광부는 경찰 모자를, 경찰은 광부 모자를 쓰게 되는데 그게 재미있어요. ‘solidarity’가 단결이라는 뜻이잖아요. ‘너와 내가 다를 게 없다, 단지 우린 지금 대치 중인 거다’라는 의미잖아요.” 슬기와 지혜까지 갖춘 열두 살 소년!
그야말로 ‘장한 아들’을 키운 엄마 임수진 씨. 용기 안에 기거할 줄 아는 엄마 덕분에 진호는 제 꿈, 제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진호누나가 대학생이에요. 큰애를 키워보니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알겠더라고요. ‘할아버지의 경제력에,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엄친아를 키운다’는 말이 정말 근시안적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적성과 꿈은 다른 거잖아요. 우리 세대는 점수 맞춰 간 대학 전공이 직업이 되고, 운 좋게 직업과 적성이 맞으면 그게 꿈으로 환치되던 세대인데, 이 아이들 세대는 달라요. 꿈과 적성이 들어 맞아야 행복한 세대거든요. 아직 진호는 이쪽 길이 제 꿈이라고 결정하진 않았어요. 단지 적성에 맞는다, 정도를 발견한 거죠. 나중에 ‘이길은 내 꿈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길로 돌아가겠다’ 하더라도 그 또한 아이의 삶 중 하나의 과정이니 괜찮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뮤지컬이 오르기까지의 무대 뒤 이야기, 아이들이 연습하며 성장한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빌리 엘리어트> 속 대사처럼엄마 임수진 씨도 아들이 ‘늘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봄날의 새싹 같은 이 아이도 이제 나이 먹으며 포기와 선택의 전술을 익혀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네 명의 한국 ‘빌리’에겐 언젠가 변성기가 찾아올 것이고, 낙원의 상실처럼 소년의 목소리를 잃은 이들을 대체할 또 다른 ‘빌리’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년은 그때가 되면 또 다른 꿈을 찾아 날개를 들썩일 게 분명하다. 아이를 가만히 도닥이는 마음으로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 명대사를 옮긴다.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려요.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기분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나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 네, 전기처럼요!”
아시아에서 최초로 초연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LG아트센터에서 8월 13일부터 오픈 런으로 공연된다. 문의 02-3446-9630, www.musicalbillyelli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