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페라 빌딩 2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JDS아키텍처’라는 건축사무소의 서적 출판 기념 전시회에서 만난 마시로 시게오 씨.
2 기능부터 심플함을 강조한 스페라 퍼니처는 모서리의 곡선 처리로 단순함을 한층 강조했다.
3 일본 곳곳의 장인들과 함께 작업하는 스페라의 상품은 디자인부터 판매까지 마시로 씨의 세심한 기획으로 이루어진다.
스페라를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여름, 도쿄 롯폰기 미드타운에서였다. 스페라는 물건과 공간을 매치한 디스플레이의 조화로 소품 하나하나의 디자인이 놀랍도록 돋보이는 인테리어 숍이다. 전체적인 디자인 콘셉트는 아시아와 유럽 스타일이 혼재된 이미지이고, 기능과 단순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 단순미는 전통의 일본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의 이미지는 더욱 아니다. 이런 디자인이 가능한 이유를 스페라 본점이 자리한 교토에서 아트 디렉터 마시로 시게오 씨를 만나 직접 들었다. 현재 일본 디자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트 디렉터, 마시로 시게오는 놀랍게도 재일교포 3세다. 한국 이름은 이향동 李香東, 1970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리코르디 앤드 스페라의 대표로 2003년 교토에 아트, 인테리어, 디자인, 음식이라는 다양한 테마를 독자적 미의식으로 표현한 공간인 스페라 빌딩을 오픈했다. 외관이 독창적인 스페라 빌딩은 스웨덴 건축가 그룹인 클라에손 코이비스토 루네(CKR)에 의뢰한 것. CKR은 마르텐 클라에손 Märten Claesson, 에로 코이비스토 Eero Koivisto, 올라 루네 Ola Rune라는 세 명의 건축가가 1995년 설립한 건축 사무소로 스톡홀름에 있는 소니뮤직 본사와 베를린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저 등을 건축했다. 스페라 빌딩은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의 모던한 디자인에 창을 절묘하게 배치해 자연광의 변화를 최대한 느낄 수 있다. 벚나무 이파리 모양의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강판이 빌딩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층은 인테리어 잡화를 판매하는 스페라 숍, 2층은 건축・디자인・아트 관련 서적과 CD가 놓여 있는 스페라 아카이브와 문화적 정보 발신지인 스페라 엑시비전, 3층은 스페라 바 사토나카, 지하 1층은 카페 세세라기 스페라로 이뤄져 있다. 4 현대화된 식문화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일본 전통 목기. 나무의 색과 결을 살린 자연미를 순수하게 표현했다.
1 강가 쪽으로 창을 크게 냈다. 햇살을 조명으로 이용하고 자연의 변화를 실내의 가구들과 어우러지게 매치한 센스와 감각이 돋보인다.
본질에 충실한 장인 정신, 스페라리즘
스페라 숍에 있는 아이템 하나하나는 일상생활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조화시킨 테이블웨어, 홈 액세서리 등 자연 그대로의 질감과 색을 살려 전통적인 수작업 기법으로 만든 제품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 돌, 도자 등 자연 소재를 활용한 것이 대부분으로 전통적인 기술에 현대적이고 참신한 디자인을 믹스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자연 소재가 주는 풍부한 느낌을 잘 살리면 별다른 기교 없이 가장 심플한 디자인으로도 멋스러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와모단이다. 지난밤 밀라노에서 막 돌아왔다는 마시로 씨는 숍으로 들어서자마자 물건의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몇 번 그의 손이 오가고, 위치를 바꾼 것뿐인데 똑같은 물건들이 달라 보였다. 스페라 숍에 있는 물건들의 디자인은 마시로 시게오 씨가 디자인하거나 프로듀스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디자인이나 아우트라인을 만드는 사람만 디자이너라고 칭한다. 따라서 일본에서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아트 디렉터로 불린다. 그는 교토의 숙련된 솜씨를 자랑하는 장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과 그 영감을 나누며 작업을 완성해간다. 장인들과의 작업뿐만 아니라 이와사키 이치로 같은 일본의 상품 디자이너, 그리고 해외 디자이너들과도 협업한다. 창문이 아름다운 스페라 숍의 창가 테이블에 앉아 오가닉 커피와 잘 어울린다며 꽃 모양의 모네 화과자를 권하는 그에게 물었다. 스페라리즘이란 무엇인가 ? 스페라가 추구하는 정신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산뜻하고 선명한 대화에 비유할 수 있다. 자연 세계의 질감과 소재를 아름다운 형태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특히 교토 풍경은 스페라의 세련된 제품을 디자인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한다. 스페라는 전통 예술과 모던 디자인을 하나로 연결해 과거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 공예품을 창조하고 있다. 스페라는 자연 그 자체이자 또 하나의 문화로, 스페라리즘이란 물건의 배경이되는 본질이나 문화를 전하는 것이다.
스페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하는가 ? 스페라의 컨설팅 팀은 클라이언트인 기업과 그 상품의 문화적 가치에 주목해 상품 개발의 새로운 플랫폼을 제안한다. 또 새로운 시장 개척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소규모로 작업하는 장인의 작품을 글로벌화시켜 상업과 문화를 하나로 연결하는 일을 맡고 있다. 우리의 비즈니스 프로젝트는 일본 시장에서 유럽 제품 소개, 유럽 시장에서 일본 제품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브랜드 매니지먼트부터 전략 수립, 상품 유통까지를 일관되게 지원하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나름의 미의식을 가지고 물건을 사용할 때 여유 있는 마음으로 즐기는 것, 그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스페라의 상품은 다소 얌전 한 듯 보이지만 일상생활의 공간에 놓이면 자연스럽게 융화되거나, 사용하면 할수록 점점 고급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장인이나 다른 디자이너와는 어떻게 작업하는가? 먼저 균형감, 비례감, 질감 등 세밀한 감각을 강조한다. 이 단어의 의미가 장인이나 작가에게 잘 전달되어 공유할 때 원하는 디자인이 완성된다. 이를 위해 먼저 상대방의 탁월한 기술을 존중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미의식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몇 번이고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접점을 찾아가는 작업은 정말 흥미롭다. 그들과의 작업은 단순히 ‘도구’가 아닌 ‘실용의 미’를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진행하고 있다.
2 숙련된 장인의 손으로 두드려 만든 금속 제품. 금속판을 망치로 정성스럽게 두드려 형태를 만들어가는
전통적 단금 기법은 두드릴수록 면적이 늘어나고 강해지는 금속의 특성을 살린 것.
1 스페라 퍼니처 디자이너 라인의 팔걸이 의자, 사지 SAJI.
2 스페라 숍에는 가구와 소품의 이미지를 꽃 장식으로 강조하는데,이는 대학 때부터 꽃꽂이를 배운 마시로 씨의 감각이다.
3 건축, 디자인, 아트 관련 서적과 CD가 놓인 스페라 아카이브.
전통과 모던,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용 디자인 앞서 말했듯 마시로 씨는 함께 작업하는 장인들과 깊은 신뢰와 교감을 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가 생각한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이러한 ‘시간의 공유’는 물건이 완성되기까지 하나의 척도가 된다. 함께 작업하는 장인 가운데 나카가와 씨는 일본 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통 만드는 기술을 이용해 나무 접시를 완성해냈다. 마시로 씨는 초밥을 도자기 접시보다 나무 접시에 담았을 때의 아름다움과 식감에 착안해 그에게 이를 주문한 것. 나카가와 씨에게 주문한 것 중 특이한 것은 나무로 만든 와인 쿨러. 뜨거운 것은 뜨겁게, 차가운 것은 차갑게 유지하는 나무의 성질을 응용한 아이템이었다. 교토의 대표적 도자기인 기요미즈 도자기로 만든 흰색 커피잔은 섬세한 손잡이 디자인을 자랑한다. 입술에 닿을 때의 촉감을 고려해 두께가 무척 얇은데, 후루카와 씨가 만든 이 잔의 두께가 커피의 진미를 제대로 살려준다고 강조한다. 5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데라치 씨는 강판을 망치로 정성스럽게 두드려 형태를 만들어가는 전통적 단금 기법으로 주전자와 컵, 젓가락 받침, 화과자 접시 등을 만들었다. 언뜻 보면 일본 제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던한 디자인의 소품이지만 일식 차림에 매치하면 더욱 돋보인다. 4 자연스럽고 편안한 형태를 라탄 소재로 표현한 콘트라스트의 어린이 의자.
1 외관을 둘러싼 메탈판의 나뭇잎 디자인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다.
2 스페라 빌딩 지하 1층에 있는 카페 세세라기 스페라. 스페라 숍의 그릇과 커피잔을 사용한다.
이 밖에도 그가 일본 각지의 장인들과 함께한 작업은 이시타 대나무 공예점의 섬세한 선을 살려 만든 죽 공예품, 나무 소재를 최대한 가볍게 표현한 미니 티스푼, 벚꽃 잎사귀가 모티프인 네 가지 색상의 면 소재 수건 데누구이 스페셜, 커피와 잘 어울리는 와삼봉 설탕으로 만든 일본 과자인 모네 화과자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마시로 씨의 디자인이 주목받는 이유는 장인의 기술력을 일상생활에 접목해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내공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전통 기술을 유러피언 감각과 연결해 완성시킨 작업들, 그 카테고리 안에 스웨덴의 건축가 그룹 CKR이 ‘북유럽의 눈’으로 일본 정신을 표현한 스페라 퍼니처 컬렉션이 있고, 미래도 과거도 아닌 언제나 ‘현재’를 표현하는 이와사키 이치로의 디자인 작품 콘트라스트 Contrast 컬렉션이 있다.마시로 씨가 이치로 씨와 함께 작업하게 된 것은 ID 디자이너로서 활약하던 이치로 씨에게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다 실생활에 가까운 물건 디자인을 제의한 것이 계기였다. 그 외에도 스페라 외관의 잎사귀 모양 무늬를 디자인한 스웨덴의 그래픽 디자이너 마르쿠스 모스트룀 Markus Mostr, 최근 코스모스페라 CosmoSfera라는 오리지널 CD 의 재킷을 디자인한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그룹 토니크 Thonik가 있다. 전통을 바탕으로 디자인하는 것, 세계의 현대 디자인과 견주어 함께 가는 것이 디자인의 미래이자 디자이너의 소명이라고 말하는 마시로 씨. 마지막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의 협업을 거친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문의 스페라 www.ricordi-sfera.com 3 이와사키 이치로의 콘트라스트 라인 중 하나인 아로마. 깔끔한 질감과 색이 일상생활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의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글을 쓴 리아코 Liako는 일본 문화 칼럼니스트로 일본 전문 콘텐츠 PR 회사인 ‘리아코 컴퍼니 Liako Company’ 대표이다. 현재 <리아코만 알려주는 일본>(liakomono.tistory.com)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