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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품은 12인의 제주찬가]알뜨르비행장에 세계평화공원 짓는 승효상 씨 슬픈 열대'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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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전적지였던 알뜨르비행장. 비행기를 숨겨두었던 격납고가 마치 무덤처럼 존재한다. 2 추사 김정희를 추모하는 기념관. 그가 유배 생활을 했던 대정읍 안성리에 지어졌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다면 참 답답했겠죠.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준 땅이니까요. 바다 건너에 있다는 정서도 그렇고, 내륙의 경관과는 사뭇 다른 이국적 풍경도 그렇고, 제주도가 지닌 자연의 다양성은 그 가치가 남달라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이 지닌 한 면만 주목하죠. 제주도 하면 으레 신혼여행이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본토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오는 곳, 제주도엔 육지 사람들의 열망과 스트레스만이 떠도는 것 같아요. 사실 ‘관광 觀光’이라는 말은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지역의 문물을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본다’는 뜻이죠. 그런 의미에서 눈이 즐거워지는 관광이 아니라, 정신이 풍요로워지는 관광의 개념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주는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섬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요.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예부터 정치적 패배자를 쫓아버리는 유배지로 주로 사용됐죠. 그로 인해 억압도 많이 받았어요. 그 역사 속에 서린 한 恨과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고요. 현재 진행 중인 제주 서남부 지역 ‘세계평화공원’ 조성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추모하기 위한 일이에요. 그 시작으로 5월 개관한 ‘추사관’을 들 수 있어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 밀려나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머문 ‘추사 적거지’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죠. 선생은 그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생을 마감했어요. 이 역사적인 장소 앞에 그의 뜻을 기리는 ‘추사관’을 지었어요. 대정읍성은 성벽 자체가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이를 훼손하지 않도록 박물관을 최대한 간결한 형태로 지었죠. 박물관 내부는 상당 부분 땅 밑에 자리하고, 집 형태만 지면 위로 솟아 있어요. 김정희 선생이 유배 기간 동안 당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으니까, 건축물에도 그 정신을 반영한 거죠. 선생은 또한 형태를 좇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대형무상 大形無相’의 정신을 으뜸으로 치셨죠.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 즉, 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아직 시작 단계에 있지만 대정지역 일대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예요. 이 지역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오름과 같은 능선이 수십 개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이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은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사용했어요. 성산일출봉, 송악산 등의 해안 절벽에 어뢰함을 감추기 위한 동굴을 파고, 섬 전체를 요새화했죠. 그 대표적인 군사 시설물이 알뜨르비행장이에요. 제주 방언으로 ‘아래’를 뜻하는 ‘알’과 ‘들’을 뜻하는 ‘뜨르’를 합쳐 알뜨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해안 마을을 ‘알뜨르’라고 불러요. 모슬포항을 바라다보며 펼쳐진 대정지역 일대도 알뜨르인 셈이죠.

알뜨르비행장에는 현재 20개의 격납고가 남아 있어요.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정확히는 ‘카미카제’라고 읽으며, ‘카미(신 神)’와 ‘카제(바람 風)’의 합성어로 ‘신풍특공대’라고도 부른다. 태평양 전쟁 후반기에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일본 공군들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미군의 전함에 박치기하는 자살특공대를 자처했다)가 비행기를 숨겨두던 창고죠. 높이 4m, 길이 10.5m, 폭 20m의 구조물로 제주의 오름을 본떠 만든 것 같아요. 전적지임을 숨기기 위한 방법이었던 거죠.
알뜨르비행장 옆으로 제주 4・3항쟁이 일어난 섯알오름이 있어요. 4・3 사건은 1948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이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양민을 구금하고 처형한 사건이에요. 당시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유족들은 눈물의 세월을 보냈죠. 그러다 1956년이 되어서야 유해 발굴이 허용돼 암매장한 굴속에서 유해를 꺼내 대충 뼈를 맞춰보니 132명의 시신이 나왔다더군요.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이 희생자들을 한 조상으로 모시겠다는 의미로 ‘백할아버지 한무덤’을 만들었대요. 대정 지역 일대는 가히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장이라 할 수 있죠.
이곳은 예로부터 바람이 심해 사람이 살기가 힘들고,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아 식량 공급이 어려웠어요. 게다가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문 평지라 일본 사람들이 비행장을 만든 거죠. 지금은 그때보다 지면이 1m 이상 높아져서 과거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어요. 이 흙을 다 파내면 당시 비행기가 이착륙하던 활주로가 나타날 거예요. 하늘에서 바라보면 군용 프로펠러기가 수없이 들고 나던 자국이 선연히 보이겠죠. 지금은 제주도 사람조차 알뜨르비행장을 잘 몰라요. 복원을 마치고 나면 이 지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과거에 비행장이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활주로 끝에 비행기를 설치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20개의 격납고는 그대로 보존하되 내부 공간은 새롭게 디자인할 생각이고요. 카페를 만들 수도 있고, 세계평화단체나 NGO가 컨벤션을 여는 회의 시설을 만들 수도 있죠. 인근에는 게스트하우스나 유스호스텔을 지어서 사람들이 머물다 갈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 선조들의 한과 아픔이 서린 땅 위에 그들을 추모하는 거대한 박물관을 짓는 거죠._사진 한홍일

제주의 지역성을 알고 ‘관광 觀光’하면 더 재밌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제주도를 보면 한라산을 중심으로 바다 쪽을 향해 마치 우산의 살처럼 맥이 그려져 있다. 화산섬인 제주는 모든 것이 한라산에서 시작돼 계곡과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끝에 바다가 있는 수직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목을 하던 시절에는 소들이 따뜻한 계절에는 한라산으로 올라가 풀을 뜯었고, 추운 계절이 되면 산 아래로 내려와 먹이를 찾곤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5.16 도로로 인해 이 수직적인 구조가 파괴됐다. 아스팔트 도로가 섬 전체를 단절시킨 셈. 이제 더 이상 소들은 자유롭게 초원을 오가며 풀을 뜯을 수 없게 됐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해안도로 역시 섬 전체를 원처럼 도려내어 만든 것이다.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좀 더 가까이에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됐지만 그 이면에 파괴된 자연과 생태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도로와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거친 아스팔트의 위협조차 무너뜨리지 못한 자연의 힘이다.

승효상‘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제주와 인연이 깊어 호텔, 박물관, 기념관에 이어 세계평화공원을 조성 중에 있다. 사실 그는 ‘제주경관관리위원회’ 위원장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이 ‘별동대’는 제주 훼손을 막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