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기마저 경건한 이영진 씨의 작업실은 그의 손때가 따스하게 밴 서예 도구와 법첩으로 가득 차 있다.
2 오래 써서 잘 길들여진 붓은 곁에 없어서는 안 될 ‘절친’이다.
3 말차의 초록빛을 좋아한다는 그는 서울에서 온 손님을 위해 손수 말차를 마련했다.
4 나무 밑동을 잘라 만든 앉은뱅이 의자 사이에 다반을 얹으니 훌륭한 ‘야외 다실’이 완성됐다.
5 그가 한평생 몰두해온 임서 작품. 임서란 법첩을 옆에 두고 이것을 보면서 쓰는 방법 또는 그렇게 쓴 글씨를 말한다.
6 비밀의 화원으로 연결되는 통로 같은 대문 입구.
7 금붕어가 꼬리를 살랑대며 노니는 작은 연못. 조형 감각이 남다른 이영진 씨는 정원 곳곳에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만들어두었다. 한평생 제주도를 떠난 적 없는 서예가 이영진 씨정주 定住하는 삶은 아름답다.
’책을 쓰기 위해 아이슬란드에 머물고 있는 친구에게서 메일이 왔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로 인해 결국 앞니가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열아홉 살 이후 1년 이상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를 옮겨 다니며 산 그 친구는 단 한번도 떠돌이 생활에 염증을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보낸 메일 한 통을 읽고 그 생활을 정리할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란다. 메일 내용은 이랬다. “떠나면 떠나는 대로, 머물러 살면 그런대로, 아름다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같아. 지난주에 제주도에 내려가 한평생 임서 臨書를 쓰며 살고 있는 서예가를 만났어. 제주에서 태어나 육십 평생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분이었지. 운전면허도 없고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는 완벽한 정주자 定住者로 살면서 그 많은 시간을 어디에다 쓰셨을까.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선생의 정원에서 말차 抹茶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그는 자신의 삶을 어설픈 신선놀음에 비유했지만 그건 굉장히 역설적인 말이었어.”
“여기 앉아서 차를 마시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어요. 20년 전에는 담장 너머로 한라산이 보였어요. 믿기지 않죠? 그때는 집이 다 나지막했으니까…. 마당에 앉아 사계절을 보는 맛이 대단했어요.” 제주시 일도2동의 옛 가옥. ‘사계절을 보는 맛이 대단했던 ’ 서예가 이영진 씨의 집은 밖에서 보면 평범한 주택이다. 하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시내 한가운데 위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대문에서 열 걸음 남짓 이어지는 좁다란 길은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연결되는 통로 같다. 양팔을 벌리면 양 손끝이 벽에 닿을 정도 너비의 길. 사람의 발길로 다져진 단단한 흙바닥 주위로 초록 덩굴이 무성하다. 그 끝에 나타난 소박하고 아담한 정원. 중정에 심은 누룩나무는 한 폭의 산수화요, 여름에만 귤이 열리는 하귤나무는 소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금붕어가 꼬리를 살랑대는 연못, 나무 밑동을 잘라 만든 앉은뱅이 의자와 다반 茶盤을 놓아둔 ‘야외 다실’, 턱 걸터앉아 해바라기하기에 딱 좋은 툇마루. 사람의 온기가 따스하게 스며든 그의 정원은 엄마 품 같았다.
탐스러운 하귤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그의 정원은 신선이 놀다 간 무릉도원 같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는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한라산이 바라다보였다고. ‘아,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에서 동양화, 서양화, 조각을 배웠고, “미술 하는 사람은 서예도 알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소암 素菴 현중화 玄中和(1907~1997년, 제주 출신의 서예가로 육조 해서를 익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 대작가다) 선생에게 사사한 이영진 씨는 서예의 매력에 빠져 한평생 붓글씨를 쓰며 살았다.
그가 결코 손에서 놓은 적 없는 ‘임서 臨書’는 법첩을 옆에 두고 이것을 보면서 쓰는 방법, 또는 그렇게 쓴 글씨를 뜻한다.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학습의 기본 과정으로, 그 원리를 익혀 창작의 바탕을 이루는 필수 과정이다. “임서를 쓰는 건 다양한 비문 碑文을 공부하는 거예요. 좋은 필법으로 쓴 법첩을 반복해 쓰면서 익히는 거죠. 단순히 서체를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획 한 획을 통해 그 사람의 정신까지 익히는 것이 임서의 본질이에요. 임서를 오래 쓰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 자유가 생기고 개성이 생기죠. 처음에는 법으로 시작하되 법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법이 없이도 마음껏 춤추며 놀게 되는 순간이 오고, 법 없이 노는 것 같다가도 그 속에 법이 있음을 깨닫는 거죠.” 그는 임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예로 고정비의 법첩을 들었다. 소암 현중화 선생은 서예를 처음 시작하는 제자에게 고정비의 해서체를 제일 먼저 쓰도록 했다. 스승은 “고정비의 글맛은 물맛과 비교되니, 그 물맛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를 연구하라”고 가르쳤다. 웅장하고 힘차고 화려한 글맛은 느끼기 쉽지만 무색, 무취, 무향의 물맛을 깨닫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끝까지 그 맛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자운 自運(글씨본을 보지 않고, 쓰는 사람의 마음대로 붓을 움직이는 일. 또는 그렇게 쓴 글씨)을 하다가도 스스로 도를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임서를 쓰지요. 임서는 저를예술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큰 스승이에요. 죽는 날까지 임서를 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는 단지 종이 위에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서예만큼이나 애정을 쏟고 있는 것이 전각 篆刻(나무, 돌, 금옥 따위에 인장을 새김, 또는 그런 글자)이다. 흔히 전각이라 하면 완성된 작품 위에 호를 새겨 찍는 도장쯤으로 알고 있지만 ‘전각의 세계’는 서예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전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지만 붉은 인주를 묻혀 종이 위에 찍어내는 순간 또 다른 세계를 완성해요. 전각을 새기는 방법은 참 다양하죠. 양각, 음각, 측각으로 새길 수 있고, 한 면에 한 글자 혹은 한 행을 새겨 넣을 수도 있어요. 한 편의 시를 수백 개의 전각에 한 글자씩 새겨 넣고 찍어내면 독특한 디자인의 회화 작품이 되고, 그 작품에 붓글씨로 해설을 달면 한 권의 시집이 되고, 산수화를 그려 넣으면 병풍도 되고 족자도 되는 종합 예술이에요.”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집 안 곳곳에 걸린 전각과 서예의 혼합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툇마루와 다실 사이에 달린 문에는 직접 그린 수묵화에 이백 李白 의 시 ‘산중문답 山中問答’이 걸려 있다. “問爾何事棲碧山 문이하사서벽산(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별천지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처해 있는 이곳이 바로 별천지다 그런 뜻이죠.” 인자한 음성으로 시 한 수 읊고 난 선생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두어 시간 만나 정을 나눈 기자와 사진가에게 오랜 세월 갈고닦은 솜씨로 쓴 임서를 건네주신다. “만이불일 滿而不溢, ‘가득 차되 넘치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갈하게 쓴 사자성어 위에 샛노란 금박 장식으로 멋을 더한 종이 한 장. 그러시고는 소박한 정원 풍경에 취해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는 사진가를 불러 나머지 한 장을 건네며, “한답부운 閑踏浮雲, 한가로이 뜬구름을 밟는다. 즉, 천상에서 노닌다, 그런 뜻이죠” 하며 껄껄 웃는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주워들은 풍월, 어설픈 신선놀음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낮추는 그를 보며 정주자 定住者의 삶이 왜 아름다운가를 깨닫는다. 사진 한홍일
해 질 무렵, 사라봉 산책로 걷기
제주 토박이지만 객지 사람보다 제주를 더 모른다며 못내 추천을 꺼리던 이영진 씨가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볼거리는 영주십경(제주의 아름다운 절경 열 가지)의 하나인 ‘사봉낙조’다. 제주시 사라봉에서 바다로 지는 일몰 광경이 무척 아름답다고 알려진 사라봉 산책로. 그곳에서 바라다본 황혼 녘 풍경은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어 불타오르는’ 장관을 이룬다. 해 질 무렵 아내와 손잡고 사라봉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경건해진다고. 사라봉은 제주시 동쪽 해안에 있는 높이 184 m의 분석구로 팔각정과 의병항쟁기념탑이 있고, 남쪽으로는 모충사, 동쪽으로는 별도봉이 바라다보인다.
이영진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며, 제주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40년 넘게 서예와 전각을 하며 1천 점이 넘는 작품을 완성했지만 전시를 한 적은 없다. 그의 절친인 사진가 배병우 씨가 그를 두고 ‘결코 드러내지 않는 예술가’라고 부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