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8남매 중 막내, 어머니는 8남매 중 일곱 번째 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옆으로 뻗어나간 16개 가지에서 주렁주렁 열린 사촌은 얼핏 생각해도 족히 스무 명은 넘는다. 그중 몇몇은 아주 어릴 적에 봤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고, 또 몇몇은 지난 설에 어색하게 마주 앉은 이후 간간이 부모님을 통해 소식을 듣는데 그마저도 최근 일은 알기 어렵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이렇게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친구보다 만나기 어려운 사이가 돼버린 친척,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닌 요즘 우리의 모습이리라. 그러던 중 눈에 번쩍 띄는 책이 나왔다. 25년 동안 만든 가족 신문을 묶은 책 <비둘기집>이었다. ‘영란 누나 결혼, 작은 외할아버지 정년 퇴임, 6촌 영택 형 득남, 고종 당숙모님 생신, 종우 형 아들 원서 돌잔치’ 등 이제 30대 중·후반이 된 조영헌·조영한 형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발행해온 신문에는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벅찬, 이들 친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가족 신문으로 연결되는 친척이라는 가족 <비둘기집>은 총 4쪽으로 발행된다. 결혼, 새 생명의 탄생, 명절의 친지 모임 같은 가족의 대소사는 첫 번째 지면에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린다. 이어지는 2~3쪽에는 관련 기사나 친척들이 보내온 원고로 채워진다. 마지막 쪽은 가족의 이런저런 소소한 소식 대여섯 가지를 전하며 마무리된다. 아버지 조의현 씨의 지도 아래 신문을 만들기 시작한 영헌·영한 씨가 가족 신문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점은 친척들의 정확한 정보라고 한다.“친척이라도 조카 나이나 사촌 형수 이름, 이런 건 정확하게 알기 어렵잖아요. 대충 ‘몇 살쯤 됐겠지’ ‘누구 아내’ 정도로 기억하죠. 그렇지만 행사나 기념일에 관한 기사를 쓰려면 이름, 나이도 다시 묻게 되고 정확하게 글로 적어 서로 공유하니 의미 있죠. 차곡차곡 쌓인 가족사진은 신문을 만들면서 얻게 된 덤입니다.”
‘친척 집 탐방’과 같은 주제를 정하고 가족이 돌아가며 주인공이 되는 것 역시 가족 신문의 묘미이다. 세 분의 큰아버지 댁을 비롯해 외갓집, 고모 댁, 이모 댁까지 가족 이야기를 담은 ‘가족 순례기’라는 특집 기사가 대표적인 예. 각 친척을 주인공으로 삼고 이들 가정의 특색을 정리한 기사였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화로 질문하면서 기사를 작성했다고 한다.
“첫째 큰아버지의 경우 4대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경로효친’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 후 아버지에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큰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큰아버지와 직접 통화를 하며 기사를 썼죠. 당시 친척들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되기도 하고, 또 신문을 읽으면서 그 친척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요. 저희가 어렸을 때 아버지 대 代를 돌면서 연재했는데 이제 저희 세대인 ‘영’자 돌림 사촌들의 집을 순례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가 자라서 각자 가정을 꾸렸으니,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대체로 두 형제가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지만, 다른 친척들의 관심이 전혀 없었다면 백과사전만큼 두툼한 책 두 권으로 묶여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친척끼리 가족 통신원을 정해 각 가정의 소식을 전하고 형제의 부탁을 받으면 신문에 실을 글을 써 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족 설문 조사가 있으면 적극 참여하고,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띄우는 것도 지면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다양한 가족의 애경사를 담은 <비둘기집>은 70부를 복사해 친척, 가까운 친구, 이웃에게 보내고 50부는 PDF 파일로 외국에 사는 친척과 구독을 원하는 독자에게 전달한다. <비둘기집>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는 60~70대 아버지 세대. 특히 이들의 첫째 큰아버지가 많은 관심을 가져서 만나면 ‘<비둘기집> 잘 봤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사진이 잘 나왔더라, 글이 재밌었다, 학위 받은 걸 축하한다’ 등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단다. <비둘기집>을 주제로 친척 간에 대화가 풍성해지고 오가는 말 속에 전해지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
<비둘기집>에서 찾은 친척 간에 정 쌓는 비법 친척 간에 정을 쌓으려면 자주 만나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하지만 <비둘기집>을 읽으면 요즘같이 서로 바빠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시대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통신원의 뉴스, 친척 순례기 외에도 <비둘기집>에서는 친척 간에 돈독한 정을 쌓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특집으로 가계도를 그려본 적이 있어요. 가계도를 그린 후 이름, 전화번호, 주소, 우편번호까지 적어 넣고 복사를 해서 다음 친척 모임에서 나눠줬지요. 세월이 흘러 이메일을 많이 쓰기 시작할 때는 사촌들의 이메일 주소를 실은 적도 있어요. 가장 큰 사촌 형은 나이가 저희 아버지와 동갑이라 사촌들 사이에서는 어렵고 조금 어색한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메일 주소가 나간 후 형이 사촌들에게 설날 안부 인사 메일을 보낸 거예요. 형이 메일로 우리와 소통하는 게 신기했고 ‘형이 나이가 많지만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더욱 친밀해진 계기가 되었죠.”
영헌·영한 형제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들이 모두 참여한 설문 조사도 빼놓을 수 없다. 1993년 <비둘기집>에는 집안의 어르신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애도하는 친척들의 글이 넘쳤다. 그리고 5년 후 그때의 자료를 바탕으로 영헌·영한 씨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해보자고 형제와 친지들에게 제안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할아버지가 강조하던 가정 생활 덕목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 등 형제는 자손들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문지를 만들어 여러 친척에게 돌렸다. 더불어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사항과 어른들에게 바라는 사항도 조사했다. 할아버지를 기리며 동시에 친척 간의 화합을 다지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셋째 큰아버지가 그 자료를 재구성하여 <우리 할아버지>라는 책까지 만들었다.
그 외에도 대학에 입학한 조카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담긴 <비둘기집>은 여전히 조영헌·조영한 씨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조영한 씨는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어 이메일을 통해 기획 회의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는 8년째 외국 생활을 하며 이제는 편집자라기보다 독자로서의 느낌이 더 커졌고, 가족 신문의 중요성을 몸소 느끼고 있다. 친척들의 소식을 정리하면서 그가 참여하지 못한 집안 행사를 알게 되고 사진으로나마 함께하면서 먼 곳에서 친척들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둘기집 편집자 영헌・영한 씨.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때 시작한 가족신문이 26살이 된만큼 이들도 어느새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다음 세대도 자기 근본을 알았으면 1984년부터 한 번도 중단한 적 없는 <비둘기집>. 심지어 이들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일 때도 신문은 나왔다.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쉽지 않았을 터. 10년째 되던 해 아버지에게 그만두자고 작은 반항도 해봤단다. 하지만 아버지 조의현 씨는 격월간으로 바꿔서라도 계속 이어가자고 형제를 설득해 지금은 두 달에 한 번 나온다. 이렇게 해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오래된 가족 신문 주인공으로 텔레비전에도 몇 번 출연했다. 방송이 나가면 TV 프로그램을 본 먼 친척,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는 경우도 꽤 있단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닿고 신문을 보내면서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형제가 어렸을 적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때에는 온 친척이 다 모이는 일이 잦았지만 요즘은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자기 가족만 만나는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한다. “길 가다가 친척을 만나도 몰라볼 시대가 곧 올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친척들의 글을 싣고 사진을 담은 신문을 공유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는 그들. 6학년 때 <비둘기집>을 만들기 시작해 이제 초등학생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된 조영헌 씨는 가족 신문을 통해 자신이 배운 점을 아이들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아이가 우리 네 명만이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내려왔고, 같은 피가 흐르는 친척들이 있으며, ‘내’가 그 가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되기를, 신문을 만들며 배우길 기대합니다.”
가족 신문으로 연결되는 친척이라는 가족 <비둘기집>은 총 4쪽으로 발행된다. 결혼, 새 생명의 탄생, 명절의 친지 모임 같은 가족의 대소사는 첫 번째 지면에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린다. 이어지는 2~3쪽에는 관련 기사나 친척들이 보내온 원고로 채워진다. 마지막 쪽은 가족의 이런저런 소소한 소식 대여섯 가지를 전하며 마무리된다. 아버지 조의현 씨의 지도 아래 신문을 만들기 시작한 영헌·영한 씨가 가족 신문을 만들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점은 친척들의 정확한 정보라고 한다.“친척이라도 조카 나이나 사촌 형수 이름, 이런 건 정확하게 알기 어렵잖아요. 대충 ‘몇 살쯤 됐겠지’ ‘누구 아내’ 정도로 기억하죠. 그렇지만 행사나 기념일에 관한 기사를 쓰려면 이름, 나이도 다시 묻게 되고 정확하게 글로 적어 서로 공유하니 의미 있죠. 차곡차곡 쌓인 가족사진은 신문을 만들면서 얻게 된 덤입니다.”
‘친척 집 탐방’과 같은 주제를 정하고 가족이 돌아가며 주인공이 되는 것 역시 가족 신문의 묘미이다. 세 분의 큰아버지 댁을 비롯해 외갓집, 고모 댁, 이모 댁까지 가족 이야기를 담은 ‘가족 순례기’라는 특집 기사가 대표적인 예. 각 친척을 주인공으로 삼고 이들 가정의 특색을 정리한 기사였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화로 질문하면서 기사를 작성했다고 한다.
“첫째 큰아버지의 경우 4대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경로효친’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 후 아버지에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큰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큰아버지와 직접 통화를 하며 기사를 썼죠. 당시 친척들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되기도 하고, 또 신문을 읽으면서 그 친척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요. 저희가 어렸을 때 아버지 대 代를 돌면서 연재했는데 이제 저희 세대인 ‘영’자 돌림 사촌들의 집을 순례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가 자라서 각자 가정을 꾸렸으니,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대체로 두 형제가 주제를 정하고 글을 쓰지만, 다른 친척들의 관심이 전혀 없었다면 백과사전만큼 두툼한 책 두 권으로 묶여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친척끼리 가족 통신원을 정해 각 가정의 소식을 전하고 형제의 부탁을 받으면 신문에 실을 글을 써 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족 설문 조사가 있으면 적극 참여하고,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띄우는 것도 지면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다양한 가족의 애경사를 담은 <비둘기집>은 70부를 복사해 친척, 가까운 친구, 이웃에게 보내고 50부는 PDF 파일로 외국에 사는 친척과 구독을 원하는 독자에게 전달한다. <비둘기집>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는 60~70대 아버지 세대. 특히 이들의 첫째 큰아버지가 많은 관심을 가져서 만나면 ‘<비둘기집> 잘 봤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사진이 잘 나왔더라, 글이 재밌었다, 학위 받은 걸 축하한다’ 등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단다. <비둘기집>을 주제로 친척 간에 대화가 풍성해지고 오가는 말 속에 전해지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
<비둘기집>에서 찾은 친척 간에 정 쌓는 비법 친척 간에 정을 쌓으려면 자주 만나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하지만 <비둘기집>을 읽으면 요즘같이 서로 바빠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시대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통신원의 뉴스, 친척 순례기 외에도 <비둘기집>에서는 친척 간에 돈독한 정을 쌓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특집으로 가계도를 그려본 적이 있어요. 가계도를 그린 후 이름, 전화번호, 주소, 우편번호까지 적어 넣고 복사를 해서 다음 친척 모임에서 나눠줬지요. 세월이 흘러 이메일을 많이 쓰기 시작할 때는 사촌들의 이메일 주소를 실은 적도 있어요. 가장 큰 사촌 형은 나이가 저희 아버지와 동갑이라 사촌들 사이에서는 어렵고 조금 어색한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메일 주소가 나간 후 형이 사촌들에게 설날 안부 인사 메일을 보낸 거예요. 형이 메일로 우리와 소통하는 게 신기했고 ‘형이 나이가 많지만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더욱 친밀해진 계기가 되었죠.”
영헌·영한 형제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들이 모두 참여한 설문 조사도 빼놓을 수 없다. 1993년 <비둘기집>에는 집안의 어르신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애도하는 친척들의 글이 넘쳤다. 그리고 5년 후 그때의 자료를 바탕으로 영헌·영한 씨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해보자고 형제와 친지들에게 제안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할아버지가 강조하던 가정 생활 덕목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 등 형제는 자손들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문지를 만들어 여러 친척에게 돌렸다. 더불어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사항과 어른들에게 바라는 사항도 조사했다. 할아버지를 기리며 동시에 친척 간의 화합을 다지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셋째 큰아버지가 그 자료를 재구성하여 <우리 할아버지>라는 책까지 만들었다.
그 외에도 대학에 입학한 조카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담긴 <비둘기집>은 여전히 조영헌·조영한 씨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조영한 씨는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어 이메일을 통해 기획 회의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는 8년째 외국 생활을 하며 이제는 편집자라기보다 독자로서의 느낌이 더 커졌고, 가족 신문의 중요성을 몸소 느끼고 있다. 친척들의 소식을 정리하면서 그가 참여하지 못한 집안 행사를 알게 되고 사진으로나마 함께하면서 먼 곳에서 친척들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둘기집 편집자 영헌・영한 씨.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때 시작한 가족신문이 26살이 된만큼 이들도 어느새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다음 세대도 자기 근본을 알았으면 1984년부터 한 번도 중단한 적 없는 <비둘기집>. 심지어 이들이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일 때도 신문은 나왔다.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쉽지 않았을 터. 10년째 되던 해 아버지에게 그만두자고 작은 반항도 해봤단다. 하지만 아버지 조의현 씨는 격월간으로 바꿔서라도 계속 이어가자고 형제를 설득해 지금은 두 달에 한 번 나온다. 이렇게 해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오래된 가족 신문 주인공으로 텔레비전에도 몇 번 출연했다. 방송이 나가면 TV 프로그램을 본 먼 친척,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는 경우도 꽤 있단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닿고 신문을 보내면서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형제가 어렸을 적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때에는 온 친척이 다 모이는 일이 잦았지만 요즘은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자기 가족만 만나는 사회 분위기가 반영되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한다. “길 가다가 친척을 만나도 몰라볼 시대가 곧 올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친척들의 글을 싣고 사진을 담은 신문을 공유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는 그들. 6학년 때 <비둘기집>을 만들기 시작해 이제 초등학생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된 조영헌 씨는 가족 신문을 통해 자신이 배운 점을 아이들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아이가 우리 네 명만이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내려왔고, 같은 피가 흐르는 친척들이 있으며, ‘내’가 그 가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되기를, 신문을 만들며 배우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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