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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 가늘고 보드라운 계집애 냄새를 풍기는 이름. 그리고 배우 김현주, 세상 끝에서도 깨진 무릎 후후 불며 ‘괜찮아, 난 꿈이 있어’를 외칠 듯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배우. 모진 풍파를 다 겪고도 꿋꿋하게 일어서서 미래를 개척하는 그(<유리구두>), 오뚝이 같은 성격의 억척 처녀(<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두말 할 필요 없는 서희(<토지>), 상처를 간직한 주인공(<인순이는 예쁘다>), F4의 누나이자 정신적 지주(<꽃보다 남자>), 그리고 최근 종영한 드라마에서 보여준 억척 아줌마 변호사(<파트너>)….그는 줄곧 강인한 생명력의 주인공을 연기했고 지금껏 별다른 연기 논란이 없었던, ‘연기 좀 하는’ 배우다. <인순이는 예쁘다>를 연출한 표민수 PD는 “김현주가 아니었더라면 인순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극찬했었다. ‘감성의 들숨과 날숨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연기’라는 평론가의 찬사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눈밑 그늘. 그의 연기를 볼 때마다 ‘저 눈밑 그늘만으로도 이 여자는 연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양조위가 담배 연기만으로 절망을 연기하듯, 고현정이 귀고리와 눈썹만으로 욕망을 연기하듯. 앳된 표정과 세상 다 알아버린 듯한 표정이 공존하는 연기를 그 눈밑 그늘이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일화들. 산으로 둘러싸인 촌에서 자라났고, 돈 벌고 싶어 하는 열여덟 살 소녀로 소녀 잡지 모델로 데뷔해 CF ‘국물이 끝내줘요’ 등등을 히트시키며 승승장구, 열아홉에 서울에 자기 이름의 집을 사고 가족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는 그 일화들…. 왠지 그에겐 세상을 미리 보아버린 듯한 조숙한 청춘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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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받거나 생각이 생각을 낳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을 때 언제부턴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재봉틀을 돌리고 바느질땀을 뀄어요. 재봉틀 페달을 자동차 액셀이라 생각하고 신나게 밟으면 스트레스가 절로 풀리는 것 같았죠. 고민의 가지 끝에 맺힌 것은 또 다른 고민일 뿐이라는 걸 바느질하면서 깨닫게 됐죠. 바느질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 수선스러운 이야기들을 저만치에서 쳐다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기던걸요.” 모든 청춘이 그렇듯, 수류탄 핀처럼 불안해하던 날들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펄펄 끓는 연애의 열에도 내맡겨져 봤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주변이 자신을 꽉 붙잡고 있다는 생각에(그는 꽤 속 깊은 맏딸이다) 어느 날 홀연히 자리를 박차고 바람 부는 거리로 나서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는 바느질과 뜨개질을 했다. 그가 만든 파우치 하나, 가방 하나, 쿠션 하나는 그 청춘의 고민이 남긴 전리품이리라.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매웠던 그는 책을 탐독하고, 수예점을 찾아다니며 귀동냥, 눈동냥으로 바느질과 뜨개질을 배웠다. 2년 반 동안 꽃꽂이 강의를 듣고 자격증 시험에도 덜컥 합격하고, <인순이는 예쁘다>를 끝낸 후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엔 플로리스트 수업도 들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는 청담동에 작은 작업실도 하나 만들었다(그는 작업실이란 거창한 문패 대신 ‘놀이방’ ‘놀이터’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 이걸 좀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일본 유학까지 꿈꿨다. 여기까지 듣고 나자 왠지 ‘여자의 성숙’ ‘온기’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여성스럽다고요? 원래 전 말투가 건조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깍쟁이 같은 구석도 있어요. 남자처럼 통도 크고 시원시원한 편이어서 그런지 바느질을 하면 크게 크게 만들고, 꽃꽂이 밑작업하려고 크로키를 할 때도 스케치북 밖으로 그림이 달아나요. 선생님들이 매번 ‘현주 씨! 뭘 담으려고 그렇게 크게 만들었어?’ 하는걸요.” 그 순간 그는 가시를 다 따버리고 배시시 웃는 이웃집 여동생 같다.
(위) 티워머는 그가 직접 바느질해 만든 것이다. 양쪽 구멍에 엄지와 검지를 끼우면 집게처럼 안정적으로 뜨거운 티포트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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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데뷔 이후 3~4년이 지나고부터 바느질에 빠진 김현주 씨. 이제는 취미를 넘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니트 카디건은 미쏘니 제품, 나머지 의상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티워머를 제외한 리빙 소품은 안선미 씨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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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각 필통.
2 숟가락 모양으로 아플리케 처리한 식탁 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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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전 하나도 귀하게 여기고 싶어 만든 동전 지갑과 명함 지갑 등.
4 신문 패턴의 패브릭으로 만든 뉴스페이퍼 가방.
이 여자의 성숙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자꾸 궁금해졌다. “글을 쓰고 싶어요. 나중에 나이 들어 단편소설집이나 수필집 하나 써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고.” 지금처럼 빼곡히 잘 채워나간다면 마음 안에 투명한 말들이 고요하고 격렬히 쌓일 것이고, 그것이 글이 될 것이다. “또 원예 치료도 배우고 싶고, 가구도 만들고 싶어요.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꼭 하게 되던걸요.”
그가 숲 속에 떠도는 향기처럼 바느질감과 재봉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다른 초신성들이 그의 자리를 다퉜을지라도, 그가 누린 시간은 참 귀한 것이었다.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 같을지라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걸 그는 이제 알아버린 것이다. 바로, 사는 것의 ‘속 깊은 즐거움’을 알아보는 눈이 여자 김현주에게 생겼다. 그 덕에 난 참 오랜만에 ‘속 깊은 여자, 속 깊은 여배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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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커플 워머. 여자용은 아이보리색, 남자용은 회색이다.
6 천을 덧대 리메이크한 슬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