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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극장]'꿈' 실은 관광버스 주인장 박원섭 씨 공룡버스, 오라이~
박원섭 씨는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관광버스에 탑승해 전국을 유람하는 가이드이자 여행사 대표입니다. 그런데 ‘집’과도 다름없는 이 관광버스를 온통 공룡 그림으로 도색했습니다. 대기업이나 군청의 홍보 차량도 아닌 작은 여행사의 단 하나뿐인 버스에, 쥐라기 공원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한 공룡을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남 토박이인 그를 따라 공룡버스에 올라봤습니다.



“뭐할라고 취재를 한다요, 잘한 것도 없구만. 긍께로, 공룡버스는 내 장사에 쓰자고 만든 관광버스랑께요.”
취재를 의뢰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공룡버스 주인장 박원식(한강여행사 대표) 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득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해남 공룡 화석지를 널리 알리고자’라는 그럴듯한 대답이 아닌, ‘순전히 상업적인 용도다’라는 날것의 속내를 첫마디에 뱉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겁니다. 심심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를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선선한 바람이 불던 저녁, 선선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근디 저는 ‘사진발’이 없응께, 알아서들 해보시요!”
서울에서 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 해남읍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두둥게둥실 뜬 초승달 같은 눈매로 쑥스럽게 웃으며 박원식 씨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 뒤에 거대한 공룡버스가 서 있었습니다. ‘둘리’ 엄마인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사나운 육식 공룡의 대명사 티라노사우루스가 눈에 띕니다. 조악한 스티커로 꾸민 버스가 아닌, 쥐라기의 풍경화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놓은’ 버스입니다. 서울에서도 구경 못한, 참신한 디자인의 발견이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들었을까요? 버스값 1억 6천만 원에 도색 비용만 3천만 원, 여기에 각종 설비를 더해 총 2억 2천만 원이 들었답니다. “도색 비용 3천만 원이면 5~6년 된 중고 버스 한 대 살 수 있는 돈이요. 그란디 제가 그 돈으로 버스에 공룡을 그려붕께 다들 미쳤다고 허대요.” 재력이 있다면 버스 여러 대 중 하나쯤엔 이색적인 디자인을 할 법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한강여행사는 버스 단 한 대에 사장과 기사가 전부인 ‘쩨깐한’ 관광 회사랍니다. 주변 이들의 반응이 이해된 순간입니다.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낭만 박원식 씨는 대체 왜 공룡버스를 만든 것일까요? ‘그저 사업상의 이유’였다지만, 호랑이나 사자도 아닌 공룡을 그린 이유랄지, 각별한 사정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맨땅에서 관광업을 시작해 차곡차곡 돈 모아 첫 버스를 산 게 20년쯤 전이요. 낡아서 다 보내버리고 이번이 세 번째 버스였지라. 마지막 버스일 테니 정말로 멋지게 맹글어보자 한 거요. 내가 살면서 뭔가를 저질러본 적이 없는디, 이번만 딱 저질러부렀소.” 아주 특이하고 기가 막힌 버스를 만들 생각을 하고 보니 단번에 공룡이 떠올랐답니다. 공룡은 해남의 대표 브랜드이지만 홍보가 안 되어 아는 이가 드물기에, 전국을 도는 그의 버스에 대형 광고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에게는 공룡의 ㄱ 자도 안 꺼냈습니다. 새 차가 반드르르한 공룡 옷을 입고 등장하자 아내는 “억!”하며 뒷목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공룡버스를 기사화한 <해남신문>에서 ‘억 더하기 억’하는 제작 비용을 보고는 아무 말 안 하더니, 기사를 오려 아들 책상 위에 놓더랍니다. “어찌 미리부터 말하겄어요. 싸움밖에 더 나겄소” 하는 박원식 씨의 변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한창 하고픈 것 많은 대학생 딸은 “나 용돈이나 좀 주지, 뭣하러 차를 그라코롬 바꾸고 힘들게 사는갑요?” 하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때도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습니다. 공룡버스가 관광지 주차장에 들어서면 다른 버스 기사들이 “저만치로 떨어져서 주차하시요!” 하며 불쾌해 했습니다. “관광버스가 고만고만하잖소. 근디 손님들 심리가 같은 값이면 좀 특이한 차를 타고 싶으니께. 다른 기사들이 ‘나도 먹고살아야 허지 않냐’며 경계하지요.” 오해도 많았습니다. 해남군청의 보조를 받은 게 아닌가 하고요. 물론 아닙니다. 신문에 보도가 나온 다음에야 군청 공보과에서 그에게 연락을 해왔고, 1년에 30만 원 보조해주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사양했답니다.
그러나 공룡버스를 본 손님들의 열렬한 환호에 근심이 사라집니다. “워데라도 차 세우면 애들이 쪼로록 다 붙어가지고 사진 찍느라 난리지라. 나이 든 분들헌티도 좋지. 근디 그거 아시는가? 나이 든 분들은 휴게소에서 타고 온 버스를 잘 못 찾으시는 거라.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천지인 디다, 글자 모르고 눈 어두워 번호판 못 읽는 분들이 많으싱께. 근디 내 차 타시면 멀리서도 ‘공룡차!’하고 알아볼 수 있어 좋제요. 그라고 손님들 태워서 서울 가면 다들 쳐다보니까, ‘아따 서울 촌놈들도 우리 차 보느라 정신이 없어부러야’ 하며 손님들이 웃어요.”

(위) 공룡 모형 앞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박원식 씨는 말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이로운 것이지라. 이왕이면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만들어야제. 아이들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고.”

 
1 자식처럼 귀한 공룡버스를 목욕시키는 박원식 씨와 버스 기사 이승기 씨.

오지랖 넓은 해남 토박이의 고향 사랑 우항리 공룡 화석지로 향했습니다. 공룡 타고 공룡 보러 가는 길, 무척 신이 났습니다. 딱 수학여행 가는 기분인데, 박원식 씨가 뜬금없이 묻습니다. “공룡 중에 ‘해남이크누스 우항리엔시스’라고 아시요?” 하도 희한한 이름이라,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익룡 이름(학명)이랍디다. 해남 땅속에서 익룡 발자국이 발견되어서 이름을 그리 지었다는구만요. 이놈이 전 세계에서 발이 가장 큰 익룡이라는구만요.”
그러니까 8천만 년 전에 앞발이 33cm, 뒷발이 35cm나 되는 거대한 익룡이 이곳을 훠이 훠이 날아다녔다는 겁니다!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해남 땅에서는 초식 공룡이 나무줄기를 씹고, 익룡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덮고, 때때로 육식 공룡이 이 평화를 깨뜨리곤 했겠지요. ‘땅끝 마을’로 기억되던 고장 해남이 일순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공룡 발자국(발바닥의 별무늬가 선명합니다)이며, 몇천만 년의 시간이 즙이 되어 배어 나올 듯 켜켜이 쌓인 지층을 둘러보았습니다. ‘원시’란 말은 아프리카 초원에서나 실감할 줄 알았는데, 예기치 않게 해남에서 원시의 자연을 저릿하게 느껴보았습니다.공룡 발자국도 없는 경남 고성의 공룡 엑스포는 중국 청도 관광지에 입간판을 달아 홍보하는데, 정작 해남은 홍보가 소극적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이 ‘공공을 위한 낭만주의자’의 심정도 이해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공룡이 나오는 유명한 영화 <쥐라기 공원>도 본 적 없고, 그의 버스에 그려진 ‘둘리 엄마’의 진짜 이름도 잘 모릅니다. “적어뒀는디 잊어부렀어요. 일전에 라디오에서 인터뷰한다고 해싸서, 아따 전날 종일 공룡 이름 왼다고 욕봤어요. 저놈 생기고 나니까 아주 머리가 아프당께요!” 또다시 초승달 같은 눈으로 웃습니다. 어렵던 시절, 공룡이 뭔지도 모르고 자란 그입니다. 그저 고향을 사랑하고, 해남 사람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룡 알리기에 발 벗고 나선 겁니다.
수더분한 아저씨 인상이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풍부한 그의 어릴 적 꿈이 궁금해졌습니다. “건축 설계사가 꿈이었지라. 집 하나 멋지게 지어서 살고 싶었제. 조선대학교 건축학과에도 합격했는디, 어머니가 합격 통지서를 일부러 안 보여주셨어요. 그라서 2년 재수했는디, 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관두고 엉뚱한 길로 흘러와부렀제.” 시골 소년들의 꿈이 죄 대통령, 과학자이던 시절, 그는 생각이 앞선 아이였습니다. 우연히 선배의 관광 회사에 합류했다가 관광업에 들어섰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사라져서 더욱 슬픈 짐승인 공룡이 겹쳐졌습니다. 백악기 공룡 시대를 우리가 신비롭고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이유는 공룡이 발자국만 깊이 새기고 멸종했기 때문일 겁니다. 박원식 씨의 젊을 적 꿈 역시 기억의 지층에 퇴적되어 어딘가에 발자취를 남겼을 겁니다. 그의 얼굴에 연거푸 우리 아버지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꿈을 이루고자 농사꾼 아버지 곁을 떠나 서울 양송이 공장에서 막일하며 공부하다가, 결국 무난한 공무원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저를 낳았다는 제 아버지가요. 세파에 둥글둥글하게 깎인 우리 아버지의 마음속엔, 세월도 깎아내지 못한 꿈의 발자국이 남아 있겠지요.


2 해남 우항리 공룡 박물관에 보존된 대형 초식 공룡의 발자국. 아이들이 숨죽이고 관찰하는 곳이다.

공공의 낭만으로, 오라이~! 20년 전만 해도 버스 한 대 가진 관광사 사장은 앉아만 있어도 예약이 넘치던, 대박 직업이었답니다. 그런데 이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관광 회사는 많아졌지,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니 운수업을 넘어선 ‘관광 서비스업’으로 명민하게 전환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박원식 씨의 경쟁력은 자분자분하게 일하고 돈을 모은 근면성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출발하는 손님들을 위해 그는 새벽부터 (옵션에도 포함되지 않은) 뜨끈뜨끈한 쇠머릿고기나 들깨죽을 준비했고, 일 없는 날엔 막걸리 두어 병 들고 단골 손님들 논밭에 찾아가 사는 이야기 주고받던, ‘진국 서비스’가 그것입니다. “인터넷으로 가격 비교해서 ‘정동진 1박 2일’ 여행 상품을 구입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한 버스에 타는 도시 사람들과 다르제. 이곳은 부녀회, 반상회 단위로 놀러 가니께. 뜨끈뜨끈한 인심 없으면 안 되제.” 1년에 오직 3일, 농한기를 노려서 가는 봄소풍을 위해 여름, 가을철 땀나게 일하는 촌 아낙들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국 서비스가 절로 우러나온답니다. 두 자녀가 한창 클 때도 밤낮 전국을 뛰느라 바빠서 잠깐 머리 쓰다듬어주고 곧장 짐을 꾸려 다시 나갔습니다. 등 뒤로 “아빠 또 가?” 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리도 밟혔더랍니다. 그래서인지 공룡버스에 탄 학생들은 다 아들딸 같습니다. 그가 돈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공짜로 태워주고 (담임선생 외에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조건으로) 식사 및 제반 비용을 해결해주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산전수전 다 겪은, 그저 뻔한 인생”이라며, 그의 목울대가 떨렸습니다. “오장육부는 냉장고에 넣어놓고 다니는 서비스업 인생”이라며, 그는 허허롭게 웃었습니다. “파닥파닥대며 돈 벌어 남겨줘도 자식들이 존경할 리 없으니 우짜든둥 즐겁게 살아야 한다”며, 이 우직하고도 낭만적인 사내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버스 한 대가 더 생긴다면, 무슨 그림으로 장식하고 싶으냐고요. “거북선을 그리고 싶어라.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대파한 명량대첩을 한 게 해남 우수영 아닙니까. 매년 10월엔 명량대전도 열리지라. 버스 뒤에 이순신 장군 그려불면 겁나게 멋질 틴디.”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