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하루 8백 통이 넘게 전하는 소식들이 모두 복되고 살가운 소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집배원 함성주 씨. 한때는 대한민국 9천여 집배원 중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집배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푸른 들 위로 구름이 가고, 골 너머 뻐꾸기 우는데, 그 풍경 안으로 사람 하나가 불쑥 끼어든다. 착하게 자른 ‘학삐리’의 머리카락, 배가 불룩한 집배원 가방이 그의 잰걸음 때문에 연신 흔들린다. 망초꽃 사이를 휘적휘적 걷는 그 모습을 보자니, 금세 마음이 풀어헤쳐진다. “가을이 깊네요. 매번 겪는 가을인데, 매년 이렇게 허허로워요. 평화로우시기를….” 열흘 전 ‘당신이 지구의 희망입니다_생태 관찰가 함성주’라는 서명과 함께 그가 보내온 이메일이었다. “운전 조심히 하셔서 내려오시고요. 서둘러서 좋은 것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더라고요. 시골 사람이라서 늦는 것에는 굉장히 관대하답니다. 평화로우시기를….” 그를 만나기 전날 또다시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도타운 마음으로 그는 내게 왔다.
2004년 그가 펴낸 책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를 이 가을이 돼서야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헛헛함이 밴 그 이야기가 내 가슴을 따갑게 문질러댔다. 그의 강물 같은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고 싶어 그를 찾아 나섰다. 되뇌면 입안 가득 바다 짠내가 고이는 이름, 영광의 홍농에 그가 살고 있다. 하루 65km의 거리를 탈탈거리며 사는 홍농우체국의 체부(우편집배원), 쉽고 단정한 글을 묶어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를 펴낸 저자, ‘생태 관찰가’라는 낯선 명찰을 단 활동가, 그리고 ‘동네 엄니’들이 막둥이 아들처럼 등 쓸어주시는 ‘지수 애비’.
그는 뭍에서 여객선이 하루 한 번 들어오는 신안의 작은 섬, 재원도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 목포로
유학 가면서 섬을 떠났다. 뭍에 사는 동안 그는 가출한 열일곱 살짜리 프레스공으로, 형광등 공장 노동자로, 웨이터로, 대학 졸업 후 이름도 쟁쟁한 L사의 ‘스카이칼라’(화이트칼라도 블루칼라도 아닌, 그 일에 종사하는 직업인을 그는 스카이칼라라고 불렀다)로, 건설회사 경리로, 영업사원으로 광포한 날을 보냈다. 이게 그가 들려준 투박한 과거다.
어느 날 그는 섬으로 돌아갔다. ‘낙도 집배원 모집 공고’ 한 줄이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듯 그를 이끌었다.
“도시 생활하면서 하루하루 ‘이게 아닌데’ 싶데요. 대기업에서 대리점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본사에서 이달 목표는 얼마라고 하면 나는 대리점들을 ‘푸시’하는 거죠. 그 사람들 살림을 뻔히 아는데 물건을 팔든 못 팔든 무조건 수금을 해 와야 하는 일, 안 맞더라고요. 관두고 이런저런 일들을 떠돌다 ‘섬에 집배원 자리 났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어요.” 그렇게 그는 신안의 또 다른 작은 섬, 암태도에 들어가 섬사람들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며 1년을 보냈다. 풍랑의 세계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후 돌아온 바다이지만, 그 귀거래사가 비감하지는 않았다. “해찰(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거나 딴 길로 새는 것을 일컫는 말)을 충족시키는 직업이었어요. 오토바이 달리며 남의 집 논에 이삭 팬 거, 호박 넝쿨 자란 거 눈 밝게 알아보게 된 게 이 일 덕분이고요. 정신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일 때문이고요. 난 돈 없고 빽 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 편지 읽어주는 일로 할매들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도 이 일 때문이고요. 그렇게 ‘모르고 살던 것들을 알고 찾아낼 기회’를 만들어주는 시간이에요. 한때는 대한민국 9천여 집배원 중 내가 가장 ‘행복한 집배원’이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영광 홍농으로 옮겨 10년 차 집배원으로 살면서 세 아이 키우며 박봉에, 무거운 헬맷 때문에 생긴 디스크, 관절염 같은 직업병에 시달리지만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참한 농사꾼처럼 마음을 닦고 있다.
(위) 동네 어르신들은 그를 단지 집배원으로 보지 않는다. 살갑게 살림을 챙겨주는 막둥이 아들, 사위로 여기기 때문에 ‘체부’ 대신 ‘지수 애비’로 더 많이 부른다.
엄니들이 사는 고향 편임을 할배들의 속 깊은 술잔에 술 한잔 받아드리고, 할매들이 취한 김에 부르는, 술이 대신 부르는 노래도 한 자락 들어드리면서 시골 집배원으로 사는 그. “처음에 계획은 그랬어요. 할매들 생신이면 맥주 한 병씩 사 갖고 가서 장구 쳐주고 춤 한번 춰줘야지. 그래서 장구를 일 년 배웠어요. 가야금도 배웠는데, 질문이 너무 많다고 중간에 파문당했어요. 엄니들이 전라도 말로 똘것이 하나 왔다며 좋아들 하셨어요.”
자식들은 대처로, 남편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덩그러니 집에 남겨진 엄니들은 집배원 함성주 씨를 아들로, 사위로 대했다. ‘아들 대신’인 그는 읍내 농협에서 볼일도 봐드리고, 약도 타다 드리고, 떨어진 생필품도 구해다 드리고, 공과금을 대신 납부하는 일을 기꺼이 한다. 살뜰히 살피는 그에게 할매들은 ‘알 하나 잡숴’ 하며 화장지에 싼 달걀 두어 개를 쥐여준다. 그러곤 “체부 바뀌면 큰일난당게. 이 사람은 여기 꽉 두야 헌디” 하며 ‘체부’가 아닌 ‘지수 애비’ 손목을 그러쥐는 할매들.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그가 할매, 할배들 가슴에 달아드린다는 카네이션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난 뒤 난 우두망찰해 있었다. “그날 카네이션은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출입증이에요. 그날 그 꽃이 없으면 자식들 욕 먹일까 봐 엄니들이 바깥 출입도 못해요. 전 어버이날 아침이 되면 일찌감치 나와 동네 돌면서 숫자를 세요. 꽃 찬 사람, 안 찬 사람. 근데 어떤 할매가 왠지 낯설어요.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집에 있는 철쭉을 꺾어서 고무줄로 묶어 가슴팍에 꽂고 나오셨더라고요. 어떤 엄니는 여러 송이 주렁주렁 달고 자랑스레 동네를 오가고.” 그가 달아드리는 카네이션 한 송이에 할매들의 뺨이 꽃보다 더 붉다.
생태적인 삶을 꿈꾸는 그는 ‘생태운동가’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얼치기 환경주의자’라는 수식을 더 좋아한다. 그가 입은 옷은 요즘 집배원들의 유니폼이다.
하루 8백 통이 넘게 그가 전하는 소식이 모두 복된 소식이라면 좋겠지만, 요즘엔‘경매 착수’ ‘최고장’ ‘압류집행통보’ ‘세상을 정직하게 삽시다’라고 쓰인 채권사의 편지가 살가운 편지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어머니의 도장을 빼내 농토를 잡히고 대출 받은 자식들 때문에 빚에 시달리는 노인이 많아진 탓이다. 그 빚 탕감하느라 고된 밭일하고는 일일 연속극 보다가 밥상도 치우지 못하고 잠드는 것이 다반사인 할매, 할배들. 그는 봉급의 5%를 꼭 떼어 그들에게 나무 지팡이 대신 가벼운 지팡이도 사드리고, 오가며 쭈쭈바도 사드린다.“서울에선 술 한잔 마시면 50만 원 훌쩍 넘지만, 할매들 가벼운 지팡이 백 개 사도 42만 원이 안 돼요. 할매, 할배들은 내 손님이에요. 나를 밥 먹여주는 제일 큰 고객. 잘해드려야죠. 그런 체부한테 고맙다고 반찬거리 챙겨주는 엄니도 있고, 그 추운 겨울날 검은 비닐봉지에 배추를 싸가지고 담 밑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는 엄니도 있어요. 처음엔 ‘누가 이런 걸 달라고 했냐!’뿌리치고 갔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드렸든 안 드렸든, 그분들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혜를 갚을 길을 주자, 싶데요. 지금은 넉살 좋게 ‘나 줄 거 뭐 없어?’ 진짜 아들같이 반말로 해요.” 천진한 노인네들이 아들 같은 그에게 지어 보이는 미소,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슬픔의 수분이 포함된 그의 미소.
“노령연금 받아 살아가시는 엄니가 한 분 계신데, 어느 날 눈깔사탕 한 봉지 들고 기다리시다가 ‘아들 갖다 줘’하시데요.
그 없는 살림에 돈 주고 산 거잖아요. ‘이빨 다 썩으라고 뭔 사탕을 사냐, 가서 돈으로 바꿔서 빵 사 잡숫든지 하라’고 내지르고 휙 나와버렸어요. 그리고 사흘 뒤인가, 그 집 앞 길바닥에 할머니가 누워계시는 거예요. 코를 대봤더니 호흡이 없어요. 안아다가 방에 모셔놓고 119에 전화를 했는데, 이미 돌아가셨더라고요. 할매 가시고 한 달인가 지났는데, 엄니들이 모여서 그 할매 이야길하면서, 그 양반이 체부 아들 사탕 하나 사주려고 추운데 읍내 나가서 사 왔는데, 안 받아 가서 얼마나 서운해했는지 모른다는 말을 전하는데, 참….” 뜨거운 것이 자꾸 목젖을 갈라놓아 이쯤에서 나는 잠시 펜을 멈춰야 했다.
“요즘 우체국 사칭 전화 사기가 빈발한데, 할매들은 절대로 안 당해요. ARS 음성이 나오면 잘 못 알아들으니까 ‘뭔 말이당가’ 하고 뚝 끊어버려요. 고등학교 정도 나와, 나 좀 배웠다고 하는 양반들이나 우체국 와서 ‘엄머, 나 7백만 원 송금해버렸는디’ 하죠. 이 순한 엄니들이 사는 고향에서 제가 일합니다. 그러니 저는 집배원이지만 우체국 편이라기보다는 제가 배달하는 동네 사람들 편이지요.” 급커브를 튼 것처럼 말을 돌리는 그 앞에서 나도 따라 보리싹 같은 웃음을 물 수밖에 없었다.
조상님들의 생태적인 삶을 꿈꾸며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이 책을 낼 때에 비해 달라졌다며, 행복이 많이 무뎌졌다며, 내 마음 앞에 과속방지턱을 놓았었다. “요즘엔 관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늘 고민을 하며 살았으니까 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거지, 언제부턴가 새로운 뭔가를 찾지 않고 시류에 맞춰 살고 있을 뿐이죠. 가족들이 있는데… 내가 만족하는 일이라고 해서 가족들이 다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죠.”
그 표정은 세상살이의 헛헛함을 맛본 사람만이 내비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한편엔 심장의 소금기가 가시지 않은 남자의 표정이 있다. 그는 글을 써서 세상에 발언하고, 숲 체험, 갯벌 체험의 해설자가 되어 자연과 소통하고 있다(그는 ‘생태운동가’란 거창한 이름보다 ‘얼치기 환경주의자’라는 호칭을 즐기지만). 해찰을 주는 터전인 우체국을 오래 다녔으면 좋겠고, 42.195km를 달려보고 싶단다. 평생 집배원으로 살다 퇴직금 받아서 농사지으며, 지구에 해 끼치지 않고 살다가 죽는 ‘생태적 자급자족’도 꿈꾼다. “저는 조상님들의 생활 방식을 동경합니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 썼지만 그 결과가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요즘의 우리는 모든 것이 완성되어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간에 그 흔적은 고스란히 쓰레기로 남습니다. 그것을 땅을 파서 묻고, 그 위에다 집을 짓고 꽃을 심지요. 이런 얄팍한 수로 언제까지 지구에 발붙이고 살 수 있을까요? 쟁피(창포) 뽑아 먹고, 동백꽃 빨아 먹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다고 하면 믿으시겠는지요. 나 스스로도 자연이 되어 더불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열 오른 무당처럼 들뜬 채 자신이 바라는 행복한 세상을 말하는 이 사람.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그가 지금 잠시 절룩거리고 있는 건, 습관처럼 살아내지 않으려는 열망 때문임을 느끼게 된다. 아직도 청춘의 병을 앓는 그이기 때문인 것이다. 단지 관성일 뿐이라지만 여전히 홍농읍 할매, 할배들에게는 살가운 ‘지수 애비’인 그에게 이 가을이 가면 또 다른 봄이 올 것이다. 꽃들은 기어이 종환처럼 붉은 피고름을 터뜨리며 피어날 것이다.
(위)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식들이 객지로 나가 홀로 사는 어머니들에게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챙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