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문화골목의 한 건물 2층에서 내려다본 갤러리 석류원과 전통 주점 고방. 커다란 나무는 3백여 년 된 석류나무로 이곳의 트레이드마크다.
집과 집을 잇는 좁다란 길, 골목. 사실 유별날 것 없는 그저 삼삼한 동네 풍경 중 하나다. 하지만 ‘골목’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아련한 향수가 느껴진다. 골목길엔 친구가 있다. 딱지와 고무줄도 있다. 골목길엔 그리고 사랑이 있다. 연인에게 골목은 좁고 외질수록 아늑했을 터. 골목길, 그곳은 추억이다.
‘골목길 정서’를 공유하는 이들을 위해 아담한 골목 하나가 열렸다. 부산 대연동 경성대학교 근처의 문화골목이다. 40년 넘은 가옥들을 살살 다듬어 얼마 전 갤러리, 공연장, 카페, 전통 주점, 칵테일 바 등이 모인 복합 문화 골목이 탄생했다. 공간 연출가 박봉련 씨와 건축가 최윤식 씨가 의기투합해 이룬 결과다. 오래된 건물을 최소한으로 레노베이션했기에 신생 공간이지만 구수하고 편안하다.
헐고 짓는 것은 고쳐 쓰느니 못하고 골목은 역시 걸어봐야 제맛이다. 멀찌감치 선 채 눈으로 휘 둘러봐서는 감흥의 태반을 놓치는 셈이다. 부산 문화골목에 도착하면 내부로 들어가기에 앞서 골목 구석구석을 거닐어보자. 단, 골목의 길이는 보는 이에 따라 고무줄 같다. 헐거운 눈으로 보면 오십 보 만에 끝날 작은 골목이지만, 세심한 눈으로 살피면 촘촘한 백 보로도 부족하다.
잿빛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 대신 이끼 낀 돌길이 객을 반긴다. 시간의 흔적과 사람 냄새가 깃든 길이라야 골목답다고 말하는 박봉련 씨의 손길이 느껴진다. 지난해 초 이 골목이 완성되고 난 후 그가 가장 학수고대했던 게 이끼였단다. 설명을 듣고 보니 이끼가 피어오른 돌길이 골목을 푸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1 부산 문화골목 입구. 한때 문학도를 꿈꾸었던 박봉련 씨가 펜으로 쓱쓱 적은 낙서를 옮긴 녹슨 철판으로 대문을 대신했다.
2 이곳에서 건축가 최윤식 씨(왼쪽)는 골목대장으로, 공간연출가 박봉련 씨는 박 문사로 불린다.
3 최윤식 씨가 모은 2만여 장의 가요 LP를 감상할 수 있는 생맥주 집 노가다.
매끈한 신작로가 아닌, 언젠가 걸었던 듯한 친근한 골목이어서일까. 추억이 밀려온다. 저기 꺾인 골목 모퉁이를 돌면 반가운 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도 같다. 추억의 재생이라. 도심 한복판을 맴도는 일상에서는 좀체 찾기 어려운 시간이다.
“요즘 말끔하게 새로 꾸민 집 참 많죠. 그런데 살아온 흔적이 없는 살림, 추억이 사라진 인테리어가 한 가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공간 연출 작업을 하면서 그 가족 고유의 자취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을 선호했어요. 문화골목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고요.” 가령 갤러리 내부의 천장으로 비집고 들어온 나무줄기에서, 마당 깊이 뿌리 내린 나무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으려 한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골목길은 건물 밖 1층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2층에서 다리를 통해 옆 건물로, 다시 좁은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연결된다. 녹슨 자전거, 성당의 종 등 폐자재를 재활용한 골목 꾸밈도 재미나다. 원래의 골격을 보존한 채 일부만 바꾼 것이 다 허물고 새로 지은 것보다 더 신선하고 개성 있다. 이런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문화골목은 제6회 ‘부산다운 건축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헐고 짓는 것은 고쳐 쓰느니 못하고, 고쳐 쓰는 것은 다듬어 쓰느니만 못합니다.” 문화골목은 이런 최윤식 씨의 건축 철학을 십분 반영한 결과다.
일단 문화골목에 들어서면 이 작은 마을의 주민이 된 기분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적인 분위기 덕분이다. 아마도 이곳의 시작이 ‘지인들을 위한 아지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이야기로 거슬러간다. 최윤식 씨가 이곳의 주택 한 채를 음악 다방 겸 레스토랑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지인 박봉련 씨가 놀러 왔다가 근처의 주택 하나를 점찍었다. 옥상에는 꽃을 심고 1층에는 와인 바를 만들어 좋아하는 이들과 오붓하게 즐길 요량이었다. 그러다 둘의 뜻이 가지를 뻗어 인근 주택 네 채를 더 매입해 문화골목을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 둘은 ‘사장님’이라 불리지 않는다. 설계, 시공 등을 담당한 최윤식 씨는 ‘골목대장’으로, 인테리어, 조경, 전시 기획 등을 맡은 박봉련 씨는 ‘박 문사’로 불린다. 그리고 대장, 문사, 직원, 손님 할 것 없이 이 골목을 드나드는 사람은 한가족이다.
1 이끼 낀 골목이 문화골목의 시작이다. 이곳에 쌓인 시간의 흔적은 앞으로도 닦아내지 않을 것이다.
2 최윤식 씨의 사무실이자 이곳에서 전시를 여는 작가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3 찹쌀 막걸리가 일품인 전통주점 고방. 이곳의 인기 안주는 고추전, 녹두빈대떡, 명태구이.
4 카페 겸 와인 바 다반은 세세한 부분까지 박봉련 씨의 감각이 스며 있다.
5 갤러리 석류원의 내부. 일반적인 갤러리와 달리 자연광을 과감하게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하늘빛, 구름, 눈과 비 등으로 사시사철 달라지는 자연의 표정과 더불어 작품을 감상하기를,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작품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연출했다.
6 최윤식 씨가 영화 ‘색, 계’를 본 뒤 영감을 받아 만든 ‘색계’라는 이름의 칵테일 바. 관능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주조색을 레드로 하고 실내 조도를 낮췄다. 천장에 걸린 꽃 모양의 와인잔 걸이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골목의 밤은 길다 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카페 ‘다반 茶伴’(차를 나누는 친구)으로 들어가 땀을 식힌다. 오래된 중국 가옥의 육중한 대문으로 만든 독특한 테이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강아지풀과 이름 모를 들풀로 장식한 소박한 꽃꽂이가 청량하다. 너른 창을 통해 저녁 기운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와인을 맛볼 시간이다. 갤러리 ‘석류원’과 소극장 ‘용천’에서 만나는 이색적인 작품은 가족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밤의 끝을 좀 더 붙잡고 싶거든 음악이 가득한 생맥주 집 ‘노가다 老哥多’(오래된 음악이 많은 곳)에 들러보자. 최윤식 씨가 수집한 2만여 장의 오래된 가요 LP가 벽면을 메우고 때때로 라이브 음악도 연주하는 곳이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흑맥주 에딩거와 산뜻한 생맥주 산미겔을 즐기다 보면 밤이 으슥해진다. 맥주보다는 전통주가 그립거든 전통 주점 ‘고방’에서 명태구이를 곁들여 막걸리를 한잔해도 좋다. 여기서 자리를 옮겨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칵테일 바 ‘색・계’로 가서 입가심을 할 수도 있고, 아담한 가정식 노래방 ‘풍금’에서 여름밤의 흥을 이어갈 수도 있다.
문화골목을 지나다 보면 행인들과 어깨가 스치게 된다. 골목의 여유를 공유해서일까. 이들과의 스침이 나쁘지 않다. 문득 “좁을수록 좋은 길, 넓을수록 나쁜 길”이라는 골목대장의 말이 떠오른다. “길이란 게 넓으면 뭐든 싹 흘러 지나가버려요. 좁으면 자동차가 지나가지 못하니, 두 발로 걸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지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객들에게 행여 모기가 성가시게 굴까 염려되었던 걸까. 여기저기서 말린 쑥 피우는 냄새가 오르기 시작했다. 골목의 밤이 깊어갔다. 
* 박봉련 씨는 강아지풀 한 줄기로도 공간에 여유와 낭만을 자아내는 공간 연출가다. <행복>의 오랜 독자이자 이효재 씨의 <행복이 가득한 교실> 수강생이 된 인연으로 부산 문화골목을 소개하게 되었다. (주)가산건축사사무소 소장 최윤식 씨는 건축가이자 풍류를 아는 로맨티스트다. 삶도 사람도 사랑도 모두 자유롭게 피어나는 공간을 짓고자 한다.
부산 문화골목 여행 정보 주소 부산 남구 대연3동 52-4 8월의 전시 및 공연 일정 갤러리 석류원-깃타 요코의 유리 조형과 김찬욱의 은 작품 전시, 8월 16일까지. 소극장 용천-연극 <몽실>, 8월 2일까지. 문의 051-625-0730, 0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