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내달리면 정동진역에 못 미친 산 언덕에 하슬라 뮤지엄 호텔이그림처럼 서 있다.그리고 동해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져 있다. 이 바람의 언덕에서 자라는 구절초가 유난히 예쁘다는데, 그건 고지대 언덕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위기감을 느끼고 자라는 식물들이 종족 번식 욕구가 강해져 더 탐스럽고 화려한 꽃을 피워 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1 객실의 거실 한가운데 놓인 유선형의 타일 조형물은 용도가 세면대 겸 테이블이지만 그 자체로 조각 작품이기도 하다. 최옥영 교수가 신라의 석지조라는 다구에서 착안해 만들었다.
2 일반 호텔에 비해 층고가 높은 하슬라 뮤지엄 호텔은 복층형 구조로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3 26개의 객실은 모두 디자인이 다른데, 그중 한 객실의 서재 바닥엔 자갈을 깔았고, 회반죽을 그대로 굳혀 테이블 받침을 만들었다.
누군가 그랬다. 입을 벌리고 자는 것은 인간뿐이고, 그건 삶이 그만큼 곤고하기 때문이라고. 꿈속에서의 평화까지 솎아가는 세상을 잠시 떠나 어디든 가고 싶을 때 바다만큼 품 넓은 도피안이 또 있을까. 시인 고은의 ‘아름다운 여자를 잉태한 젊은 어머니의 바다’보다 좀 더 짙고 시린 동해의 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저 바다에 돌고래처럼 몸이 반쯤 잠겨 조금씩 차오르는 평화를 누리고픈 오후, 정동진의 바람 부는 언덕에 섰다.
7번 국도 옆, 우리나라에서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맞는 곳에 하슬라 뮤지엄 호텔이 있다. 2004년 문을 연 조각 공원 하슬라 아트 월드(‘하슬라’는 강릉의 옛 지명)를 병풍처럼 두르고 바다를 향해 팔 벌린 건축물이다. H-빔(단면이 H형인 강재로, 건물의 기둥과 보 등으로 쓰인다)으로 지은 데다, H-빔 사이의 컬러 유리가 눈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마음을 미혹하기에 충분하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물보다 빨리 흐르는 법이어서, 이 그림 같은 풍경에 마음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호텔 앞으로 펼쳐진 동해는 쉬기 위해 온 객에게 파도 소리 말고는 완벽한 적막을 선물한다.
이 절세의 풍경에 마음이 노곤해질 무렵 호텔 안으로 들어선다. 먼저 리셉션 데스크의 조각 같은 가구들이 눈을 잡는다. 목조각 작품이지만 앉을 수도 있는 의자, 타일을 붙인 유선형의 리셉션 테이블, 이재삼 작가의 목탄 회화까지 호텔 로비라고 하기엔 너무 ‘예술적’이다. 로비를 지나면 천장고가 14m에 달하는 웨딩홀이 눈에 들어온다. 몬드리안의 색면처럼 구성된 커튼월(칸막이 구실만 하고 하중을 지지하지 않는 바깥벽) 사이로 동해가 내다보이는 이 광활한 공간에서 가약을 맺는 연인, 상상만 해도 가슴이 흥분으로 달구어진다. 웨딩홀을 지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다양한 미술 작품이 동해 바다와 그림처럼 어우러진 미술관 겸 레스토랑 ‘장 張’이 나타난다. 1층 로비에서 만났던 이재삼 작가의 목탄 회화가 더 거대한 크기로 곳곳에 자리하고, 양태근 작가의 악어 작품이 특히 눈을 끄는 공간이다.
4 의자 겸 목조각, 리셉션 데스크 겸 타일 조각품이 놓인 로비.
모험가 부부의 도전 이 근사한 호텔은 하슬라 아트 월드를 만들어낸 조각가 최옥영 교수・박신정 부부가 일군 공간이다. 3만 3천 평의 빈 산을 조각 공원으로 만든 용감한 부부가 또 한 번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하슬라 아트 월드가 집 안을 인테리어하듯 자연을 데커레이션했다면, 하슬라 뮤지엄 호텔은 바다라는 자연을 인테리어 안으로 끌어들인 공간이다. 조각 공원을 만들 때 자연의 모습을 해치지 않기 위해 배선, 오수관 시설을 모두 지하에 매설하느라 공사비의 80%를 썼던 그들은, 또다시 무모한 탐험에 나섰다.
“이곳에 묵는 이들에게 ‘예술에 눕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결국 보여주려는 건 예술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바라본 자연’이었지요. 자연이 가장 근사한 예술이므로, 이 자연이라는 예술을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흠뻑 만끽하는 것, 그걸 위해 엄마의 자궁을 닮은 침대를 객실 중심에 떡 놓았죠.”
조각 공원을 만들며 소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어리 때문에 인부들과 다툼, 회유를 반복했던 그들은 이번엔 이해불가능인 공정(벽과 바닥을 마감하고 나서야 그 객실 안에서 침대를 조각하듯 만드는)을 감행했다. 밖에서 완성해 안으로 들일 수 없는 크기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엄마의 자궁을 닮은 침대. “조각품처럼 만든 이 침대가 없다면 ‘뮤지엄 호텔’이 아니죠.” 모태의 기억을 자극하는 이 침대에 누우면 나른한 에로스가 찾아올 것이고, 파도 소리에 잠을 깨는 아침이 올 것이다. 각각 다르게 디자인한 26개의 객실에는 조금씩 다른 형태의 ‘조각품’ 침대가 놓여 있다.
5 웨딩홀로 사용하게 될 이 공간은 천장고가 14m에 달한다.
1 엄마의 자궁을 닮은 침대. 가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품에 가깝다.
2 미술관 겸 레스토랑 ‘장’의 복층형 공간에서 바라본 동해.
3 어린 시절 야트막한 개울물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리며 만든 자갈 욕조. 이 호텔의 욕실은 모두 테라스 공간에 자리해 바다를 바라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다.
여자의 방 이 호텔에서 ‘뮤지엄 호텔’이라는 레테르에 걸맞은 것 중 하나가 객실 한가운데 놓인 ‘타일로 된 물길’이다. 벽에서부터 시작된 유선형 형태가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안착한 이 물건은 최옥영 교수의 작품 ‘소똥으로 만든 하늘을 담는 그릇’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다. 유리 타일을 조각하듯 붙이고 물이 흐르게 한 이 물건의 용도는 세면대 겸 테이블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조각품이기도 하다. 최옥영 교수는 신라 화랑들이 쓰던 석지조(큰 돌덩이 하나에 바람구멍이 있는 풍로와 물을 담는 못이 함께 파인 것으로 우리만의 독특한 다구)에서 착안했는데, 거실에 떡 놓인 이 유선형의 물건이 이 공간을 ‘여자의 방’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 여성의 선은 화장실 세면대, 몇몇 객실에 놓인 조가비 모양의 욕조 등으로 이어진다.
이 세상 어떤 호텔에서도 볼 수 없는 물체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이 낯선 광경도 결국 ‘자연이라는 예술’을 흠뻑 누리게 하기 위한 장치다. 객실에 들어앉아 밖의 바다와 안의 물소리를 느끼는 오후. 여기서 잠시 멈춰 서서 느끼는 것이 삶에는 햇빛과 꿈의 기쁨이 있다는 정도라도 족하다. 도피안으로 찾아든 이에게 나무늘보처럼 느린 시간을 갖게 하는, 참으로 묘한 객실. 이 ‘조각적인 호텔’을 만든 조각가 부부는 이 작업을 ‘하우스 스컬처 House Sculpture’라고 부른다.
4 유혹의 방처럼 보이는 세면실.
5 조각 공원 하슬라 아트 월드에 이어 하슬라 뮤지엄 호텔을 남편 최옥영 교수와 함께 일구어낸 박신정 대표.
6 미술관 겸 레스토랑 ‘장’ 구석구석에는 부부 조각가이기도 한 최옥영・박신정 작가의 작품과 기획전으로 전시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놓여져 있다.
예전에 조각 공원을 만들면서 나무 길 사이에 데크 하나를 설치할 때도 나무를 베지 않으려 애썼던 그들은 호텔을 지을 때도 창밖의 자연과만 친숙한 공간이 되게 하려고 공사비가 갑절로 드는 커튼월로 건물 구조를 만들었다. 커튼월 프레임(H-빔으로 지은 건물 형태상 창이 액자 같은 역할을 한다)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는 그야말로 예술이 됐다.
“길지도 않은 인생에 왜 이런 힘든 일을 했을까 싶었는데, 이곳에서 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이유를 알겠더라”던 한 수녀님의 이야기(<행복> 2005년 1월호에 소개)처럼 하슬라 아트 월드에서 만나는 월출은 장관이다. 무엇보다 호텔을 둘러싼 조각 공원 때문에 가슴에 더 오래 담아둘 것 같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꼬마 소나무가 즐비한 ‘누누접이길’, 당단풍나무를 비롯해 3백여 가지의 고유 수종이 모인 ‘성성활엽길’, 수명이 6백 년이라는 돌의 풍화 과정을 보여주는 ‘시간의 돌’…. 조각 공원은 6년이란 시간의 더께를 입어 더 근사해졌다.
아찔할 정도로 빨리 돌아가는 세상을 벗어나 느리게 걷게 하는 이곳. ‘예술’인 자연을 마시고 ‘예술에 누워’ 맛보는 찰나의 나태함. 이 시간은 다가올 인생의 진한 방점이 될 것이다. 이 여름의 한복판에서 당신, 어디로 떠날 것인가. 문의 033-644-9411, www.haslla.com
7 하슬라 아트 월드의 조각 공원 산 정상, 바다를 바라보는 위치에 놓인 작품 ‘시간의 돌’.
8 다산을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은 최옥영 교수의 작품.
- 행복으로 떠나요 정동진의 하슬라 뮤지엄 호텔
-
7번 국도를 타고 정동진 바다로 달리다 보면 언덕 위에 한여름 꽃처럼 만개한 조각 공원 ‘하슬라 아트 월드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앞, 해풍을 가장 먼저 감싸 안는 자리에 하슬라 뮤지엄 호텔이 들어섰다. 조각가 부부의 두 번째 꿈이기도 한 이 호텔에서 우리가 발견한 건 ‘자연이라는 예술’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