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방금 까놓은 귤 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그의 모란도 牡丹圖 안으로 스며든다. 모란꽃 몇 송이가 알큰한 숨결을 내뿜고, 그 사이로 꼬리에 무지개를 매단 물고기가 날아다닌다. 모란꽃. 금실 좋은 부부가 되기를, 해로하기를, 부귀영화를 누리길 바라며 신부 예복에 수놓던 그 영화로운 꽃이 캔버스 위에 만발해 있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 그림에 절로 웃음이 핀다.
화가 김호연 씨. 다시 만난(그는 2006년 6월호 <행복> 표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그림은 3년 전의 연꽃 그림처럼 밝고 환하다. 잎맥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꽃잎이 생생한데 물감으로 두껍게 입힌 캔버스를 사포로 갈아내고, 판화 기법으로 긁어서 새긴 결과다. 꽃의 속살에, 이파리에 혈관처럼 새겨진 바늘 길은 이 모란꽃 그림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꽃을 보다 보니 꽃 속에 최고의 비례미, 수직 수평의 구도와 면 분할이 있더군요. 역시 자연은 질서와 평화의 법칙을 가장 잘 아는 스승입니다.”그는 원래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완벽한 면 분할의 추상화를 그리던 작가였다.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떼운 자국도 있는 낡은 장판지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서 면 분할의 미를 만드는 작품으로 국전에서 입선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추상의 미를 좇던 그가 세상을 걷다 최상의 조화미를 지닌 존재, 꽃을 발견하게 됐고, 그 후로 그의 캔버스는 꽃사래 치는 들판이 되었다. 물론 그는 꽃 그림을 또 다른 추상화로 여긴다. 자연이 만든 평화와 질서로 가득 찬 추상.
용쓰지 않으면 더 좋은 인생, 그리고…
연꽃을 그리든, 모란꽃을 그리든 그가 그리는 꽃 그림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도드라지지 않는 꽃을 피우기 위해 그는 하늘의 질감과 꽃의 질감을 맞추고, 에칭 기법으로 긁고, 스푸마토 기법(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개발한 기법으로, 톤 조절을 통해 경계선을 없애는 방법. 모나리자의 모호한 표정은 딱딱한 경계를 지우는 이런 기법 덕분이었다)으로 갈아내고 문지른다. 그렇게 그려낸 꽃 그림은 찬란하지 않으나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세밀하다. 마치 수필 같은 그림이다.
그의 이 한갓진 그림은 그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바와 맥이 닿아 있다. 그는 축구도, 수영도, 골프도 빼어나게 잘하기로 유명한데, 그건 모두 힘을 빼고 슥슥 해서란다. “젊었을 땐 뭘 하든 정말 용쓰며 했어요. 선수도 아니면서 축구하다가 무릎 관절이 상해 한 3년 동안 무릎을 못 쓸 정도로. 한데 용쓰면 용쓸수록 더 안 된다는 걸 살면서 깨닫게 되데요. 골프도 욕심 안 부리고, 있는 힘껏 안 치니까 오히려 정확하게 맞아요. 바둑 두면서도 사는 방법 많이 배우는데, 바둑은 노여워하면 지더라고요. 아, 화내면 안 되는구나. 물고기처럼 살아야겠다 생각하게 됐죠.”
이런 성품의 그가 그려낸 그림은 암호에 가까운 기호를 꼭꼭 숨기고 들어가지도 않고, 흔적이 낭자한 자기 고백서 같지도 않는다. 꽃과 물고기와 하늘로 가득 찬 그의 그림은 서툰 동화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말랑말랑한 힘으로 무릎 펴고 일어날 기운을 북돋는다. 하지만 용쓰지 않고 살려면 그만큼 더 용써야 하지 않나. 그는 그의 이 한갓진 그림을 위해, 무기교의 그림처럼 보이기 위해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칠하고 문지르고 갈고 긁는 작업에 몰두한다. 많이 그려야 많이 나온다는 그의 신념대로 학교 연구실에서 매일 여덟 시간씩 그리고 또 그린다. 역시 세상에는 아픔 없이 벙그는 꽃이 없는 법이다.
낙원에서 꾸는 꿈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주 독특한 무중력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무지개를 매단 물고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영하고, 꽃이나 나뭇잎은 공중에 매달려 있고, 연꽃은 물 위에 떠 흔들린다. 모두 어딘가를 날고 있는 것 같은 이 그림 속 세상 어디에도 무거움이나 견고함은 없다. 대신 태고의, 태중의 기억을 일깨운다. 자연과 인간이 원래 지음받았던 모습의 기억,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그림에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은 10년째 ‘자연+꿈+영원성’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따로 나뉘지 않는다. 활짝 피어나기 전의 꽃봉오리도, 만개해 향기를 온몸으로 올리는 꽃봉오리도, 꽃 사이에 숨은 물고기도 원근법이나 명암으로 주・조연이 나뉘지 않고 모두 평화롭게, 질서 있게 그림 안에서 제 몫을 살 뿐이다. 아이의 낙서나 민화에서처럼 단순 명쾌하게, 선과 면이 규모 있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그의 그림에서 민화의 단초를 발견했고,‘신모란도’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2008년 그는 동화작가 허은순 씨와 그림 동화 <하늘로 날아간 물고기>를 만들었다. 지느러미가 없거나 보통 물고기와 다른 색을 지니고 태어난 ‘왕따’ 물고기 여덟 마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존재로 태어나 제 몫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물고기 그림에서 그가 꿈꾸는 ‘자연+꿈+영원성’의 세상 한 자락을 깨닫는다. 자연이 지어준 모습 그대로 평화와 질서의 세상을 사는 꽃, 물고기, 나무, 산.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가고 있다. 그의 그림 속 모란처럼, 물고기처럼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이 봄의 끝자락을 살고 싶다. 사는 나날은 다 꽃답다고, 생명 있는 것들의 계절은 모두 봄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화가 김호연 씨는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에서 섬유 미술을 전공했다. 회화, 조각, 판화, 태피스트리, 도자기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작하는 ‘종합 작가’로, 2005년부터 연꽃과 모란 등 꽃 그림을 주로 그린다. 저서로 <이카트>를 출간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