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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의 핫 에이지 일흔두 살, 맨몸의 청춘
한때는 최고의 무비스타로 영화처럼 세상을 살았던 신성일 씨. 그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대중의 인기, 권력, 부와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지금이 최고의 전성기라 말한다. 경북 영천의 한옥에서 맨몸의 자연인으로 살며 인생의 ‘핫 에이지’를 보내는 그의 일상.

남자는 꿈꾼다. 세상에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훌훌 털고 떠나리라, 산속에서 나무를 깎겠노라, 바닷가에서 해 질 때까지 낚시를 하겠노라, 그도 안 되면 종일 벌판에 나무를 심겠노라. 내 본색 本色을 찾아 떠나겠다.
내 이름은 아버지도, 남편도, 아들도 아니다. 남자, 그것이 내 이름이다. 가족, 일, 명예에 대한 책임으로 어깨가 짓눌린 이 시대 남자들을 버티게 하는 진통제, 바로 초원의 꿈이다. 맨몸의 남자로 돌아가 사는 꿈.
영화배우 신성일은 꿈을 이뤘다. 나이 칠십 넘어 비로소 자연으로 돌아왔다. 경북 영천시 채약산 아래 한옥을 짓고 홀로 산 지 딱 1년 되었다. 무비스타로 1960~70년대를 풍미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한때 국회의원으로 정계의 이목을 모으기도 한, 이제 세상에 품은 뜻을 다 이뤘다는 그. 오랫동안 소망한 대로 자연인이 되었다. 새벽 5시 무렵 찾아간 그의 ‘성일가 星一家’에서 주인장은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호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왼쪽) 그는 집 뒤뜰에 만든 승마장에서 애마 뽀빠이를 타고 승마를 즐긴다. 승마는 특히 허벅지 안쪽의 근육을 단련하는 데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는 알람 시계 없이 새벽 4시 반에 눈을 뜬다. 진짜 혼자구나 싶다.
정원을 한 바퀴 돌며 나무에 물 주고, 마당 쓸고, 개똥 치우며 한참 동안 집을 정리한다. 철수(풍산개 이름)나 딤프, 복실이(딤프는 흰 진돗개, 복실이는 딤프 아들)를 데리고 뒷산에 뛰어갔다 온다. 돌아오면 미명의 외딴 집이 서서히 황금색으로 물든다. “아, 정말 혼자 보기 아깝지.” 잔웃음이 까끌까끌한 턱까지 번졌다. 영화로만 보던 귀공자 혹은 반항아 신성일이 맞나 싶다. 이곳에 온 뒤로 그의 눈은 한층 순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른 아침인데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라디오를 FM 93.1 MHz에 고정해두고 청취한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음악을 마음껏 들으니 참 개운하다. ‘머리와 온몸이 울리도록 음악을 틀어놓고 사는 공간을 갖는 게 꿈’이라 했다는 패티김의 말을 인용하며 그는 싱긋 웃었다. 슬로 라이프를 염두에 두고 지은 집. 그 슬로 라이프의 기본은 걷기라며 그는 걷는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옥이 사실은 ‘불편한 집’이다. 평평한 아스팔트 길과 엘리베이터 대신 바위 계단을 거쳐야 집에 다다른다. 그러나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을 때 욕심과 사념을 떨칠 수 있다. 해가 높이 뜰 때까지 걷고, 뛰고, 일한 뒤 그가 “마루에 누워보세요. 엄마 품에,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봉우리가 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높이로 에둘러 있거든요” 한다. 신성일 씨가 이 터를 발견한 건 우연이고 인연이었다. 지인의 포도밭에 놀러 왔다가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 하나를 발견하곤 끌리듯 들어갔다. 그랬더니 마술처럼 이곳이 ‘짠’ 하고 나타났다. 사람의 기세를 누를 듯 험하지 않으면서도 위엄 있는 산이 자리 잡은 이곳. 시선은 그림 같은 풍경을 한 바퀴 돌아 한옥에 머문다.
“한옥이 참 늠름해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옥 자랑이 술술 나온다. “작년 내 생일(5월 8일)에 문을 달았으니, 1년 되었지요. 나무 보세요. 오대산 금강송이에요. 옹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이에요. 나뭇결을 살려 둥글게 깎은 기둥하며, 도자기 굽듯 두 번 구워낸 청기와 지붕하며…. 기가 막히죠.”자연 속에 녹아들고자 담을 쌓지 않았더니, 뒷마당 너머로 소나무 숲 풍경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듯 그의 한옥은 자연을 닮아 품격을 더해갈 듯하다.


‘동양인에겐 생머리보다는 곱슬머리가 더 어울린다’며 때맞춰 파마를 한다.

과거의 영화 映畵, 그리고 영화 榮華 1960~70년대 ‘신성일 독주 체제’를 거치며 한국 영화 5백6편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던 스타. 권력의 제왕 연기를, 청량리 588이나 청계천 시궁창에서 밑바닥 연기를 하며 극과 극의 인생을 경험해본 배우. ‘욕망하는 인간’의 무수한 표정을 대변해온 배우. 수백 편의 영화를 통해 얻은 영화 榮華는 관성이 있어서 영화로운 자리에서 내려오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는 왜 산중의 이름 없는 남자가 되기로 했을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주최하던 계 모임이 깨져 집안이 풍비박산 났어요. 청년이었던 저는 그때부터 야욕을 불태웠어요. 뭐든 최고가 되자. 사업을 하면 최고의 갑부가 되고, 정치를 하면 대통령이 되고, 공부를 하면 박사가 되자. 결국 영화배우로 성공했고, 오래 품은 뜻으로 국회의원도 했지요. 그러다 감옥에 들어갔다 오지 않았소(그는 2005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지원법 연장과 관련해 뇌물 수수 혐의로 2년간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자중한 뒤 세상으로 나온 그는 그냥 ‘인간 신성일’로 살고 싶었다.
“옥살이는 내게 값진 것을 주었어요.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참으로 아끼는 법을 깨닫게 해주었으니까요. 독방에 들어가 생각해보니 ‘여생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구나’하는 결론이 섰어요.” 결심한 뒤부터 바로 실천에 옮겼다. 바쁘게 살 때 제일 읽기 어려웠던 게 전집류였는데, 이참에 <초한지>, 황석영의 <장길산>, <삼국지> 등을 다 읽었다. 중국 고대사를 섭렵하고 후진타오의 현대사까지 꿰게 되었다. 독서는 분별력, 판단력, 결단력을 갖추게 했다. 때때로 추위가 참 고통스럽고, 홀로 있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침마다 <반야심경>을 썼다. 가부좌하고 <반야심경> 2백60자를 쭉 쓰고 나면 흐트러짐 없이 정신을 집중하게 되었다.
“교도소에는 24시간 형광등이 켜 있어요. 밤에 사고 낼까 봐 교도관들이 감시하기 좋게 켜두는 거죠. 자려고 누우면 형광등이 눈을 찌르죠. ‘불 끄고 자봤으면’ 싶더군요. 혹독한 시절을 겪고 나오니, 김내성 선생의 <청춘극장>이란 작품 속 이런 말이 와 닿았어요. ‘행복은 산 너머 저 하늘 무지개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주머니에 있다’고요.”
철저히 자기 시간을 누리며 벌판의 야생마처럼 살기를 꿈꾸는 한편, 나이 들수록 더 고마운 아내와 오순도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 “우리 부부는 둘 다 시대를 풍미한 스타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인생 자체가 영화 같았고, 그래서 엄 여사와는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은 다 경험했어요. 나도 그렇지만 자기 일 하면서 남편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바빴던 엄 여사도 이제 자기 생을 되돌아볼 때예요.” 나이 든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는 자존심.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기대지 않고 번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모처럼 어느 큰 행사에 갔더니 ‘요즘 뭐 하십니까?’ 묻는데, 속으로 화가 좀 나더군요. 텔레비전에 얼굴 비추고 영화 출연을 해야만 활동하는 것으로 알아요. 하지만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해요. 그리고 지금이 일생 중 가장 행복합니다.” 연륜이 묻어나는 주름이며 젊은 시절 못지않은 몸매 등이 여전히 배우로도 손색없는 그인데, 다시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영화는 사업이에요. 내가 나가고 싶다고 나가고,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가는 게 아닙니다. 제작자, 감독, 작품, 관객이 ‘신성일이 필요하다’고 할 때 나가는 거죠.”
그럼 그는 세상에 ‘영화계 은퇴’선언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은퇴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영화인입니다. 영화배우보다는 영화인으로 남고 싶어요. 영화 박물관을 만드는 게 내 일생일대의 사업입니다.
정치・경제적으로 어렵던 1960년대, 사람들에겐 위로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자 냉난방도 되지 않는 영화관을 찾아갔어요. 그런 정서에서 한국 영화가 존재했습니다. 이걸 기억하고 싶어요.” 그는 1백 년 가까이 된 한국 영화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영화 박물관을 구상하고 있다.


전통 양반 가옥을 본떠 오대산 금강송으로 지은 ‘성일가’. 대구에 있는 아파트의 살림 중에서 한옥에 어울릴 만한 것만 옮겨 와, 공간에 여백의 미를 살렸다.

나이 들어도 낭만을 꿈꿔라 날렵했던 턱 선은 무뎌지고, 매끈했던 눈가도 주름이 조금씩 점령해가고 있는데 눈빛만은 여전히, 눈에 띄도록 빛난다. 이유를 묻자마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한다. “사랑하니까!” 그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아주 잠깐 코끝을 스치는 바람을, 마음속의 연인을 그는 미치도록 사랑한다. 나이 들어 욕심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하여 열정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청춘의 들뜬 열병이 가시자, 노년의 삶은 폭풍 후의 투명하게 갠 하늘 같다. ‘순정 純情’이란 무언가를 실감한다. 그래서 노년의 사랑은, 그 맑음의 정도만큼 깊이 투시하고 깊이 다가갈 수 있다.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중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멜로드라마를 가장 좋아한다는 남자. 사랑이란 주제가 제일 고귀하게 여겨진다는 남자. 그래서인지 자연인으로 살지만 낭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젊으니까, 낭만은 젊음과 한몸이니까. 한 예로 출소한 날부터 고수하고 있는 ‘베토벤 머리’는 서울 이촌동에 있는 엄앵란 여사의 단골집에서 35~45일마다 한 번씩 파마해서 관리한다. “나이 들어 머리가 하얗게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까만 머리야말로 의상 색 맞추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그런데 머리가 하얗게 세고 나니 아무 색이나 잘 어울리는 거예요. 특히 흰색 셔츠를 입으면 스타일리시하고, 분홍 셔츠도 참 멋들어지게 매치되고.
참, 난 요즘 슬림핏 스타일이 좋더라고. 다만 배 나오면 못 입으니까 식사 관리를 좀 하죠. 하하.”
사랑이든, 낭만이든, 그는 핫 에이지를 누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건강이다. 그의 집 뒤뜰에 만든 승마장에서 말을 타며 허벅지 근육과 허리를 단련하고, 틈날 때마다 산책하고 골프를 치며 전신
근육을 고루 일깨운다. 젊을 적부터 식품영양학을 상식으로 익혀둬 컨디션에 따라 음식을 철저하게 조절한다.
“요즘 젊은 배우들이 속성으로 만든 근육과 달라요. 오랜 세월 새겨진 잔근육이 진짜 멋지지.” 타이트한 반팔 티셔츠 아래로 그의 팔이 불끈거렸다. 그와 99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배우 윤정희 씨가 간파했듯이 ‘자존심이 강하지만 순수하고, 순수해서 자기 자랑을 은근히 하고, 그래서 귀여운 남자’가 맞다. “쭉 살아보니, 정치는 권모술수 없이는 못하데요. 그런데 자연 속에서는 권모술수를 못 부려요. 여기 있으면 ‘나 혼자다’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웃이 없고, 사람들을 차단하며 산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진정 평화로워져요. 이제 그런 상태에 다다른 모양이에요.”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신독 愼獨을 그는 늘 염두에 두고 산다. ‘스타 신성일’이 어떻게 사나 보러 온 ‘관람객’으로 북적일 때나, 혼자서 새벽빛을 맞이할 때나 그는 한결같은 평화를 찾고 싶다.
마지막 질문. 딱 하나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슈퍼카! 재규어 한 대 갖고 싶어요. 재규어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차예요. 박물관 지으면 그곳에 영구 보존하고요.” 평생 ‘늙은이’의 눈빛을 모를 남자. 늘 꿈꾸기 때문일까?

(위) 지난 1년간 매일 아침 손수 다듬어 만든 산책길이다. 요즘도 발에 채이는 돌부리를 걷어내고 쓰레기를 주우며 다른 산책자들을 배려한다. 풍산개 철수는 힘이 장사라, 함께 산책하다 보면 이마엔 땀이 솟고 팔뚝엔 이두박근이 솟는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