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추 심는 날. 선생님의 지도 아래 고산산촌유학센터의 아이들이 고추를 심고 지지대를 세우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에서 농사짓기는 아이들의 일상이자 자연과 함께하는 수업이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한 끼를 먹을 수 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먹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혹시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에게 물고기를 직접 잡아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갑갑한 굴레를 벗어나 ‘산촌 유학’을 통해 그 해답을 찾으려는 부모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를 감수하고서라도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내는 많은 이들과 달리 산촌 유학 부모들은 시골로, 산골로 유학을 보냅니다. 그저 한두 달 시골 생활을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짜 시골 아이가 되어 작은 학교를 다니며 한 한기 이상, 몇 년씩 그곳에서 생활합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산촌 유학이 30년 넘은 역사를 지닌 교육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 문부과학성 산하 재단법인인 소다테루카이(아이들을 키우는 모임)가 1976년 나가노 현의 야사카 마을에서 처음으로 산촌 유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방학 기간 동안 자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데서 비롯되었다지요. 그런데 매년 참가자들이 늘고 관심이 뜨거워지자 1976년 4월 초・중학생 아홉 명이 일 년 동안 아예 야사카 마을에 전학을 와서 살 수 있도록 추진한 것이 오늘날 산촌 유학이라는 새로운 교육의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자연 속에 뛰노는 즐거움을 맛본 아이들은 “엄마, 도쿄는 싫어요. 친구들은 게임만 하고, 야사카에서처럼 다 같이 놀 수가 없어요. 1년만 더! 6학년까지 있고 싶어요!”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일본의 산촌 유학은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도시 아이들에게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선사하고, 점차 인구가 줄어드는 농촌과 산촌, 어촌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활기를 선사했습니다. 일본 산촌 유학은 그 뒤로도 계속 진화하며 2005년 기준으로 전국 1백51개 지자체에서 연평균 5백~8백 명의 산촌 유학생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2007년부터 도시에서 농촌으로 귀농한 이들을 중심으로 우리식 산촌 유학의 새로운 길 찾기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그중 전북 고산산촌유학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센터형 산촌 유학을 시작한 곳입니다. <행복>에서 고산산촌유학센터 아이들의 산촌 생활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또한 용기 있게 이곳에 아이를 1년째 유학 보내고 있는 학부모를 만나 산촌 유학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얘기도 들어봤습니다. 경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아이들을 내모느라 정작 중요한 걸 잠시 잊고 있던 우리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한 자락의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빛 고운 페인트칠 담장과 대문이 아이들을 반겨주는 고산산촌유학센터 입구.
2 봉동초등학교 양화분교의 1학년생들이다.
3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고산산촌유학센터 아이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산촌 유학 보낸 한지원 씨
꼴찌여도 괜찮아, 개구쟁이여도 괜찮아
도시에서는 컴퓨터를 친구 삼아 놀던 아들 선홍이에게 산과 개울이라는 좋은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었던 한지원 씨. 산촌 유학을 보낸 1년 후 선홍이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엄마 한지원 씨에게서 산촌 유학에 대한 조언을 들어본다.
산촌 유학? 교육 1번지라는 강남도 아니고, 해외도 아닌 산촌으로 유학을 간다? 좀 더 나은 환경의 학교를 찾아 해외 유학 보낼 결심을 하는 이 땅의 많은 학부모들에게 산촌 유학은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은 가도, 거꾸로 서울에서 시골로, 도시에서 산촌으로 유학을 간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선홍이를 전북 고산으로 유학 보낸 한지원 씨 역시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 4학년 여름방학 때 고산산촌유학센터의 단기 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지난 가을 학기부터 어느덧 1년간의 산촌 유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겠지만,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행복한 길일까, 늘 고민했어요.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아이가 원하는 걸 흔쾌히 들어주지 못했거나 부정부터 해버린 일이더라고요. 한창 뛰놀고 싶어하는 나이인데 공부만 강요하거나 억지로 학원을 보내고 싶진 않았어요.”
한지원 씨는 공동 육아나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은 시누이에게 교육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서 자연스레 산촌 유학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되었다. 고산으로 유학 가기 전까지 선홍이는 서울 미동초등학교에 다녔었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데다 숱한 인재들을 배출한, 교육열 높기로는 강남 못지않은 학교다. 선홍이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산촌 유학을 떠난 아이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전 학교 생활에 문제나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선홍이는 주장이 강하고 예민한 편이에요. 친구들과 싸워도 속으로 묻어두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물론 ‘요즘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친구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교감하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놀아야 하고, 또 혼자보다 여럿이 어울려 놀 줄 알아야 하는데, 선홍이가 좋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환경은 산촌이 낫겠다 싶더군요.”
4 5학년 교실. 한 반 인원이 채 열 명도 안 될 만큼 적어서 선생님과 일대일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5 이곳에서는 학교 종이 수업 시간을 알린다.
6 수업이 끝나자 교실에서 뛰어나오는 아이들. 함께 모여서 센터로 향하는 길은 늘 즐겁다.
7, 8 추억과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학교 운동장, 교실.
철저한 사전 조사와 단기 캠프 체험은 필수 산촌 유학을 보내기로 마음이 기울자, 우선 여름방학 동안 단기 캠프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했고, 아이의 의견을 물어 결국 학교까지 전학을 하는 장기 산촌 유학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됐다. 선홍이가 생활하는 고산산촌유학센터는 열 명 이상의 학생들이 기숙하는 ‘센터형’ 산촌 유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열한 명의 아이들이 일곱 명의 선생님(아이들은 센터 선생님을 삼촌, 이모라고 부른다)과 자원봉사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먹고 자며 생태 체험을 하고 있다. 아토피가 심해서, 따돌림을 당해서, 너무 산만해서, 시골이 좋아서… 이곳을 찾은 아이들의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학교는 0~30분 걸어서 봉동초등학교 양화분교를 다닌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23명이 전부인 작은 학교다. 이곳에 고산산촌유학센터가 들어서기 직전까진 전북 지역 폐교 1순위 학교로 꼽힐 만큼 존폐 자체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늘어난 유학생 덕분에 작은 학교에 활기가 넘친다. 무엇보다 지역 아이들은 유학생들 덕분에 제대로 된 팀을 짜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즐겁다. 학교도 고산산촌유학센터와 뜻을 같이하며 국악, 만화, 연극, 사물놀이, 영어 등 다양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비롯해, 개천과 산에 서식하는 생물 관찰 일기 쓰기, 고구마 가꾸기 등 직접 체험하는 생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 산촌 유학의 유형은 산촌유학 센터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지역 학교에 통학하는 ‘센터형’과 뜻 있는 농가 주민이 홈스테이 형식으로 아이를 돌봐주는 ‘농가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지원 씨의 경우엔 여러 아이들과 공동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센터형을 원했고, 여러 센터 중에서도 요가, 명상 프로그램까지 갖춘 고산산촌유학센터가 아이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막상 산촌 유학을 보내려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떤 곳을 선택해야 할지 또다시 깊이 고민하고 알아봐야 합니다. 저는 산촌유학전국협의회에서 주최한 설명회에 참여한 게 도움이 되었어요. 각 산촌유학센터의 장단점을 비교해보고 아이의 성향에 맞는 곳을 찾았지요. 대부분의 산촌유학센터에서 방학이나 연휴를 이용해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의 단기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데, 단기 프로그램을 체험해보고 아이가 흥미로워한다면 그때 장기 유학에 도전하는 게 좋죠.” 아이가 소중한 유년 시절을 추억할 곳이기에 부모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아이를 믿고 기다려라 하지만 이제 겨우 열두 살.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는 아닐까?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선홍이가 서울 집으로 오거나 가족이 고산산촌유학센터로 내려가 하루 이틀 함께 지내는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부모가 아이와 24시간 붙어 있다고 해서 아이의 모든 걸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서울에서는 한 반에 30명 정도인데, 지금 선홍이가 다니는 학교는 열 명이 한 반이면서 5학년 전체예요. 선홍이가 우스갯소리로 자긴 꼴찌를 해도 반에서 10등이라데요. 학생수가 적다 보니 선생님과의 수업도 일대일 과외 수준이고, 센터에서도 담당 선생님께서 부모보다 더 객관적인 눈으로 아이를 살펴주니 마음 놓을 수 있어요.” 자식을 너무 품에 끼고 살면 오히려 눈 뜬 장님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면, 부모도 한 발자국 떨어져 아이의 본성을 냉철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왼쪽) 아들 선홍이를 1년째 산촌 유학에 보낸 한지원 씨. 아이가 한 뼘 성장하는 동안 부모는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생활보다는 ‘산촌 유학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산촌 유학 이후의 시간이 더 많이 걱정됐다고. 그 문제는 지금도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다.
“아이는 산촌 유학 생활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 서울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반반인 것 같아요. 여기도 좋고, 거기도 좋은 거죠. 서울에 오면 센터 친구들이랑 고기잡이하고 장난치고 싶어서 빨리 센터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고, 센터에 있으면 컴퓨터 하고 싶은 생각에 근질근질하다 그러고요. 어쨌든 지금이야 선홍이가 산촌 유학 생활을 즐기는 것 같아 안심인데, 혹시라도 나중에 커서 ‘우리 부모는 왜 나를 그런 시골로 보냈을까’ 그런 원망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때도 있죠.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이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질 때 드는 부모의 욕심인 거죠. 산촌 유학을 통해 우리 아이가 완전히 달라질 거라든지, 나중에 크게 성공할 거라든지 하는 기대치가 크면 클수록 산촌 유학을 보내는 것이 두렵겠죠. 실제로 산촌 유학을 보낸 학부모 중에는 너무 큰 기대를 했다가 오히려 그것이 아이를 힘들게 하는 경우를 본 적도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환상이 없진 않았지만, 일본의 산촌 유학 사례를 다룬 책 <산촌 유학>을 읽고 나서 그 마음을 접었죠. 그 책을 보면 산촌 유학을 경험한 일본의 아이들도 20년이 지난 후 모두 평범하게 자라 있었어요. 다만 산촌 유학을 경험했던 아이들은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죠. 저도 선홍이가 훗날 ‘엄마가 해준 일 중에서 산촌 유학이 가장 좋았어요’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순간이 아이의 인생에서 좋은 추억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아이가 빠른 시간 안에 변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조급증이 산촌 유학을 망칠 수도 있다. 아무리 자연을 장난감 삼아 놀고, 땅을 일구고 작물을 가꾸는 생활에 익숙해진다 해도, 틈이 나면 PC방에 가고 싶어 하는 개구쟁이들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산촌 유학을 보낸 부모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래서 고산산촌유학센터에서는 정기적으로 학부모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아이를 멀리 유학 보냈다고 해서 부모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주에도 한지연 씨는 온 가족과 함께 고산으로 내려가 운동회에 참여했다. 서울 학교에서의 운동회였다면 기껏 한두 번 뛸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곳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가족과 함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비용도 고려해봐야 한다. 아직까지 산촌 유학이 보편화된 제도가 아니고, 사회의 지원이 뒷받침되는 것도 아니어서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지원 씨의 경우 선홍이의 산촌 유학 생활비로 한 달에 69만 원을 지불하고 있다. 학부모 처지에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지만,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지도하는 센터 입장에서 보자면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금액도 아닌 것이다. 다행인 것은 점차 지역자치단체의 지원이 활발해지고 있어 비용이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하고 부담스러운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한지원 씨가 선홍이를 산촌 유학 보내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 있다. 서울에서와 달리 선홍이가 학교 가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할 때다. 늘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어 하던 선홍이에게 작은 학교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기를 살려주었다.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는 훌쩍 자란 아들의 의젓한 모습이 담겨 있다. 검게 그을려 이제는 ‘촌놈’이 다 된 선홍이를 바라보며 엄마 한지원 씨는 이렇게 속삭인다. “꼴찌여도 괜찮아. 개구쟁이여도 괜찮아.” 다만 지금 그곳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이 선홍이 인생에 기름진 흙이 되기를 엄마는 바랄 뿐이다.
1 아이들이 가꾸는 개인 텃밭. 좋아하는 채소를 심고 이름을 적은 푯말을 자랑스럽게 세워두었다.
2, 3 농사를 통해 아이들은 노동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4 직접 키우는 염소, 개, 닭은 소중한 친구다.
5 저수지에서 고기도 잡고 물놀이도 신나게 한판 하는 아이들. 건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6 고산산촌유학센터의 조태경 선생님과 다슬기 잡기 놀이 중이다.
7 물고기 잡으러 가는 길. 길가의 풀과 꽃도 모두 재미난 장난감이다.
8 아이들이 생활하는 황토 방은 센터 선생님과 아이들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