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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미술가와 가족 사랑의 굴레인가, 창작의 원동력인가
일반적으로 모성과 창작 활동은 매우 대조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엄마인 동시에 미술가가 될 수 없다는 전근대적인 통념 때문이다. 여성 미술가들은 어떻게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살면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을까?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가 루이즈 부르주아, 메리 캐사트, 프리다 칼로를 초대해 가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부엌과 아틀리에 사이를 분주히 오간 세 여자의 ‘예술적인 수다’가 시작된다.

1 메리 캐사트,‘엄마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아기 No 3’, 1900
2 메리 캐사트, ‘거울’, 1905


메리 캐사트 Mary Cassatt
1844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부호의 딸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드가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중산층 가정의 정경을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로 그려냈다. 인상주의를 미국에 소개하는 데 주력, 일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1926년 사망했다.

모성과 예술, 마주 보게 할 수 있는가?
유경희 미켈란젤로는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는 질문에“나에겐 끊임없이 나를 들볶아대는 예술이라는 마누라가 있고, 내가 남긴 작품이 내 자식이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여성 미술가들 역시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요. 예를 들면 조지아 오키프, 프리다 칼로 그리고 메리 캐사트, 리 크래스너(잭슨 폴록의 부인) 등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 미술가가 많았지요. 이들 중 메리 캐사트는 독신이었는데도 대부분의 그림이 여성과 아이를 소재로 한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메리 캐사트 나는 부유한 상류사회 가정에서 일곱 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어요. 당시로선 여자가 미술대학에 가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아버지의 반대는 미술을 선택한 순간부터 화가로 활동하는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반대 속에서 저항하듯 그림을 그렸지요. 당시로선 드물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인상주의에 합류하고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난 예술과 결혼 생활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이른 나이에 깨달은 것 같아요.
유경희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거부한 당신이 주로 그린 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의 존재들에 대한 것이잖아요. 특히 평생 동안 추구해온 소재가 엄마와 어린아이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메리 캐사트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여자가 어떻게 모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봐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세요. 미켈란젤로가 죽음에 대한 경험 없이 어떻게 ‘피에타’를 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나요? 어쩌면 미켈란젤로에겐 출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천지창조’에서 남성인 하느님이 손가락을 뻗어 성인 남자를 ‘출산’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경희 당신 작품을 보면 따스하고 온화해 기분이 몽롱해지면서 유년 시절 엄마의 젖을 물고 있던 환상, 엄마 품에 안겨 따스한 욕조에 들어갔던 기억들이 오버랩되어 떠오릅니다. 정말 평화로운 유년의 기억이지요. 그런데 저는 당신 그림 속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준다는 느낌보다는 아이가 어머니를 감싸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메리 캐사트 맞아요.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이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아이, 그러니까 내 분신을 통해 오히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일치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아까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고 온화하고 평화롭게 그릴 수 있냐고 물었죠? 미혼인데 말이죠? 하하하. 혹시 이런 거 아세요. 내가 만약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지고 볶고 살았더라면 내 작품에는 아마 그런 부드러움과 부러움 혹은 관능과 관조의 시선이 녹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실제의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아이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닌, 현실적으로 잘 키워내야 하는 존재잖아요. 아마 나는 내 환상 속의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이상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겁니다.


3 메리 캐사트, ‘책 읽는 가족’, 1901~1905

여성 작가에게도 끈끈한 모성은 있다
유경희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경험을 작업에 투영하기도 하지요. 1970년대의 페미니스트인 메리 켈리는 산후 일지를 쓰고 그것을 미술사적 맥락 안으로 끌어들인 적이 있습니다. 또 앨리스 닐은 20세기에 임신한 여성을 가장 충격적으로 표현한 여성 미술가지요. 그녀가 그린 ‘임신한 마거릿 에번스’는 매우 도전적으로 느껴지던데…. 프리다 칼로, 당신만큼 아이를 낳고 싶었던 예술가도 드물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자신의 유산과 불임에 대한 상처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왜 그렇게 아이를 낳기를 원했나요?
프리다 칼로 나는 여러 차례 임신을 했지만 유산되거나 사산되었어요. 사고가 남긴 끔찍한 후유증 때문만이 아니라 선천적 자궁 기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어요. 우리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거든요. 그리고 나와 내 남자 디에고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제겐 매우 절실한 것이었어요. 화가를 선택할 것인가, 디에고의 사랑을 받는 여자로 남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연코 디에고의 여자로 남는 것을 선택할 겁니다. 그러니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을 절실히 원하는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유경희 그런 당신은 불임을 여자로서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디에고의 불륜과 관련지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통하는 얘기군요. 다시 말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여자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남편이 겉도는 것을 막아준다고 생각했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예술가에겐 너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프리다 칼로 당신은 내 작품을 잘못 이해하고 있나 보군요.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내 작품이 내 삶 속에 근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하지요!

1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 1931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는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 토속 문화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였으며, 멕시코의 국민 화가이자 혁명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였다. 생전에 그린 총 1백43점의 작품 중 55점이 자화상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초상을 통해 불안정한 시대 정황을,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표현했다.


2 프리다 칼로, ‘나의 할아머지, 부모님 그리고 나’, 1936

부모,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어려운 존재
유경희 사실, 저는 여성 예술가와 그들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 작가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남자 친구, 남편, 심지어 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거든요. 루이즈 부르주아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신의 가족사에 관한 것 중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요?
루이즈 부르주아 나는 파리에서 태피스트리를 복원하는 사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어요. 내 나이 11세 때 아버지는 새디 고든이라는 여자를 가정교사로 고용했고, 나보다 겨우 일곱 살 많은 그녀는 아버지의 정부가 되었지요. 새디는 내 가족과 10여 년간 함께 살았고, 어머니와 가족은 그 사실을 알고도 묵과했으며 공공연히 인정하며 지냈죠.
유경희 당신은 그 여자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못 받는다고 생각해, 질투심에 불타고 집안이 묘한 분위기였겠네요.
루이즈 부르주아 무엇보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예요. 당시의 내 역할이란 게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감시자였어요. 엄마는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따라다니도록 한 거죠. 그러니 어린아이가 무엇을 목격했겠어요. 그건 아이를 잘못 키우는 것입니다. 그녀는 내게 영어를 가르치러 왔고, 그녀는 내 거였어요. 난 그녀가 날 좋아하리라 믿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날 배반했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이건 이중의 배반이에요. 적어도 가족 안에서는 게임의 법칙을 지켜야 했어요. 난 오랫동안 그녀의 목을 비틀고 싶었어요.
유경희 당신은 이성적인 어머니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아버지의 양극단을 경험하면서 언니와 남동생의 중간에서 성장했습니다. 제가 알기론, 당신이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유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런데도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해가며 어린아이의 마음에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자책감을 심어주었더군요. 그래서 당신은 오히려 더욱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노력했던 게 아닌가요?
루이즈 부르주아 맞습니다! 내게 아버지란 정말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어요. 아버지가 보여주는 비이성적인 행동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면 어머니는 폭군 남편의 비위를 맞추려고 긴장해 있고, 아버지는 우리를 보면 신경질을 냈고, 우리 남매들은 그런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나 있고, 더군다나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곤 했지요. 나의 모든 작품은 사실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들을 치유하는 메타포로 가득 찬 것이지요.

3 프리다 칼로, ‘유모와 나’, 1937


1 루이즈 부르주아,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6층 트리니티 가든에 설치된 ‘거미’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1911년 파리 태생. 양탄자 수선 사업을 해온 집안에서 8세 때부터 양탄자 도안 그리는 작업을 했다.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으로는 첫 회고전을 가졌다. 197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유경희 당신 작품은 모두 당신의 유년기 심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당신의 최고 대표 작인 ‘거미’는 세계 유명 미술관과 공공 기관 앞에 설치되어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루이즈 부르주아 내 작품 ‘거미’는 바로 내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어머니는 일생 동안 바느질을 해온 여자예요. 마치 거미처럼 집요하고,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이지요. 어머니는 마치 한 마리의 거미처럼 지적이고, 깨끗하고, 인내심 있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분이셨어요. 거미는 어머니처럼 내게 매우 친근하고 절친한 친구인 셈이죠.
유경희 루이즈 부르주아가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애증을 가진 것에 비하면, 프리다 칼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고 돈독했다고 해요. 프리다,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가요?
프리다 칼로 내 아버지는 편협할 정도로 지나친 경건함과 겸손함을 갖춘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악역을 맡는 건 당연한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헝가리계 독일인이자 유태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니시와 인디오의 혼혈이었어요. 그러니 나는 매우 혼종적인 인간이죠. 요즘 말로 하면 가히 ‘글로벌’한 태생이지요. 나의 우주 소녀 같은 무사태평함과 혼혈아의 고뇌는 인디오인 어머니에게서, 예민함과 관능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경희 당신 아버지는 딸 여섯 중 당신을 가장 사랑했다고 하지요? 아버지가 죽은 후 당신이 그린 초상화에서는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던데요. “헝가리계 독일 출신으로 예술가이자 전문 사진사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명석했던 나의 아버지 빌헬름 칼로의 초상이다. 그는 성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60년 동안 간질로 고생하면서도 결코 일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에 맞서 싸웠다. 깊은 애정을 담아. 딸 프리다 칼로.” 참으로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어본 것처럼 가족이란 예술가에게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예술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이고, 가족에게 받는 위로가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예전에 루이즈 부르주아가 인터뷰 때 한 말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예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자,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든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말 아니겠습니까?

2 루이즈 부르주아, ‘히스테리컬’, 2001


글을 쓴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는 시각예술과 정신분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학과 예술론을, 문화센터에서는 대중을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와 뮤즈><테마가 있는 미술 여행><예술, 인문학과 통하다>(공저) 등이 있다.

황여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