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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아들 원혜영이 추억하는 어머니 지명희 여사 내 어머니, 풀처럼 나무처럼 푸른
우리나라 생명 운동의 역사를 이끈 풀무원 공동체의 원경선 옹 뒤에는 든든한 지지자요 조력자였던 아내 지명희 여사가 있었다. 그는 원경선 옹과 함께 유기농과 유기농산물이라는 ‘복음’을 한국 땅에서 처음 실천하며 사람을 살리는 농사로 한평생을 살았다. 또 남편을 ‘아름다운 농부’로 만든 ‘부드러운 힘’의 아내, 7남매를 편견 없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도록 키워낸 어머니였다. 올 2월 세상을 뜬 그의 삶을 장남인 원혜영 민주당 원내 대표가 추억한다.


원혜영 민주당 원내 대표의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그의 아버지, 어머니는 7남매의 학창 시절에도 포도밭 일이나 농장 청소 등을 돕게 하고 일한 만큼의 보수로 책을 사줬다. 그 바람에 모두 책벌레가 됐다고 아들은 추억한다.

봄비에 돌연 꽃이 소리도 없이 지고 말았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세상 살아가다 소나기라도 맞는 날이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우산을 들고 서 계신 어머니를 만난다.
내 어머니 지명희 여사. 이 고랑 저 고랑, 질척한 밭고랑을 오가며 아흔두 해를 넘으신 어머니. 밝은 날이면 밭에 나가, 해 지면 공동체 식구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뙤약볕에 더운 것도, 달 뜨는 줄도 모르시고 평생을 보내셨다. 8남매 낳고 산후조리할 때 잠깐 쉰 것 말고는 새벽 5시부터 자기 전까지 관절 연골이 닳아 없어지도록 일해온 어머니는 그래도 큰 병 없이 무탈했다. 그게 다 사람 살리는 농사 덕분이라고 하셨다. 내 어머니, 아흔 살이 넘어서도 풀처럼 나무처럼 푸르렀다.
내 아버지 원경선 옹이 1955년 풀무원 농장을 세우고 고아, 거지와 함께 사는 풀무원 공동체를 꾸리기까지, 1976년 화학 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시작하면서 정농회(말 그대로 바른 농사를 지향하는 공동체)를 만들기까지, 1960년부터 거창고등학교(공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한 실질적인 대안학교) 이사장을 맡아 참교육을 실천하기까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고문으로, 환경개발센터 이사장으로 일하며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기까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이사로 있으면서 어려운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기까지… 내 어머니는 남편을 ‘각성한 농부’ ‘계몽하는 농부’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로 성장시킨 아내였다.

“여성이 남성을 끌어안는다”라는 성경 구절을 새기며 배화여고보(배화여고의 전신)를 나와 명동에서 타이피스트(당시 최고의 인기 직업)로 일하던 인텔리 여성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후 새벽엔 우유 배달부, 낮에는 목부로 일하는 청년을 마음에 두었다. 학벌, 신분, 재력, 직업 따위보다는 ‘그 사람’을 들여다볼 줄 알았던 어머니는 그야말로 깨어 있는 신여성이었다. 딸의 마음에 있는 청년을 외할머니가 찾아가 중매를 서고, 두 선남선녀는 ‘저어기, 청와대 뒤 어디 조용한 길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평생 남을 위해 살려는 사람과 살아갈 자신이 있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신을 선택한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평범한 말씀이 두 사람을 이어준 끈이었다고 한다. 그 후 70년 동안 두 분은 앞서 걸어가는 사람으로 세상의 ‘지도’를 만들며 살았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과 ‘소유’ 대신 ‘나눔’을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을 주창해온 ‘인간 상록수’ 원경선 뒤에는 ‘푸른 여성’ 지명희가 있었다.
두 분은 옥돌 같은 7남매(내 위로 있던 형님 한 분이 전쟁통에 전염병으로 죽었다)를 거리의 고아, 범죄자, 부랑아와 함께 키웠다.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 살자’는 철학으로,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였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한다는 게 아버지의 철학이자 공동체의 철학이었고, 어머니는 그 뜻을 조용히 따랐다. 공동체 식구들은 다들 지독히 일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쌀이 없어 밀기울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날이 허다했는데, 어머니는 건더기는 공동체 식구들과 자식들에게 먹이고 만삭의 자신은 국물만 드셨다. 그렇게 거친 풀더미 같은 세월이었지만 빠짐없이 ‘함께’였으므로, 괜찮았다. 우리 7남매가 ‘이상한 옷 입은 애들’이라고 학교에서 놀림받아도(미국 자선단체의 구호품 중에 여기저기 나누어주고 그나마 남은 옷들을 적당히 뒤섞어 입었다), 강원도 가서 매일 매일 감자밥만 먹고 살아도 좋으니까 ‘오직 우리만의 아버지, 오직 우리만의 어머니’와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딱 한 번 철없이 생각하긴 했어도, 우린 공동체 식구들과 빠짐없이 ‘함께’였다.
1976년 풀무원 공동체가 경기도 양주 땅으로 옮겨 오면서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 살자’는 ‘함께 일해서 함께 먹고 함께 나누자’로 발전했다. 다음 해 수확할 때까지 최소한의 먹을거리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우리보다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눠주자는 철학, ‘배워서 남 주고, 일해서 남 주자’는 그 철학을 수십 년 동안 지키며 살았다. 우리는 이런 아버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배움을 얻었고, 그 나눔의 삼투압은 자식들 가슴에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가난한 목숨들이 죄다 당신의 피붙이인 ‘전지적 따뜻함’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이웃이 불행하면 너와 나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그 믿음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모 그룹 회장이 고학생 시절 풀무원 공동체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간 일이 있다. 누추한 차림새의 청년에게 어머니는 새로 빨아 시렁 위에 잘 개켜둔 이불을 내어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나중에 그 사람이 큰 그룹의 회장이 됐을 때 제일 먼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와 그 이야기를 하며 큰절을 올렸단다.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품어 안았던 내 어머니. 단구인 채 키가 큰 사람, 작은 몸인 채 품이 큰 사람이었다. 7남매가 이만큼이라도 썩지 않고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한 내 어머니 지명희 여사.


고된 밭일 하며, 공동체 식구들 챙기며 평생을 보낸 지명희 여사, 원경선 옹. 거친 농사일에도 그들은 고운 피부에 웃는 얼굴이 생생했다. 그게 다 화학 비료나 농약 기운 없는 건강한 흙을 만지고 살아서라고 했다.

보다 생생하게, 보다 가파르게 어머니 손은 늘 묵은 밭 같았고, 몸은 물 빠진 모래밭처럼 마르셨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반달같이 고왔던 어머니. 평생 농사일을 해온 데다 화장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피부가 고운 것은 모두 이 현미밥, 무공해 작물 때문이라며 자랑하셨다. 농약에, 화학 비료에, 제초제에, 마구 뿌려대는 농사는 간접 살인이요, 자멸 행위라고 깨달은 아버지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농사를 짓기 위해 1976년 정농회를 만들고, 유기농법을 시작했다. 시행착오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큰 시련을 겪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여전히 따랐다. 그렇게 건강한 마음으로 만든 밥이, 고구마순이, 솎음배추가… 살과 피와 뼈로, 그리고 차진 생각과 마음으로 변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풀무원 사상’은 밥에서 나와 밥으로 실천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농사지어 얻은 건강한 현미밥을 끼니 때마다 지루한 줄 모르고 소중하게 씹던 어머니. ‘현미밥은 나이만큼 씹는 것’이라며 “이 일을 어째. 그 말대로라면 밥 한 숟갈을 아흔 번 가까이 씹어야 할 터인데, 세때를 그렇게 먹자면 우리 내외가 식당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하하호호” 하셨던 어머니.
그렇게 생생하게 산 삶이었어도, 아침이면 혼자 산을 내다보며 남몰래 몸이 찢어진 세월이 어머니에게 왜 없었을까. 주일 아침마다 수십 명 공동체 식구들의 빨래를 도맡아 하느라 분주한 어머니를 두고 공동체의 한 식구가 ‘사모님 때문에 예배가 매일 늦어진다’고 푸념하자, 어머니는 골방에 혼자 숨어 눈물지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주름 깊은 손으로 기도하시더란다. 다시 방 밖으로 나서면 한 번 찡그리는 법도 없이 달처럼 곱게 웃으시던 내 어머니.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뭐 지금도 당신은 그런 큰 스케일 가지고 얘기하고 그러지. 나는 뭐 일만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니까, 만족하니까 감지덕지지. 하나 불평이 없었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늘 이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도 훗날 어머니를 두고 “내 안식구의 100% 협조 속에 풀무원 농장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일에 반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시곤 했다.

담담하고 담대하게 살다 가신 어머니는 올 2월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한 이틀 누워 계시다가 덜컥 가버리셨다. 큰 고생 안 하시고 가신 게 복이라고, 잘 살아서 잘 가신 거라고 문상 온 이들이 입을 모았다. 어머니 가신 후 살피니 변변한 유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늙어갈수록 지구에서 격리되지 않으려 점점 더 집착하고 쌓아두게 된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기 몫의 소유라는 게 없으셨다. 그 시절 여염집 아낙들의 가보 1호였던 브라보 미싱 하나 가지지 않으셨다. ‘소유’보다 ‘나눔’을 이야기하는 공동체의 안주인답게 사셨던 것이다. 아버지도 농장과 농장 내의 모든 재산을 훌훌 털어 공익재단인 한삶회에 내놓으시고 스스로 무산자임을 선언했다. 두 어른의 뜻을 따라 우리 7남매는 모친상 조의금(장례 비용을 제외한 전액)을 환경정의연대, 북한 학생 국제화 교육, 부천육영재단, 국제기아대책기구 등에 기부했다.
물욕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평생 한 번도 헛된 소원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살아가셨다. 내가 학생 운동 하다 네 번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대 끌려가 최전방에서 소총수 할 때도, 민주화 운동 하다 두 번 감옥에 갈 때도 어머니는 “야, 이놈아, 그러지 말아라. 부모 생각 좀 해라” 하신 적이 없다. 다만 “조심해라, 건강해라” 하거나, 그조차도 말씀 안 하고 그저 담담하게 맞아주고 보내주던 분이었다. 감옥살이할 때도 ‘아들이 확신을 가지고 떳떳하게 한 일로 그렇게 들어갔으니까 뭐 차라리 마음 편하다’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만나고 오면 별말씀 들은 것도 없는데도 잔뜩 헝클어진 심사도 잘 빨아낸 옥양목처럼 변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의 힘이 좋은 분이었다.
집 밖에 세워둔 장난감 같은 전기 스쿠터만 어머니를 추억하고 있다. 자식들이 이 녀석마저 사드리지 않았더라면, 무릎의 ‘윤활유’를 풀무원 농장에 다 바쳐 마당 출입조차 어려워하셨을 것이다. 어머니 가신 후 아버지는 ‘공허하다’는 혼잣말을 자주 하신다. 아흔 살 넘은 남편을 보고도 “옛날 사진 보면 참 미남자였어…. 지 눈에 도깨빈가?” 하시던 아내가 왜 그립지 않으실까. 갑자기 눈물짓는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내게도 그리움이 밀려와 자꾸 목젖이 갈라진다. 창밖엔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햇빛이 쨍쨍하다. 나는 큰숨 한번 쉬고 어머니 사진을 꺼내본다. 우리 어머니, 박꽃처럼 참 고우시다.

(위) 지명희 여사가 배화여고보 시절 수놓아 만든 것으로, 한반도의 큰 맥마다 무궁화꽃이 수놓여 있다. 평생 ‘소유’ 대신 ‘나눔’을 생각한 지명희 여사의 거의 유일한 유품이다

풀무원농장과 풀무원식품은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풀무원농장은 1955년 원경선 옹이 전쟁 고아, 불량배 등을 모아 만든 공동체다. 풀무원식품은 장남 원혜영 씨가 ‘풀무원 공동체’의 철학을 이어받아 1981년에 연 유기농 생산물 판매점이었다. 그 판매점이 1984년 ㈜풀무원식품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가면 풀무원식품에서 운영하는 유기농장과 원경선 옹이 이끄는 ‘평화원’ 공동체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구술 정리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