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김정수의 뇌리에 남았던 진달래는 청년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는 동안 잠시 희미해졌다. 1980년대 초반 정치적으로 암담하던 시절, 혈기 넘치던 그도 과격하고 전위적인 설치 작품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에 왔다가 종로에서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하는 김수희의 노래 ‘애모’를 들었다. 울컥했다.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 그를 세상에 내놓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솟았다. 난데없이 사레들려 심한 기침이 나듯, 꽃가루에 재채기가 나듯, 참을 수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중년에 접어든 화가는 파리로 돌아가 한동안 붓을 잡을 수 없었다. “도자기나 기와지붕처럼 한국 문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소재 말고, 한국인의 가슴을 밑바닥부터 울릴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기억을 달려 그는 진달래를 찾아냈다.
이후 10년 동안 진달래 작품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 장의 캔버스를 버렸다. 진달래가 가장 예쁘게 피었을 때의 색을 묘사하기까지 전국을 헤맸다. “진달래를 관찰하려고 몇 년 동안 봄만 되면 강원도, 전라도, 강화도 등 외진 시골로 내려가 작업실을 얻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보길도에서 설악산까지 진달래 길을 따라 걷기도 했고, 직접 꽃을 한 송이씩 따서 대바구니에 소복이 담아보기를 반복했습니다.”

진달래 꽃잎은 도심의 하늘에서 나붓나붓 흩날리고, 강화도 마니산 초입의 마을에서 꽃비처럼 내리고, 개울가 징검다리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진달래는, 어미의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자식의 입시 합격을, 취업을, 건강을 소망하는 어미의 마음이 애잔한 파동으로 울려오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나 풍족하다. 김정수 씨는 풍요 속에서 잊혀진 모정을 불러낸다. 그의 작품은 보는 것만으로도 모정이 가슴을 저민다. 그래서 한 보시기의 진달래는, 어머니의 부적이다. 
(오른쪽) ‘축복’, 김정수,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