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다. 일하지 않고는 먹고살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실직은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위협보다 심리적인 상해가 실직자를 더욱 파괴적으로 뒤흔든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같은 정신적 고통을 낳고, 이는 자칫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연구에 따르면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닥칠 때마다 자살률이 20%나 증가한다고 한다. 더구나 실직 문제는 가장 한 사람의 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를 남편 또는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인 사건이다. 그렇지만 실직으로 벌어지는 상황은 바꿀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시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면, 그만큼 앞서 나갈 수 있다.
가장을 위한 심리 처방 C씨는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받고 멍하니 며칠을 보냈다. 가족에게 미안하고 친구들 보기에 창피해서 실직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보름이나 흘렀다. 자살을 생각했다. 한강 다리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용기가 없어 뛰어내리지 못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는 동안 3년 전 자궁경부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아내가 떠올랐다. 그 고통을 생각하니 지금은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 앞에 선 아내에게는 시간이 없었지만, 자신에겐 한참 더 달릴 수 있는 날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처방전 1 상처 입은 자존심이 고통의 주범임을 인정하라 실직한 가장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존심에 난 상처다. ‘하필 내가’ 실직당했다는 생각이 마음을 할퀸다. 가족들의 시선도 따갑다. 특히 남자는 자식 앞에서 강하고 멋져 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기에, 실직하면 덫에 걸려 어찌할 바 모르는 들짐승 같은 처지가 된다. 분노하거나 자책하기 전에 고통의 원인을 보라. 육신이 아닌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이다.
처방전 2 자존심 문제는 자존심으로 해결하라 상처 받은 자존심은 자존심으로 치유하자. ‘회사가 나를 잘라서’ 자존심 상한다면, ‘세상은 나를 자를 수 없다’는 자존심을 또 하나 세우라.
처방전 3 실직의 ‘고통 지수’를 엄격하게 파악하라 가족의 죽음에 따른 스트레스를 100점으로 잡을 때, 해고는 45점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면 실직을 견뎌낼 자신이 생길 것이다.
처방전 4 조급증을 버리고 느리게 가는 시간을 즐겨라 실직 가장들이 겪는 공통된 심리 상태 중 하나는 조급증이다. 상대적으로 실직한 가장에게는 시간이 더디다. 하지만 그 시간을 여유로 본다면, 재기의 시간은 더 빨리 올 것이다. 명상과 운동이 재기의 바탕이 될 것이다.
아내를 위한 심리 처방 H씨는 아이들이 인생의 전부였고, 남편은 그녀의 인생을 지지하는 대들보였다. 그런 남편이 실직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지 않기 시작한 초기 몇 주간은 그나마 역설적인 행복이 있었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고나 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불안해졌다. 친정과 시댁에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이들 학원 줄이는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 저축한 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방전 1 경쟁력 없는 ‘옛날 여자’에서 벗어나라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경쟁력 없는 ‘옛날 여자’에서 벗어나라. 물론 엄마의 역할이나 모성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고집해온 고루한 생각을 바꾸라는 것뿐이다. 취업에도 도전하고, 아이를 쥐락펴락하겠다는 욕심도 버리자. 아내가 뛰는 모습을 보면 절망적이던 남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것도 싫은 남편은 때론 아내의 빈자리를 메워가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처방전 2 평생을 함께할 믿음을 쌓는 기회로 삼아라 이때야말로 남편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어야 할 때다. 역설적이게도 부부는 고난을 함께 겪을 때 평생을 함께할 단단한 믿음을 쌓을 수 있다. 한편 아내가 경제 주체가 되는 역할 변화가 심적으로 힘겨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처방전 3 대신 ‘원더우먼’을 욕심내진 마라 집안일과 바깥일을 모두v잘하는 ‘원더우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집안일에 조금 소홀해져도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자. 당신마저 쓰러지면 가장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 하루에 1시간 또는 일주일에 한나절 정도는 집 안팎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길을 뚫고 나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자녀를 위한 심리 처방 학교를 그만둔다고 가출했던 J군. 아버지가 실직하기 이전에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어느 날 찾아온 불행에 처음에는 담담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변했다. 처음에는 우리 집에 왜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하는 생각으로 화가 나다가, 다음에는 아버지가 미워지더니, 곧 그 미움은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분노와 미움과 죄책감이 뒤엉키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어떤 노력도 현재의 상황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뭐 해!’하며 자포자기했다.
처방전 1 청소년기 우울증이 아닐지 살펴보자 J군의 경우 청소년기 우울증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반항을 하거나, 성적이 떨어지거나, 비행을 저지르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아버지의 실직은 엄청난 사건이므로 쉽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처방전 2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현실을 인정하자 이제는 과거와 다른 상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 아이들에게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자.
처방전 3 부모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이들이 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때 부모가 인내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 바뀌는 과정에서 고통스럽더라도 인내하자. 아이들에게는 그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 반드시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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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씨는 ‘중년의 위기’와 ‘여성 심리’ 전문가다. 고려제일정신과 원장으로 일하며 겪은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마흔의 심리학>(공저), <심리학 초콜릿> 등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