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색으로 표백 혹은 탈색된 서랍장. 단단해야 할 서랍장은 만져도 만져지지 않을 듯 아른아른하게 그렸다. 서양화가 정지현 씨의 2월호 표지 작품 ‘부드러운 서랍장’은 앤티크 스타일 서랍장의 복잡한 표면 굴곡을 섬세하게 표현했으면서도 그림자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서랍장을 열었더니 난데없이 새빨갛고 울퉁불퉁한 선인장이 튀어나온다. 존재감이 강해서 시선이 단번에 꽂힌다. “서랍장은 부드러운 제 몸, 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에 따가운 선인장이 닿을 때의 섬뜩함, 혹은 내면에서 뭔가가 돋아날 때의 느낌을 그렸습니다.”
장흥 아틀리에로 출근해 매일 낮부터 동트기 직전인 새벽 4~5시까지 커다란 캔버스에 가시를 심고 꽃을 피워내는 정지현 씨. 그의 붓 터치는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사물의 표면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는 듯 섬세하다. 따끔따끔, 폭신폭신, 오돌토돌할 것 같은 그림. 피부에 닿을 듯 생생해서 어떤 관람객은 ‘불쾌하다’는 반응도 보였다는 그림. “어떤 사물에 대한 ‘이끌림’이 제 영감의 발단입니다. 길을 가다가 선인장을 봤을 때도 이끌렸지요. 대개 그림 그리는 사람은 형태를 보고 시각적으로 끌리곤 하는데, 저는 공감각적으로 매료되는 것 같아요. 시각뿐 아니라 촉각적으로, 때론 후각적으로 반응해요.” 촉각은 뭔가를 더듬는 감각이기에 자극을 받아들이고 환경에 반응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는 세계와 자신의 관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촉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단다.
(왼쪽) 화가 정지현 씨 뒤로 보이는 작품 ‘피어나다’(2008)는 지난 <사막 정원> 전시 에 출품한 ‘얼룩지다, 스며들다’ 시리즈 중 하나다.
한데 이 작품은 어느 때, 어느 곳을 묘사한 것일까? 아리송하다. 서랍장은 음영도 없는 흰 공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상하좌우가 사라져버리고 시간의 흐름도 끊긴 진공 상태 같다. 이때 선인장은 붉은 가시를 뻗으며 이 정적을 깨고 나온다. “사물이 영원히 쉬고 있는, 마치 노스탤지어 같은 진공 상태를 그렸어요. 하지만 사실 이런 상태는 세상에 없어요. 그래서 붉은 가시가 돋고 곰팡이가 핀 그림을 등장시켰어요. 멈춘 시간을 깨트려서 영원한 노스텔지어는 허구임을 말하려고요.”
만지면 검붉은 색소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처연한 꽃잎, 손가락을 대면 예리한 가시가 고통도 없이 쑥 들어박힐 것 같은 고운 선인장, 입술 벌린 야생 동물 같은 묘한 변종 꽃…. 정지현 씨의 연작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모순을 주제로 삼았다. 이 주제로 한참 고민하다가 문득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없는 변종 식물을 창조하지 않더라도 방에 늘 놓여 있는 친근한 서랍장을 통해 이중성을 묘사했다. “이들은 부드러우나 날카롭고, 편안하지만 불길하고, 아름답지만 불편한 것들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저는 영원성과 유한성 사이의 괴리를 그렸습니다.” 선인장 가시에 손을 대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의 무상함을 깨닫지 않을까? 작업이 안 풀리면 속이 쓰려서 한동안 딴짓을 해야 한다는 그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한다. 아름다움, 바로 세상 모든 인간이 살아내는 ‘삶’을 그리기 위해서. 
* 2월호 ‘표지가 궁금해요’ 칼럼은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02-720-5789)의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11월에 정지현 작가의 개인전 <사막 정원>이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열렸습니다.
장흥 아틀리에로 출근해 매일 낮부터 동트기 직전인 새벽 4~5시까지 커다란 캔버스에 가시를 심고 꽃을 피워내는 정지현 씨. 그의 붓 터치는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사물의 표면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는 듯 섬세하다. 따끔따끔, 폭신폭신, 오돌토돌할 것 같은 그림. 피부에 닿을 듯 생생해서 어떤 관람객은 ‘불쾌하다’는 반응도 보였다는 그림. “어떤 사물에 대한 ‘이끌림’이 제 영감의 발단입니다. 길을 가다가 선인장을 봤을 때도 이끌렸지요. 대개 그림 그리는 사람은 형태를 보고 시각적으로 끌리곤 하는데, 저는 공감각적으로 매료되는 것 같아요. 시각뿐 아니라 촉각적으로, 때론 후각적으로 반응해요.” 촉각은 뭔가를 더듬는 감각이기에 자극을 받아들이고 환경에 반응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는 세계와 자신의 관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촉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단다.
(왼쪽) 화가 정지현 씨 뒤로 보이는 작품 ‘피어나다’(2008)는 지난 <사막 정원> 전시 에 출품한 ‘얼룩지다, 스며들다’ 시리즈 중 하나다.
한데 이 작품은 어느 때, 어느 곳을 묘사한 것일까? 아리송하다. 서랍장은 음영도 없는 흰 공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상하좌우가 사라져버리고 시간의 흐름도 끊긴 진공 상태 같다. 이때 선인장은 붉은 가시를 뻗으며 이 정적을 깨고 나온다. “사물이 영원히 쉬고 있는, 마치 노스탤지어 같은 진공 상태를 그렸어요. 하지만 사실 이런 상태는 세상에 없어요. 그래서 붉은 가시가 돋고 곰팡이가 핀 그림을 등장시켰어요. 멈춘 시간을 깨트려서 영원한 노스텔지어는 허구임을 말하려고요.”
만지면 검붉은 색소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처연한 꽃잎, 손가락을 대면 예리한 가시가 고통도 없이 쑥 들어박힐 것 같은 고운 선인장, 입술 벌린 야생 동물 같은 묘한 변종 꽃…. 정지현 씨의 연작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모순을 주제로 삼았다. 이 주제로 한참 고민하다가 문득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없는 변종 식물을 창조하지 않더라도 방에 늘 놓여 있는 친근한 서랍장을 통해 이중성을 묘사했다. “이들은 부드러우나 날카롭고, 편안하지만 불길하고, 아름답지만 불편한 것들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저는 영원성과 유한성 사이의 괴리를 그렸습니다.” 선인장 가시에 손을 대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의 무상함을 깨닫지 않을까? 작업이 안 풀리면 속이 쓰려서 한동안 딴짓을 해야 한다는 그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한다. 아름다움, 바로 세상 모든 인간이 살아내는 ‘삶’을 그리기 위해서. 
* 2월호 ‘표지가 궁금해요’ 칼럼은 서울 사간동의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02-720-5789)의 협조로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11월에 정지현 작가의 개인전 <사막 정원>이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