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 하나. 왜 여자의 가사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도구는 발명 속도가 더딘 것일까? 그 신기한 팩시밀리가 개발된 것도 까마득한 옛날이요, 이제는 위성으로 먼 나라 뒷골목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인데 말이다. 불만 둘. 왜 우리나라에는 이탈리아 브랜드 ‘알레시’처럼 너무 예뻐서 집에 꼭 하나 두고 싶은 명품 생활 소품이 없는 걸까? 아무리 발품 팔아도 여자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제품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요, 디자인을 포기한다 해도 대를 물려 쓸 만큼 내구성 있는 제품 또한 찾을 길이 없으니 주부들은 뿔났다.
‘여자 마음을 헤아려주는 자상한 성격에 외모까지 빼어난 애인.’ 루펜리 이희자 대표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핵심이다. 상상해보라. 들고 나가기 번거롭고 찝찝한 음식물 쓰레기를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친절한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심지어 그가 보면 볼수록 즐거운 ‘훈남’이라면…. 가격만 적당하다면 어느 주부가 ‘구입’을 망설이겠는가. 이희자 대표가 개발한 음식물 처리기 ‘루펜’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매출액이 이를 증명한다. 2004년 첫해 8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3년 뒤 1천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남편의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나이 마흔아홉이 되던 해에 사업가로 나선 그는 경영학을 공부했다거나 물건을 팔아본 경험이 전무했던 ‘순수 전업 주부’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매달린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소비의 주축인 여자들은 ‘예뻐야’ 그 제품을 사잖아요. 그리고 여성에게 진정 요긴하며 편리하게 고안되어야 좋은 제품이잖아요. 그래서 디자인이 제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그는 또 ‘여자라면 누구나 디자인 전문 CEO가 될 수 있다’고 귀띔한다. 여자에게는 ‘디자인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가 디자인 본능이다. 또한 ‘역지사지’, ‘입장 바꿔 생각하는 배려심’이 디자인 본능이다. 그는 이러한 디자인 본능을 발견했고, 성공으로 연결했다.
디자인은 싱크대에서 시작되었다 “아, 귀찮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만 누가 해줘도 살림이 개운해질 것 같다. 20년 넘게 전업 주부로 살아온 이희자 씨도 그랬다. 너저분한 싱크대나 속수무책인 식당 음식물 쓰레기통을 보면 답답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이 문제부터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지요. 주부로서 가장 절실한 문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보기로 했습니다.” 음식물 처리기는 실용화될 길이 요원하다는 기술자들의 말에 연연하지 않고, 우선 보기 흉한 쓰레기통에 ‘옷’이라도 입혀주자는 심산으로 시작했다.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할 형편이 되지 않아 미대에 다니던 아들에게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렇게 첫 제품이 탄생했다.
디자인은 스케치북 낙서에서 탄생한다 그의 책상에는 수첩 대신 커다란 스케치북이 놓여 있다. 사업 시작 이래 그는 지금까지 10개가 넘는 스케치북을 썼다. “여자들은 전화하면서 낙서하곤 하잖아요. 저도 전화나 회의를 할 때 낙서하는 습관이 있어요.” 무의식중에 적는 단어에 해결의 실마리가 담긴 경우가 많다. 왕창 엉켜서 풀리지 않는 일이 있어도 일단 흰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다 보면 술술 풀린다. ‘100% 깨끗한 환경(100% Fresh Environment)’이란 뜻의 루펜LOOFEN에 그의 성인 이 Lee를 붙인 회사명도 낙서에서 탄생했다.
디자인은 화장대 앞에서 단단해진다 이희자 씨의 화장대에는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화장대 앞에 이루고 싶은 바를 쭉 써 붙여요. 매일 거울을 보면서 그 소망을 떠올리죠. 1번 리스트는 바로 ‘배용준과 광고 계약’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이루게 되었어요. 1월부터 배용준 씨가 일본의 루펜리 제품 광고에 출연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소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고 견고해지면서 결국 달성하게 된다.
이희자 대표와 이경미 대표,
찰떡궁합 두 여자의 천하무적 디자인
자나깨나 디자인을 생각하다 보니, 이희자 대표는 디자이너 이경미 대표와 사업 파트너를 넘어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디자인과 연결지어 논하는 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다. 둘은 공통점도 많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일순위로 삼는 점이나, ‘이거다!’ 싶은 것은 물불 안 가리는 점이 닮았다. 이희자 대표는 이경미 대표를 ‘여성 소비자의 관점으로 재기발랄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로 평가한다. “진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이경미 대표를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었어요. 디자이너는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거든요. 그는 주변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런 성격에서 과감하면서도 경쾌하고 친근한 디자인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편 이경미 대표는 이희자 대표를 ‘디자인, 특히 비비드한 색상을 즐기는 CEO’라고 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물방울 모양의 가습기를 제안하면 다른 회사에서는 난색을 표해요. 특히 남성 위주의 기업에서는 각이 반듯하고
모노톤인 제품을 선호하거든요. 그런데 이희자 대표는 소비자 입장에 서서 소비자가 즐거워할 제품에 투자합니다.”
이희자 대표는 이경미 대표를 만나 만군을 얻은 기분이었다고. “자기 자신이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훌륭한 디자이너를 찾을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지요. 훌륭한 CDO가 있는 회사가 성공하는 시대니까요.”
디자인은 스카프와 립스틱에서 훔친다 그는 스카프 마니아다. 옷은 동대문 시장에서 사 입어도, 스카프만큼은 최고로 예쁜 것을 고른다. “스카프 하나로 의상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지요. 이런 스타일이 루펜 디자인에 반영되었고요. 오래 봐도 질리지 않도록 심플하게 디자인하고, 스카프로 멋을 내듯 ‘링’으로 포인트를 주었지요.” 스카프를 잘 보면 유행 문양을 알 수 있고, 립스틱을 보면 유행 컬러를 짐작할 수 있다. 펄립스틱이 유행하면 루펜의 ‘링’에도 펄을 첨가하는 식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샀다. “루펜은 구석에 숨겨두는 쓰레기통이 아닌, ‘주방의 액세서리’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자식 같은 제품에 ‘명품 옷’을 입히려면 안목이 높아야 한다. 그래서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그는 주말이면 백화점 아이쇼핑에 나선다.
디자인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중소기업에서 음식물 처리기를 개발해 인기를 끌자, 경쟁 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루펜리의 신기술 매뉴얼을 거의 베낀 제품도 등장했고, 비열한 횡포에 눈 뜨고 당하기도 했다.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경쟁자들이 시장을 키워주니 더 좋은 일’이라며 의연했다. 그리고 이때야말로 훌륭한 디자인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브랜드 네이밍 전문가인 손혜원 대표에게 최고의 디자이너를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만난 이가 디자인 회사 ‘사이픽스’의 이경미 대표다. 이때부터 루펜이 눈에 띄는 제품으로 재탄생했다. ‘재활용’을 뜻하는 동그라미(○) 문양을 전면에 내세우고, 핫 핑크 같은 튀는 색상을 시도해 돋보였다. 경사도 많았다. 루펜은 세계 3대 디자인 상인 ‘레드돗 어워드’에서 2007년 콘셉트 부문상을, 자회사 리빙엔의 물방울 살균 가습기는 독일 ‘2009 iF 제품 디자인 어워드’ 생활가전 부문에서 제품 디자인 상을 수상했다.
디자인은 여자의 직감에서 나온다 이희자 대표는 숫자에 약하고 분석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여자의 직감’을 믿고 그대로 밀어붙인 것은 다 성공했다. 자회사 리빙엔을 통해 가습기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가습기 시장은 포화상태’라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거실의 오브제처럼 예쁜 가습기가 나온다면 또 하나 살 것 같았어요. 직감을 믿고 추진해 물방울 모양의 가습기를 출시했어요.” 결과는 성공. 심지어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던 ‘대박’이 예감된다. 일본에서 배용준 씨 주연의 와인 소재 드라마 <신의 물방울>을 방영할 예정인데, 보랏빛 물방울 살균 가습기가 일본에서 덩달아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소비자가 거의 여자예요. 남자들은 자기 속옷 사이즈도 모를 정도죠. 여자 CEO는 여자의 마음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물건을 많이 사본 사람이기 때문에 감각이 다릅니다.”
디자인은 긍정적인 가정에서 나온다“아이들에게 늘 ‘그래, 해라’ ‘된다’라고 말했지, ‘하지 말아라’, ‘안 돼’라고 하지 않았어요. 실패하면 어때요.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죠.” 그의 자녀들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자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생이었던 큰아들에게 루펜의 첫 디자인을 부탁했을 때 이희자 씨도 예상치 못한 대범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일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는 말은 엉터리예요.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전 아이들에게 엄마가 왜 바쁜지 자세히 얘기해줬어요. 계약이 성공하면 돈이 들어온 통장도 보여주고요.”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산교육을 받았다. 쫄딱 망하는 것도, 늦깍이에 사업을 성공하는 것도 봤으니 말이다. 그 영향으로 세 자녀 모두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가정을 열린 마음으로 경영해야 직원들도, 사업 차 만나는 이들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열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친환경 제품의 대표 브랜드로 선보인 음식물 처리기 루펜과 물방울 살균 가습기. 기능이 우수할 뿐 아니라 색상도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다.
운명까지도 디자인하라 50편이 한 세트인 영화 <삼국지>에 푹 빠졌던 한때. 이희자 대표는 하루에 다섯 편씩, 열 시간 동안 꼼짝 않고 봤다. 제갈량을 자기 연인처럼 사랑해서 마지막에 그가 죽었을 때 사흘 밤낮을 울었단다. 뭔가 좋아하면 흠뻑 몰입하는 성격대로 사업도 즐기면서 한다. “내가 바로 이 우주의 주인공이에요. 그러니까 내 운명, 내 행복은 내가 디자인하는 것이죠. 악역을 맡을지 착한 역할을 할지도 내가 결정하죠. 저는 당당하게 돈을 벌고 싶어요. 그래서 누구한테 팔더라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제품을 만들어요. 남이 알아주든, 아니든 괘념치 않아요. 제가 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만이 중요해요.” 그간 친환경 디자인에 투자해온 것도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음식물 쓰레기를 연료로 전환시키는 사업은 물론, 조만간 토목건설업 쪽으로도 ‘큰일’을 낼 예정이다. “두바이 사막의 모래를 압축한 ‘친환경 벽돌’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시멘트보다 두 배 견고한 건축 자재예요. 남아공 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쓰이게 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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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