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가 조정래ㆍ 시인 김초혜 씨 부부.
2 피아니스트 백건우ㆍ배우 윤정희 씨 부부.
3 영화감독 임권택ㆍ채령 씨 부부.
지난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인사동 선화랑에서 사진작가 이은주 씨의 <부부 이야기> 전시가 열렸다. 이은주 씨는 우리 공연예술 사진계의 1세대로, 뉴욕필을 비롯 우리나라를 거쳐 간 굵직한 공연 무대 사진과 백남준, 강수진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의 사진을 30여 년간 촬영해온 사진가. 그가 한국 명사 부부 43쌍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정래·황병기·임권택 씨 등 문화계 거장들부터 배상면 국순당 회장, 이어령 교수, 김영수 전 문화체육부 장관 등 기업인,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유명 인사 부부의 모습을 따뜻하게 포착해냈다.
“공연 사진을 촬영하면서 예술가 부부, 명사 부부들이 다정하게 함께 다니는 모습을 많이 뵈었지요. 그래서 부부의 모습을 촬영할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젊은 날의 싱그러운 사랑이 아니더라도, 주름살 속에 담겨 있는 속 깊은 사랑이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발견해낸다면 이 2년여 간의 작업이 참 보람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은주 씨는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먼저 자택을 찾아다니며 부부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따뜻한 차와 후한 저녁을 대접받으며 들었던 결혼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장대한 드라마였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이 같은 사전 작업을 토대로 각 부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소와 모습을 고민했고, 편안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들어 부부의 초상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부부가 직접 쓴 결혼 생활을 돌아보는 글과, 그들의 젊은 시절이 담긴 옛날 사진을 받아 함께 사진집에 실었다. 이제는 촌스럽게 보이는 흑백사진 속 앳된 부부가 지금의 나이 든 부부가 되기까지 그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짐작케 하는 글과 사진이 애틋하다.
4 가야금 명인 황병기ㆍ소설가 한말숙 씨부부.
5 건축가 김성국ㆍ음악가 정청자 씨 부부.
“예술가의 아내는 참 외로운 자리다. 예술가는 아내와 결혼했지만 예술과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임권택 씨는 배우였던 아내 채령 씨가 화려한 삶을 접고 가난한 영화감독의 배필로 평생 옆에 있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실은 내내 ‘아내가 더 이상 못 살겠다 도망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고 지금도 그 걱정을 덜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동갑내기 부인 정분조 씨와 결혼한 화천레미콘 대표 이종화 씨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의 아내는 홀시어머니가 1백 살이 넘을 때까지 55년간을 봉양했다. 그뿐 아니라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길쌈을 하고, 매일 일곱 개의 도시락을 쌌으며, 매년 일곱 번의 제사를 차려야 했던 종손 며느리다. 지친 아내는 결국 칠십이 넘어 병이 났다.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면서 아내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저며온다. 곱던 자태와 영리하고 총명한 눈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 깊은 얼굴, 앙상한 몸매만 남아 있다. 지난 57년 세월, 더 섬세하게 헤아려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못한 회한만이 가슴에 가득할 뿐이다.”
6 전 인천검사장 이훈규ㆍ전 경기도박물관 관장 양미을 씨 부부.
7 전 문화체육부 장관 김영수ㆍ원종순 씨 부부.
부부란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는 부인할 수 없게 서로를 많이 닮았습니다. 화가 고흐는 ‘부부란 두 개의 반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지요. 화가의 눈과 사진가의 눈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 따로따로 둘이 아닌 ‘하나의 전체’를 사진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이혼율이 높은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부부의 아름다운 동행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에 기꺼이 응해주신 이 부부들은 진정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귀한 분들입니다.” 이은주 씨는 촬영을 하는 동안 부부가 서로에게 건네는 따스한 말과 시선, 웃음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한 부부, 한 부부 모두 그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매일 아침 그리하듯 침대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전 연세대 총장 송자·의사 탁순희 씨 부부, 연출가와 연극배우로 막과 막 사이에 무대 위에 앉아 포즈를 취한 손진책·김성녀 씨 부부, 곱고 우아한 얼굴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피아니스트 백건우·배우 윤정희 씨 부부, 책이 빼곡한 서고에서 종이처럼 하얀 옷을 입고 미소 지었던 소설가 조정래·시인 김초혜 씨 부부. 사진 속 부부들은 평소보다 곱게 차려입고서 이은주 씨의 카메라 앞에 섰다. ‘활동사진’을 만드는 것이 업인 임권택 감독,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이어령 교수 앞에서는 내심 긴장도 되었다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 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룬 위엄 넘치는 분들이 집 안에서는 손수 차도 타 마시고 때로 아내 앞에서 발그레한 얼굴이 되는, 평범하고 자상한 남편이라는 사실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좋았다가 미웠다가, 귀찮다가 고마웠다가 하면서 거의 50년을 지루한지 모르고 함께 살아왔다.” 소설가 한말숙 씨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씨와의 결혼 생활을 이렇게 평했다. “모든 생명 있는 자의 절대적인 원칙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기약된 이별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그를 좀 더 아끼며 살려고 한다”는 그는 그러나 결혼 초 남편에게 한 약속만은 변함없단다. “만일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만치 좋은 사람이 생기면,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내가 응원해주고 당장 이혼해주고, 내가 내 차에 태워서 그 여자한테 데려다 줄 테니까, 주저하지 말아. 힘내! 알았지?”
수십 년 세월 내 옆에 있어준 나의 일부,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영원한 내 편이 바로 부부가 아닐는지. “평생을 살면서 어찌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그러나 40년간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어 누구와 바꾼대도 지금같이 편안할까. 그러니 지상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그 시간까지 더 사랑하며 살려고 오늘도 서로를 다독인다.” 정치학자 안청시·손봉숙 씨 부부의 글처럼 남편과 아내란 진정 그런 것인가 보다.
8 2년 동안 43쌍 명사 부부의 사진을 촬영한 이은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