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살짝 빠져나가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냉장고 안에는 음식이 떨어져가고, 집 안 구석구석은 적당히 어질러져 있고, 욕실은 당장 청소를 해야 하고, 두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올 것인데…. 남편은 아이가 오기 전에 집에서 나서라고 재촉했지만, 가족들에게 남기는 나의 부재가 두려워서 자꾸 뭉기적거렸다. 짐을 싸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여권과 신용카드, 여벌 옷 두 벌과 속옷을 챙겨 넣으니 짐은 다 꾸려졌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만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떠나기 전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망설이고 망설이는 바람에 티케팅을 몇 번씩 뒤로 미루었다. 그러고는 떠나기 사흘 전에야 티케팅한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했다. “당신이 가지 말라고 하면 취소하고…. 수수료만 조금 내면 되지, 뭐.” “이왕 끊은 거 가라! 먹는 것은 걱정 말고, 애들 옷만 챙겨놓고 가.” 남편이 너무 선선히 허락해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표정 관리를 하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숙암리나 평사리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게 아닌데’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올 뻔했다. 떠나는 것은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떠나지 못한 건 순전히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김빠지게도!)
자신도 모르는 새 서서히 진이 빠져나가는 병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그런 병이 있다. 진액이 빠져버린 배추나 말린 생선의 시들하거나 처연한 표정! 그 병에 걸리면 그렇게 된다. 그때까지 나도 어쩌면 그 병에 걸려 있었다. 분명 소금 같은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긴 장을 내려놓고 곰삭을 누룩 같은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남편은 1996년 11월 3일 우리의 결혼일 이후 10여 년간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동안 변한 건 우리를 둘러싼 세월이었다. 결혼생활 12년.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전업작가 둘이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지옥이다. 월급봉투의 든든함이 우리에겐 없었다. 강원도 산골짜기 여행지에서 만난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헐렁헐렁한 바지처럼 편하게 살자며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둘 생기자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쫓기기 시작했다. 계란 두 개를 들고 가서 문방구에서 공책과 바꿔 쓴 남편은 아이들에게 풍족함을 주고 싶었고, 어린 시절 대추나무 밑에서 찰떡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한 나는 적어도 내 어린 시절처럼 부족함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다. 30년 넘은 열댓 평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해 25평 아파트를 거쳐 33평짜리 우리 집을 갖기까지의 시간은 나를 글을 파는 장사꾼으로 만들었다. 책을 만드느라 좋은 세월을 갖다 바친 게 아니라 단지 등가교환을 했을 뿐이다. 돈으로! 그 세월 동안 남편은 여전히 양말을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고, 담배를 끊지 못했고, 말하기 싫을 때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허리 사이즈조차 총각 때의 30인치 그대로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26인치에서 32인치까지 허리 사이즈가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후회도 그만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일이 나중에는 숨을 못 쉴 정도로 압박을 가해와서 가위눌릴 지경이었다. 모 재단의 사사社史, 출판사와 진행하는 단행본, 높으신 분의 자서전 정리, 새로 시작해야 하는 기획안…. 떠나기 몇 달 전부터는 노트북을 올려놓은 식탁 밑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아이들 밥을 챙겨주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노트북과 씨름했다. 친숙한 체취와 공간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 낯선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편하고 낯설어졌다.
1 세계 5대 오지 중 한 곳인 필리핀 라굼에서 20년을 선교사로 산 어른을 찾아가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었다. 그 어른은 녹슨 깡통도 화분으로 만들어 꽃을 한 포기씩 안고 살게 하는 사람이다.
2 2~3천평 되는 땅 안에서 30~40명쯤 되는 산지족이 모계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땅, 라굼.
3 발이 큰 라굼 사람들은 말처럼 유연하고 강하다. 그들의 맨발은 어떤 곳이든 갈 수 있다.
2007년 5월 15일, 오후 8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일어나서 두 귀를 막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보고 싶었다. 몇 년 전 서울에 살 때, 폭풍에 뿌리째 뽑힌 가로수를 본 적이 있다. 밤새 절규하다 뽑힌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나무가 뽑혀 나간 자리는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고 평온해 보였다. 세 시간 반 동안 새까만 밤하늘이 내 발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탈출을 실감했다. 뿌리째 뽑히든 잘리든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탈출이었다. 멀리 떠나는 길. 하루 이틀이 아닌 2주일. 뭐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함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스무 살 때 목포행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처럼 격하게 설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을까,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따위
의 소금가루 같은 생각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필리핀의 투게가라오와 라굼. 라굼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정글로 화장실도 없고 식수도 없는 곳이다. 인간을 난도질해 죽이는 잔인성과 원시의 자연이 펼쳐진 땅이다. 세상으로부터 한 번쯤 증발하고 싶다는 열망은 나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고 이 오지의 정글을 선택하게 했다.
1 이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참 간절히 살고 싶다. 무엇을 하든.”
2 라굼의 말잡이들은 진창에 빠지지도 않고 경쾌하게 잘 걷는다. 늘 삶의 진창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걸 이 말과 말잡이를 보며 느꼈다.
3 큰아이는 장애아고, 둘째는 교통사고로 다쳤고, 막내는 화상을 입은, 세 아이의 엄마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삶에 대해 엄살 떨었는가. 나는 ‘분명히’ 견딜 만했다.”
그곳이 아무리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당장 밥벌이에 보탬이 되는 일을 멈추고 떠나 얻게 되는 수천만원의 손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감행한 것을 보면, 나는 분명히 폭발 직전이었다. 단 한순간도 더는 못 버티겠다는 느낌. 오지에서 행복했다는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다. 밤마다 모기와 나방이 날아다니고, 그것을 잡아먹느라 핑크색 도마뱀붙이가 벽을 타고 다니는 통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로 피부는 태양 알레르기에 걸려 벌겋게 부풀어올랐다.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눈앞이 늘 뿌옇고 따끔거렸다. 가만히 서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앞에 바로 닥친 것들, 예를 들어 더위, 밥, 식수, 잠자리 걱정을 하느라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분명, 인생에서 가장 큰일이었다. ‘여기만 벗어나면 살 것 같다.’ 서늘한 새벽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다녀온 뒤에 일어났다 허공에 날려버린 돈이 아깝지 않았고, 꼬여버린 인간관계가 후회스럽지 않았다. 그곳에서 왠지 행복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태평스러운 웃음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들처럼 웃었다. 야생 커피나무에서 딴 열매를 적당히 갈아서 뿌연 석회질 물을 넣고 끓인 씁쓸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다시 한번 그들과 함께 찰떡같이 달라붙는 흙 길을 맨발로 걸어다니고 싶었다. 표정이 풍부한 아이들의 눈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풍토병을 얻어 와서 피부과에 다니면서도 그곳의 태양과 습기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청춘을 바친 선교사님의 삶을 조금쯤 엿보는 게 아니라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라굼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나는 다시 그곳으로 가는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좀 더 긴 17일간의 일정이었다.(나중에 사흘 더 연장했다.)“집은 걱정하지 마라. 저번에도 우리끼리 잘 지냈잖아.”
“걱정 안 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계란프라이밖에 못하는 남편은 나 없이도 아이들과 잘 지냈다. 김밥을 사 먹든, 닭과 소금과 물만 넣은 삼계탕을 끓여 먹든 아이들을 굶기지 않았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어떻게든 메워지는 법이다. 두 번째 여행에서 나는 선교사님의 서재에 틀어박혀버렸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선교사님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삶을 이끄는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왜 이렇게 고단하고 외로운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존재론적인 물음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나는 카드 결제일에 쫓기는 것처럼 한 달 앞, 아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빚쟁이 같은 원고 마감이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낮이나 밤이나 눈물이 대책 없이 쏟아지곤 했다. 무표정한 내 눈 속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4 찹쌀, 흑설탕, 코코넛 밀크를 듬뿍 넣어 쪄낸 ‘코코넛떡’은 라굼 사람들에게 별미다. 신석기 시대 토기처럼 생긴 솥은 바로 코코넛떡을 만들 때 쓰는 솥.
5 가난하게 살지만 라굼 사람들은 헤플 정도로 잘 웃는다. 웃음이 헤픈 건 사려 깊은 척을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선교사님이 알려줬다. 자신의 얼굴에서 헤픈 웃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이곳에 가서야 알았다.
6 라굼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
스무 살 무렵, 나는 아무 어깨나 기대서 울고 싶은 저녁이 있다, 라고 쓴 적이 있었다. 서른이 되기 직전 결혼을 감행한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새벽 두세 시같이 너무 이른 시간이든, 밤 열한 시 열두 시같이 너무 늦은 시간이든 자취방에서 혼자 깨어 있다는 게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했다.(당신이 아닌 누군가의 어깨!) 필리핀의 정글에 혼자 떨어져 있다 보니 그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났다. 만약 내가 그때 집에 있었다면 새벽 3시가 되었든 4시가 되었든 커피를 타서 들고 아이들 방과 남편 방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 누구나 막막하고 누구나 힘겨워한다는 사실. 그 뻔한 답들을 연필에 침을 묻혀서 쓰는 아이처럼 노트에 꾹꾹 눌러 썼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외로움에 지치지 않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마흔이란 나이는 아무 어깨나 기대서 울 수 있는 나이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때 내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반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상상할 수 없지만, 이미 지나간 세월과는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 떠날 때는 분명히 비관적으로 떠났다. ‘증발’이라는 말은 죽지 못해서 도피한다는 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분명히 긍정적이었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더라도 남편과 아이들이 주는 존재감이 나를 이불처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밥 먹었어?” “몇 시에 나가?” “데리러 갈까?” 단답형으로 묻고,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가!(묵묵부답 이심전심도 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등가교환을 한다. 물론 조금 다른 방식, 내가 조금쯤 덜 억울한 방식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내일 일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도 내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라굼에서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나를 스콜로 불어난 강물이 휩쓸어갈 수도 있었다. 코코넛 나무에서 스콜을 맞다 떨어진 박쥐는 아마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했다.집에 오니 마당에 풀이 30cm쯤 자라 있었다. 며칠 전 방학을 맞은 아이들도 부쩍 자란 것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둘이서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집은 적당히 어질러져 있고 냉장고는 적당히 채워져 있었다. 남편은 고생했다, 혹은 보고 싶었다는 립서비스 대신 여전히 단답형으로 말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라.” 나는 문을 닫고 들어가서 익숙한 내 살 냄새를 맡았다.
글을 쓴 김수영 씨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오랜 밤 이야기>를 펴냈다. 13년 동안 출판기획자로 살면서 쇼핑 북, 육아 책, 공부 잘해 신의 경지에 오르는 법, 여드름 죽이는 책, 재테크 가이드, 권력자와 유명 기업인*연예인의 에세이 등 1백 권 가까운 책을 만들었다. 5년 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동화 쓰는 남편과 두 딸을 데리고 북한강변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 그의 안식 휴가를 담은 책 <안식월>이 올해 여름 세상에 나왔다.
떠나기 전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망설이고 망설이는 바람에 티케팅을 몇 번씩 뒤로 미루었다. 그러고는 떠나기 사흘 전에야 티케팅한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했다. “당신이 가지 말라고 하면 취소하고…. 수수료만 조금 내면 되지, 뭐.” “이왕 끊은 거 가라! 먹는 것은 걱정 말고, 애들 옷만 챙겨놓고 가.” 남편이 너무 선선히 허락해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표정 관리를 하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숙암리나 평사리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게 아닌데’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올 뻔했다. 떠나는 것은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떠나지 못한 건 순전히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김빠지게도!)
자신도 모르는 새 서서히 진이 빠져나가는 병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그런 병이 있다. 진액이 빠져버린 배추나 말린 생선의 시들하거나 처연한 표정! 그 병에 걸리면 그렇게 된다. 그때까지 나도 어쩌면 그 병에 걸려 있었다. 분명 소금 같은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긴 장을 내려놓고 곰삭을 누룩 같은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 남편은 1996년 11월 3일 우리의 결혼일 이후 10여 년간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동안 변한 건 우리를 둘러싼 세월이었다. 결혼생활 12년.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전업작가 둘이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지옥이다. 월급봉투의 든든함이 우리에겐 없었다. 강원도 산골짜기 여행지에서 만난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헐렁헐렁한 바지처럼 편하게 살자며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둘 생기자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쫓기기 시작했다. 계란 두 개를 들고 가서 문방구에서 공책과 바꿔 쓴 남편은 아이들에게 풍족함을 주고 싶었고, 어린 시절 대추나무 밑에서 찰떡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한 나는 적어도 내 어린 시절처럼 부족함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다. 30년 넘은 열댓 평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해 25평 아파트를 거쳐 33평짜리 우리 집을 갖기까지의 시간은 나를 글을 파는 장사꾼으로 만들었다. 책을 만드느라 좋은 세월을 갖다 바친 게 아니라 단지 등가교환을 했을 뿐이다. 돈으로! 그 세월 동안 남편은 여전히 양말을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고, 담배를 끊지 못했고, 말하기 싫을 때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허리 사이즈조차 총각 때의 30인치 그대로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26인치에서 32인치까지 허리 사이즈가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고, 결혼 생활에 대한 후회도 그만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일이 나중에는 숨을 못 쉴 정도로 압박을 가해와서 가위눌릴 지경이었다. 모 재단의 사사社史, 출판사와 진행하는 단행본, 높으신 분의 자서전 정리, 새로 시작해야 하는 기획안…. 떠나기 몇 달 전부터는 노트북을 올려놓은 식탁 밑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아이들 밥을 챙겨주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노트북과 씨름했다. 친숙한 체취와 공간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 낯선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편하고 낯설어졌다.
1 세계 5대 오지 중 한 곳인 필리핀 라굼에서 20년을 선교사로 산 어른을 찾아가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었다. 그 어른은 녹슨 깡통도 화분으로 만들어 꽃을 한 포기씩 안고 살게 하는 사람이다.
2 2~3천평 되는 땅 안에서 30~40명쯤 되는 산지족이 모계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땅, 라굼.
3 발이 큰 라굼 사람들은 말처럼 유연하고 강하다. 그들의 맨발은 어떤 곳이든 갈 수 있다.
2007년 5월 15일, 오후 8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일어나서 두 귀를 막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보고 싶었다. 몇 년 전 서울에 살 때, 폭풍에 뿌리째 뽑힌 가로수를 본 적이 있다. 밤새 절규하다 뽑힌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나무가 뽑혀 나간 자리는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고 평온해 보였다. 세 시간 반 동안 새까만 밤하늘이 내 발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탈출을 실감했다. 뿌리째 뽑히든 잘리든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탈출이었다. 멀리 떠나는 길. 하루 이틀이 아닌 2주일. 뭐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함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스무 살 때 목포행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처럼 격하게 설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을까,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따위
의 소금가루 같은 생각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필리핀의 투게가라오와 라굼. 라굼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정글로 화장실도 없고 식수도 없는 곳이다. 인간을 난도질해 죽이는 잔인성과 원시의 자연이 펼쳐진 땅이다. 세상으로부터 한 번쯤 증발하고 싶다는 열망은 나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고 이 오지의 정글을 선택하게 했다.
1 이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참 간절히 살고 싶다. 무엇을 하든.”
2 라굼의 말잡이들은 진창에 빠지지도 않고 경쾌하게 잘 걷는다. 늘 삶의 진창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걸 이 말과 말잡이를 보며 느꼈다.
3 큰아이는 장애아고, 둘째는 교통사고로 다쳤고, 막내는 화상을 입은, 세 아이의 엄마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삶에 대해 엄살 떨었는가. 나는 ‘분명히’ 견딜 만했다.”
그곳이 아무리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당장 밥벌이에 보탬이 되는 일을 멈추고 떠나 얻게 되는 수천만원의 손실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감행한 것을 보면, 나는 분명히 폭발 직전이었다. 단 한순간도 더는 못 버티겠다는 느낌. 오지에서 행복했다는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다. 밤마다 모기와 나방이 날아다니고, 그것을 잡아먹느라 핑크색 도마뱀붙이가 벽을 타고 다니는 통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4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로 피부는 태양 알레르기에 걸려 벌겋게 부풀어올랐다.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눈앞이 늘 뿌옇고 따끔거렸다. 가만히 서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앞에 바로 닥친 것들, 예를 들어 더위, 밥, 식수, 잠자리 걱정을 하느라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분명, 인생에서 가장 큰일이었다. ‘여기만 벗어나면 살 것 같다.’ 서늘한 새벽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다녀온 뒤에 일어났다 허공에 날려버린 돈이 아깝지 않았고, 꼬여버린 인간관계가 후회스럽지 않았다. 그곳에서 왠지 행복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태평스러운 웃음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들처럼 웃었다. 야생 커피나무에서 딴 열매를 적당히 갈아서 뿌연 석회질 물을 넣고 끓인 씁쓸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다시 한번 그들과 함께 찰떡같이 달라붙는 흙 길을 맨발로 걸어다니고 싶었다. 표정이 풍부한 아이들의 눈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풍토병을 얻어 와서 피부과에 다니면서도 그곳의 태양과 습기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청춘을 바친 선교사님의 삶을 조금쯤 엿보는 게 아니라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라굼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나는 다시 그곳으로 가는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좀 더 긴 17일간의 일정이었다.(나중에 사흘 더 연장했다.)“집은 걱정하지 마라. 저번에도 우리끼리 잘 지냈잖아.”
“걱정 안 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계란프라이밖에 못하는 남편은 나 없이도 아이들과 잘 지냈다. 김밥을 사 먹든, 닭과 소금과 물만 넣은 삼계탕을 끓여 먹든 아이들을 굶기지 않았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어떻게든 메워지는 법이다. 두 번째 여행에서 나는 선교사님의 서재에 틀어박혀버렸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선교사님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삶을 이끄는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왜 이렇게 고단하고 외로운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존재론적인 물음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나는 카드 결제일에 쫓기는 것처럼 한 달 앞, 아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빚쟁이 같은 원고 마감이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낮이나 밤이나 눈물이 대책 없이 쏟아지곤 했다. 무표정한 내 눈 속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4 찹쌀, 흑설탕, 코코넛 밀크를 듬뿍 넣어 쪄낸 ‘코코넛떡’은 라굼 사람들에게 별미다. 신석기 시대 토기처럼 생긴 솥은 바로 코코넛떡을 만들 때 쓰는 솥.
5 가난하게 살지만 라굼 사람들은 헤플 정도로 잘 웃는다. 웃음이 헤픈 건 사려 깊은 척을 안 해서 그런 거라고 선교사님이 알려줬다. 자신의 얼굴에서 헤픈 웃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이곳에 가서야 알았다.
6 라굼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강.
스무 살 무렵, 나는 아무 어깨나 기대서 울고 싶은 저녁이 있다, 라고 쓴 적이 있었다. 서른이 되기 직전 결혼을 감행한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새벽 두세 시같이 너무 이른 시간이든, 밤 열한 시 열두 시같이 너무 늦은 시간이든 자취방에서 혼자 깨어 있다는 게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했다.(당신이 아닌 누군가의 어깨!) 필리핀의 정글에 혼자 떨어져 있다 보니 그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났다. 만약 내가 그때 집에 있었다면 새벽 3시가 되었든 4시가 되었든 커피를 타서 들고 아이들 방과 남편 방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 앞에서는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 누구나 막막하고 누구나 힘겨워한다는 사실. 그 뻔한 답들을 연필에 침을 묻혀서 쓰는 아이처럼 노트에 꾹꾹 눌러 썼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외로움에 지치지 않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마흔이란 나이는 아무 어깨나 기대서 울 수 있는 나이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때 내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반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상상할 수 없지만, 이미 지나간 세월과는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 떠날 때는 분명히 비관적으로 떠났다. ‘증발’이라는 말은 죽지 못해서 도피한다는 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분명히 긍정적이었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더라도 남편과 아이들이 주는 존재감이 나를 이불처럼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밥 먹었어?” “몇 시에 나가?” “데리러 갈까?” 단답형으로 묻고,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뜨겁게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가!(묵묵부답 이심전심도 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등가교환을 한다. 물론 조금 다른 방식, 내가 조금쯤 덜 억울한 방식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내일 일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도 내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라굼에서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나를 스콜로 불어난 강물이 휩쓸어갈 수도 있었다. 코코넛 나무에서 스콜을 맞다 떨어진 박쥐는 아마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했다.집에 오니 마당에 풀이 30cm쯤 자라 있었다. 며칠 전 방학을 맞은 아이들도 부쩍 자란 것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둘이서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집은 적당히 어질러져 있고 냉장고는 적당히 채워져 있었다. 남편은 고생했다, 혹은 보고 싶었다는 립서비스 대신 여전히 단답형으로 말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라.” 나는 문을 닫고 들어가서 익숙한 내 살 냄새를 맡았다.
글을 쓴 김수영 씨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오랜 밤 이야기>를 펴냈다. 13년 동안 출판기획자로 살면서 쇼핑 북, 육아 책, 공부 잘해 신의 경지에 오르는 법, 여드름 죽이는 책, 재테크 가이드, 권력자와 유명 기업인*연예인의 에세이 등 1백 권 가까운 책을 만들었다. 5년 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동화 쓰는 남편과 두 딸을 데리고 북한강변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 그의 안식 휴가를 담은 책 <안식월>이 올해 여름 세상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