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매연과 감정 없는 시멘트 빌딩 숲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동네, 북촌. 이곳에서 소나무 향기 은은한 한옥을 만났다. 재동초등학교 후문을 끼고 고즈넉한 골목길을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청원산방’. 이곳은 소나무만큼이나 향기 좋은 부부가 일군 터전이다. 남편이 한 자리에 뿌리내리는 소나무라면, 아내는 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햇살을 충분히 받아 곧게 자랄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나무지기라 하겠다. 아내는 인생의 절반을 기꺼이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한다.
믿음직한 파트너로 살아온 27년 낙산사 원통보전, 백담사 대웅전, 통도사 금강계단, 해인사 비로전, 조계사 지장전, 창경궁 경춘전과 문정전, 창덕궁 인정전…. 소목장 심용식 선생(56세)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그가 제작한 창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절집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문화재급 창호 중에는 그의 손이 닿은 것이 적지 않다. 열일곱에 처음 나무와 인연을 맺은 지 40여 년. 한눈팔지 않고 전통 창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선생이 만드는 문은 햇살과 바람과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가는, ‘살아 있는 문’이다.
아내 이길순 씨(54세)는 창호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쏟는 심용식 선생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고 이해하는 지음知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27년 동안 제작한 모든 창호에 대해 선생만큼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 또한 아내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고, 처음 공방을 열었을 때라 그저 인건비라도 줄여볼 요량으로 소소한 일거리를 돕다 보니 오늘까지 오게 된 것뿐이라고, 이길순 씨는 자신의 역할을 애써 낮추려 한다. 헌신적으로 내조를 한 것도 아니고, 그 시대에는 자신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공방 운영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무를 자르고 깎아 창호만 만들면 끝나는 것이 아닌 데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곁에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했다고.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나무와 창호 외에 다른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전형적인 장인인 남편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내조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길순 씨의 영역은 전천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무적인 일처리는 기본이고, 남편이 나무를 자를 때는 나무를 잡아주기도 하고, 남편이 만들어놓은 창호의 홈을 끌로 다듬어 사포질을 하고, 남편과 호흡을 맞춰 창살을 빈틈없이 견고하게 맞추고, 함께 일하는 제자들의 식사와 새참을 챙기는 것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단순 작업을 묵묵히 거들면서도 기술적인 부분에는 철저하게 언행을 절제했다. 행여 다른 기술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그로 인해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자신이 밖으로 드러나는 일에는 일절 나서지 않는 것 또한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이다. 남편을 향한 속 깊은 마음과 정성을 알기에 심용식 선생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절반은 이 사람이 이뤘고, 나머지 절반은 제가 이뤘어요.”
남편이 만들어놓은 창호의 홈을 다듬는 이길순 씨의 손. 이렇게 후덕한 손을 가진 그가 있어 남편이 장인으로 살 수 있다.
선생보다 더 선생의 작품을 아끼는 아내 절집과 같은 문화재를 포함해 일반 한옥까지 지금껏 5백여 채의 집이 심용식 선생의 손을 거쳐 갔다. 어디에 좋은 나무가 있다고 하면 열 일 제쳐놓고 달려가고, 집 전체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집에 살 사람의 성품과 인상에 맞는 문양을 구상하며 빛의 양과 바람의 세기까지도 고려해 하나의 창호를 완성한다. 그런데 문화재가 아닌 일반 작업을 하다 보면 간혹 그런 정성을 몰라줄 때가 있다. 한낱 시장에 나온 물건 흥정하듯 대할 때 정작 심용식 선생보다 더 속상해하는 사람이 아내이다. 문화재건 아니건 크건 작건 더함도 덜함도 없이 한마음을 쏟는데 말이다.
“그런 정성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값이나 깎고 보자는 식으로 얘기할 때면 아주 속상해요. 돈은 적게 받아도 상관없어요. 돈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을 했어야죠. 정말 서운한 건, 돈 한두 푼이 아니라 남편의 노력과 마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외면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만드는 문은 그저 여닫는 데만 쓰는 기계적인 문이 아니에요. 거기 사는 사람과 함께 호흡하고 생동하는 문이에요. 남편은 그저 일만 하면 행복한 사람이니까 표현을 잘 안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안타깝고 야속하죠.”
남편이 소목장 중에서 창호 부문 최초의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데에도 아내의 내조가 컸다.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와 자신이 조금씩 메모해두었던 40여 년간의 자료를 정리해 제출하는 과정은 남편의 평생의 업을 갈무리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청원산방’의 안주인과 바깥주인. 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창窓, 방과 방을 이어주는 호戶가 합해진 이름 ‘창호’처럼 빛, 바람, 공간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청원산방 02-715-3342
40년 목수로 살아온 남편을 위한 특별한 선물 지난 6월 문을 연 이곳 청원산방은 전통 창호 전시장이자 시연장이다. 지난 2006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남편의 40년 목수 생활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마련한 아내의 선물이기도 하다.
“무형문화재도 되었고 전통 창호를 좀 더 쉽게 알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어요. 평생 일만 알고 살아온 남편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살 집에 대해서도 고민하다 보니 생각이 이곳 북촌에 이른 거죠. 그래서 전시 공간과 살림집을 같이 들였습니다.”
아이디어를 낸 것도, 현장에서 공사를 진두지휘한 것도 이길순 씨였다. 덕분에 심용식 선생은 변함없이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꽃완자문, 소슬빗꽃살문, 접이세살문, 만살문, 사각불발기문, 달아자살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30여 가지의 전통 창호가 다채로운 듯 조화를 이룬 청원산방은 공사 기간만도 9개월이나 걸렸을 만큼 심혈을 기울인 작은 박물관이다. 옛 그림을 붙여 멋을 더한 창, 틈틈이 모아두었던 옛 가구와 등잔, 창호 문양을 모티프로 한 탁자와 소품이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랑방에 마련한 시연장에는 톱과 끌, 대패 외에도 수많은 연장들이 벽을 채우고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에 가면 심용식 선생이 제작한 아름다운 창호와 제작 시연을 볼 수 있고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이길순 씨가 내주는 차도 한 잔 대접받을 수 있다.
평소에도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는 이곳에 온 뒤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다실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하고, 달밤에 마루에 걸터앉아 곡차 한잔 걸치며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를 지경이란다. 어떤 날은 금세 새벽으로 넘어가기도 한다고. 작품 구상 단계에서부터 마무리까지 아내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심용식 선생과,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감탄하는 이길순 씨.
“이 사람이 있어서 평생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어요. 작업 말고는 거의 전적으로 이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스스로 궂은일, 곤란한 일은 다 자기한테 미루라고 해요. 난 나무와 창호만 알고 그것만 생각하는데, 아내는 객관적이고 넓은 시각에서 조언을 하니까 듣다 보면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져요. 앞으로 이론 공부를 좀 더 해서 나무 고르는 것부터 제작까지 창호에 관한 제대로 된 책 하나 내는 것이 소망인데, 이 작업 역시 아내와 함께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남편이 평생 흔들림 없이 장인으로 살아온 것에 감사해요. 남편은 사람들에게 늘 절반은 내가 이뤘다고 하지만, 정말 힘들고 중요한 것은 다 남편이 했어요. 난 그 그늘 아래 있었을 뿐이니 공은 마땅히 남편의 것이어야 해요. 저는 그저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해요.”
이길순 씨는 한사코 자신을 낮추지만, 심용식 선생이 기댈 수 있는 그의 가냘픈 어깨는 든든한 에너지의 원천이며 땡볕 아래 가장 시원한 나무 그늘이 아니었을까.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어색해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심용식 선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던진다. “이 여사, 오늘 제대로 뜨네.” 이 한마디에는 비로소 아내가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한 흐뭇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창호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서 소나무 향기가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