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시하 어른부터 물색없는 어린아이까지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품는다는 성산 여씨 문중의 종부 도이현 씨. 50년 넘는 세월 동안 슬기롭게 대가족을 조율하며 살아온 종부를 위해 문중에서는 ‘종부의 날’을 만들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만하면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라 자부하는 그에게서 이 시대의 가족 경영법을 배워본다.
향약의 종가로 알려진 성산 여씨 원정공 여희임 선생의 17대 손이 살고 있는 경북 성주.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와 몇 번의 통화가 오갔다. 도착 시간을 연거푸 묻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손님 오는 시간에 맞춰 밥솥에 뜸을 들일 요량인 듯했다. 내 집 손님에게 뜨듯한 밥 한 그릇 당신 손으로 차려내는 건 당연한 도리라는 뜻을 이미 내비친 터였다. 종가에 도착하자 손녀를 마중 나온 할머니처럼 대문 밖까지 마중 나와 덥석 손을 부여잡으며 반기는 도이현 씨(74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 대한 환대였다.
우리를 맞은 건 종손 내외만이 아니다. 종부宗婦를 인터뷰하러 온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문중 어르신들이 일찌감치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손님과 문중 어르신들의 점심 준비를 거들러 온 집안 아낙들도 부엌에서 하나 둘 얼굴을 내비쳤다.“자랑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입니다. 여보시오 사진사 양반, 우리 종부님 사진 좀 예쁘게 많이 찍어주시오”라는 부탁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양반들이 이렇게 나서는 것만 봐도 이 집안에서 종부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문의 자랑과 영광은 대개 출세한 남자들 몫이라 생각하지만, 이 집에선 묵묵히 집안 어른 섬기고 아랫사람 잘 다독여 화목한 가정 일군 종부도 큰 자랑거리인 듯하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온 집안 사람들이 종부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왼쪽) 종손 여문환 씨와 종부 도이현 씨. 지금도 한 마을에 일가 1백여 가구가 모여 살기 때문에 모임이 잦지만, 도이현 씨는 가족의 화목을 이끌며 종부로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종부, 반세기를 따라다닌 자랑스러운 수식어 “열여덟에 시집왔지요. 친정이 옆 마을이었는데 그때야 연애가 어딨나, 집안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가는 통에 신랑 얼굴도 모르고 종부 자리라는 것만 알고 왔지. 처음엔 친정아버지 원망도 했어요. 일 많고 힘든 종부 자리에 나를 보내서 왜 이 고생을 시키나 하고. 전쟁 때 불타 없어진 종택부터 서원과 재실까지 다시 짓느라, 그 뒷바라지하느라 일이 더 많았으니까. 게다가 마을에 일가들이 모여 사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을 어른이 다 내 집안 어른이고, 그렇다 보니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까지 만사가 다 조심스러웠죠.”
구구절절 사연을 열거하지 않아도 종부의 삶이란, 그 말 못할 어려움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종가까지 갈 것도 없이, 직계 3대만 모여도 고부 갈등이니 동서 시집살이니 해서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요즘 가족의 모습 아니던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한 가족 관계의 중심에 놓인 것이 종가요, 그런 관계를 소리 없이 조율하며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종갓집 종부의 소임이니 그 수고로움이야 더 말해 뭐 하겠는가.
“솔직히 처음엔 종부가 된 걸 원망도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집에 드나드는 손님이 1년에 4, 5천 명이니 얼마나 힘들어요. 옛날에는 좁은 재래식 부엌에다 지금처럼 편리한 전기밥솥이 있기를 하나, 불 때서 밥 해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손님들은 들이닥치고, 그래도 늘 웃는 낯으로 접대를 했어요. 어른들께서 넓은 마음으로 가족을 포용하라고 가르치셨으니까. 다행히 몸이 고달프긴 했어도 고부 갈등 같은 건 모르고 살았어요. 어른 말씀이 옳겠거니 하고 나를 낮추고 살았거든.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어른들도 넉넉한 품으로 다독이고 아껴주셨어요. 어려서 시집왔으니 실수가 많았을 텐데도 허물은 묵묵히 덮어주시고, 잘한 것은 드러내서 우리 종부 잘한다고 칭찬해주시고. 우리 며느리들에게도 내가 배우고 받은 대로 하니까 문제 될 게 없어요.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옛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하지는 않아요. 우리 때와는 다른 시대니까 당연히 시대에 따라 바뀔 건 바뀌어야지요.”
하는 수 없어 억지로 참거나 체념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한평생 살았기에 지난 세월에 대한 억울한 마음이나 후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단다. 그러니 우리네 어머니들의 소싯적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는‘내가 시집살이할 때는 말이지’로 시작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서러운 에피소드도 도이현 씨의 기억엔 없다. 다만 종손인 남편과 함께 집안의 중심 역할을 하느라 자식들을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란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 했던가. 부모가 가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것을 보고 자란 3남 1녀의 자식들도 도리를 알고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주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안 어른들에게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대접하는 종부.집안의 한 어른은 손님맞이에 애쓰는 종부를 돕기 위해 <원정선생 주손가 종부책>이라는 개인 문집도 만들었다. 언론 매체에 게재된 종부 이야기를 오려 책자로 만든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는 ‘종부의 날’ 한마을에 사는 문중 동서들과 평생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며느리계’ 덕분이다. 며느리계는 어려운 시댁 식구들 틈에서 긴장하며 마음고생 할 며느리들을 위해 집안 어른들께서 만들어주신 모임이다. 알게 모르게 쌓이는 시집살이 스트레스도 풀고 같은 세대끼리 의지하며 지내라는 어른들의 속 깊은 배려였던 셈이다. 그 뜻에 따라 명절이면 부인네들끼리 모여 한바탕 웃어젖히고, 봄이면 함께 꽃놀이도 가고, 서로의 속내를 터놓으며 함께한 세월이 수십 년. 종부인 도이현 씨를 중심으로 집안 대소사에 제 일처럼 나서 부지런을 떠는 것도 이들이다. 도이현 씨 역시 자신의 며느리들을 계로 묶어주었더니 동서끼리 우애도 깊고, 시댁 식구에게도 거짓 없는 마음으로 잘한다며 은근히 자랑을 내비친다.
이렇듯 평생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집안 식구들을 살뜰히 챙겨온 종부를 위해 6년 전 문중에서는아주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었다. 이름 하여 ‘종부의 날’. 집안 어른의 제안으로 7월 17일을 종부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날이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가친척들이 종가로 찾아와 종부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일복 많은 종부도 이날만큼은 잠시 일손을 놓는다고. 대신 집안 식구들이 음식을 장만해 종부에게 대접하며 기쁘게 한다.
틈틈이 편지로 고마움을 전하는 문중 어른도 있다. 편지 내용을 묻자 수줍은 새색시처럼 배시시 웃으며 서랍 깊숙이 넣어둔 편지를 꺼내 보인다. ‘종부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수많은 집안 행사와 식구들 건사하느라 애쓰는 종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과 함께 지역 신문에 소개되었던 종부의 기사와 사진을 스크랩해놓은 정성이 담겨 있다. 살림보다 사회적인 성공을 더 쳐주는 세상이라지만 이쯤 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오롯이 주부 한 사람을 위해 온 집안이 움직이고, 전폭적인 지지와 존중을 받으며 당당히 집안의 중심으로 대우받으니 말이다.
종부의 노고를 치하한 문중 어른의 편지에 도이현 씨는 깊은 감동을받았다고 한다. 또 그는 ‘수촌향약’(문중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향약)을 써서 자녀들에게 뿌리를 알게 해주고, 매란국죽을 쳐서 손자 손녀 생일날을 기념하고 있다.
가족 관계를 푸는 키워드는 특별하지 않다 평생 집안 돌보는 것을 최고로 알고 살았던 도이현 씨는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위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그림은 자신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자손들과 소통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문중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향약의 내용을 손수 써서 자식에게 전하는가 하면, 손자 손녀들 생일이면 고운 화선지에 매란국죽을 쳐서 선물하는 멋진 어머니요 할머니이다. 붓을 잡으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도이현 씨에게 조금 더 일찍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것이 혹시 후회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후회 같은 건 없다고 그가 잘라 말한다. 가정을 평안하게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고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니 스스로 당당하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즐길 수 있으니 만족한다고. 이만하면 종부살이 할 만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시대가 변했고 주부의 위상도 달라진 지 오래다. 가족 규모는 단출해졌지만 관계를 풀기는 더 어려운 세상, 경험 많은 종부에게 가족 관계를 지혜롭게 풀어가는 노하우를 물었다.
“난 그렇게 어려운 건 몰라요. 그저 위로는 공경하고 아래로는 넉넉하게 품어주면 그게 가정 평화의 비결이지, 뭐 별다른 게 있나. 가족이니까 장점도 단점도 잘 보일 테지만, 가족이니까 장점을 더 크게 보면 다 좋아 보이고 감사하게 돼요.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식만 최고로 알고 자식에게 모든 걸 쏟아 붓느라 다른 가족에겐 소홀하죠? 그러다 보면 부모, 남편, 자식과도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부모부터 진심으로 섬기면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우기 때문에 분란이 생길 소지가 없어요.”
내심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질문에 대한 답치고는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싱겁기까지 하다. 한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뻔한 답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비즈니스도 아닌데 가족 간에 무슨 계산이며 기술이 필요하리오. 그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니 사람 관계는 쿨한 것이 좋다지만 가족 관계만큼은 조금 촌스러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간에 마땅히 오가야 할 그 촌스러운 마음, 차지고 뭉근한 교감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바로 주부라는 사실도. 이것이 도이현 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을 통해 삶으로 체득한, 평범하지만 특별한 가족 경영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향약의 종가로 알려진 성산 여씨 원정공 여희임 선생의 17대 손이 살고 있는 경북 성주.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와 몇 번의 통화가 오갔다. 도착 시간을 연거푸 묻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손님 오는 시간에 맞춰 밥솥에 뜸을 들일 요량인 듯했다. 내 집 손님에게 뜨듯한 밥 한 그릇 당신 손으로 차려내는 건 당연한 도리라는 뜻을 이미 내비친 터였다. 종가에 도착하자 손녀를 마중 나온 할머니처럼 대문 밖까지 마중 나와 덥석 손을 부여잡으며 반기는 도이현 씨(74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에 대한 환대였다.
우리를 맞은 건 종손 내외만이 아니다. 종부宗婦를 인터뷰하러 온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문중 어르신들이 일찌감치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손님과 문중 어르신들의 점심 준비를 거들러 온 집안 아낙들도 부엌에서 하나 둘 얼굴을 내비쳤다.“자랑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입니다. 여보시오 사진사 양반, 우리 종부님 사진 좀 예쁘게 많이 찍어주시오”라는 부탁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이 지긋하고 점잖은 양반들이 이렇게 나서는 것만 봐도 이 집안에서 종부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문의 자랑과 영광은 대개 출세한 남자들 몫이라 생각하지만, 이 집에선 묵묵히 집안 어른 섬기고 아랫사람 잘 다독여 화목한 가정 일군 종부도 큰 자랑거리인 듯하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온 집안 사람들이 종부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왼쪽) 종손 여문환 씨와 종부 도이현 씨. 지금도 한 마을에 일가 1백여 가구가 모여 살기 때문에 모임이 잦지만, 도이현 씨는 가족의 화목을 이끌며 종부로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종부, 반세기를 따라다닌 자랑스러운 수식어 “열여덟에 시집왔지요. 친정이 옆 마을이었는데 그때야 연애가 어딨나, 집안 어른들끼리 혼담이 오가는 통에 신랑 얼굴도 모르고 종부 자리라는 것만 알고 왔지. 처음엔 친정아버지 원망도 했어요. 일 많고 힘든 종부 자리에 나를 보내서 왜 이 고생을 시키나 하고. 전쟁 때 불타 없어진 종택부터 서원과 재실까지 다시 짓느라, 그 뒷바라지하느라 일이 더 많았으니까. 게다가 마을에 일가들이 모여 사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을 어른이 다 내 집안 어른이고, 그렇다 보니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까지 만사가 다 조심스러웠죠.”
구구절절 사연을 열거하지 않아도 종부의 삶이란, 그 말 못할 어려움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종가까지 갈 것도 없이, 직계 3대만 모여도 고부 갈등이니 동서 시집살이니 해서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요즘 가족의 모습 아니던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한 가족 관계의 중심에 놓인 것이 종가요, 그런 관계를 소리 없이 조율하며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종갓집 종부의 소임이니 그 수고로움이야 더 말해 뭐 하겠는가.
“솔직히 처음엔 종부가 된 걸 원망도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집에 드나드는 손님이 1년에 4, 5천 명이니 얼마나 힘들어요. 옛날에는 좁은 재래식 부엌에다 지금처럼 편리한 전기밥솥이 있기를 하나, 불 때서 밥 해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 눈보라 치는 겨울에도 손님들은 들이닥치고, 그래도 늘 웃는 낯으로 접대를 했어요. 어른들께서 넓은 마음으로 가족을 포용하라고 가르치셨으니까. 다행히 몸이 고달프긴 했어도 고부 갈등 같은 건 모르고 살았어요. 어른 말씀이 옳겠거니 하고 나를 낮추고 살았거든.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어른들도 넉넉한 품으로 다독이고 아껴주셨어요. 어려서 시집왔으니 실수가 많았을 텐데도 허물은 묵묵히 덮어주시고, 잘한 것은 드러내서 우리 종부 잘한다고 칭찬해주시고. 우리 며느리들에게도 내가 배우고 받은 대로 하니까 문제 될 게 없어요.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옛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하지는 않아요. 우리 때와는 다른 시대니까 당연히 시대에 따라 바뀔 건 바뀌어야지요.”
하는 수 없어 억지로 참거나 체념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한평생 살았기에 지난 세월에 대한 억울한 마음이나 후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단다. 그러니 우리네 어머니들의 소싯적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는‘내가 시집살이할 때는 말이지’로 시작하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서러운 에피소드도 도이현 씨의 기억엔 없다. 다만 종손인 남편과 함께 집안의 중심 역할을 하느라 자식들을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란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 했던가. 부모가 가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것을 보고 자란 3남 1녀의 자식들도 도리를 알고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주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안 어른들에게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대접하는 종부.집안의 한 어른은 손님맞이에 애쓰는 종부를 돕기 위해 <원정선생 주손가 종부책>이라는 개인 문집도 만들었다. 언론 매체에 게재된 종부 이야기를 오려 책자로 만든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는 ‘종부의 날’ 한마을에 사는 문중 동서들과 평생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며느리계’ 덕분이다. 며느리계는 어려운 시댁 식구들 틈에서 긴장하며 마음고생 할 며느리들을 위해 집안 어른들께서 만들어주신 모임이다. 알게 모르게 쌓이는 시집살이 스트레스도 풀고 같은 세대끼리 의지하며 지내라는 어른들의 속 깊은 배려였던 셈이다. 그 뜻에 따라 명절이면 부인네들끼리 모여 한바탕 웃어젖히고, 봄이면 함께 꽃놀이도 가고, 서로의 속내를 터놓으며 함께한 세월이 수십 년. 종부인 도이현 씨를 중심으로 집안 대소사에 제 일처럼 나서 부지런을 떠는 것도 이들이다. 도이현 씨 역시 자신의 며느리들을 계로 묶어주었더니 동서끼리 우애도 깊고, 시댁 식구에게도 거짓 없는 마음으로 잘한다며 은근히 자랑을 내비친다.
이렇듯 평생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집안 식구들을 살뜰히 챙겨온 종부를 위해 6년 전 문중에서는아주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었다. 이름 하여 ‘종부의 날’. 집안 어른의 제안으로 7월 17일을 종부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날이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가친척들이 종가로 찾아와 종부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일복 많은 종부도 이날만큼은 잠시 일손을 놓는다고. 대신 집안 식구들이 음식을 장만해 종부에게 대접하며 기쁘게 한다.
틈틈이 편지로 고마움을 전하는 문중 어른도 있다. 편지 내용을 묻자 수줍은 새색시처럼 배시시 웃으며 서랍 깊숙이 넣어둔 편지를 꺼내 보인다. ‘종부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수많은 집안 행사와 식구들 건사하느라 애쓰는 종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과 함께 지역 신문에 소개되었던 종부의 기사와 사진을 스크랩해놓은 정성이 담겨 있다. 살림보다 사회적인 성공을 더 쳐주는 세상이라지만 이쯤 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오롯이 주부 한 사람을 위해 온 집안이 움직이고, 전폭적인 지지와 존중을 받으며 당당히 집안의 중심으로 대우받으니 말이다.
종부의 노고를 치하한 문중 어른의 편지에 도이현 씨는 깊은 감동을받았다고 한다. 또 그는 ‘수촌향약’(문중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향약)을 써서 자녀들에게 뿌리를 알게 해주고, 매란국죽을 쳐서 손자 손녀 생일날을 기념하고 있다.
가족 관계를 푸는 키워드는 특별하지 않다 평생 집안 돌보는 것을 최고로 알고 살았던 도이현 씨는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을 위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그림은 자신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자손들과 소통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문중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향약의 내용을 손수 써서 자식에게 전하는가 하면, 손자 손녀들 생일이면 고운 화선지에 매란국죽을 쳐서 선물하는 멋진 어머니요 할머니이다. 붓을 잡으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도이현 씨에게 조금 더 일찍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것이 혹시 후회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후회 같은 건 없다고 그가 잘라 말한다. 가정을 평안하게 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고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니 스스로 당당하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즐길 수 있으니 만족한다고. 이만하면 종부살이 할 만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시대가 변했고 주부의 위상도 달라진 지 오래다. 가족 규모는 단출해졌지만 관계를 풀기는 더 어려운 세상, 경험 많은 종부에게 가족 관계를 지혜롭게 풀어가는 노하우를 물었다.
“난 그렇게 어려운 건 몰라요. 그저 위로는 공경하고 아래로는 넉넉하게 품어주면 그게 가정 평화의 비결이지, 뭐 별다른 게 있나. 가족이니까 장점도 단점도 잘 보일 테지만, 가족이니까 장점을 더 크게 보면 다 좋아 보이고 감사하게 돼요.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식만 최고로 알고 자식에게 모든 걸 쏟아 붓느라 다른 가족에겐 소홀하죠? 그러다 보면 부모, 남편, 자식과도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부모부터 진심으로 섬기면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우기 때문에 분란이 생길 소지가 없어요.”
내심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질문에 대한 답치고는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싱겁기까지 하다. 한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뻔한 답이 정답이 아닐까 싶다. 비즈니스도 아닌데 가족 간에 무슨 계산이며 기술이 필요하리오. 그의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니 사람 관계는 쿨한 것이 좋다지만 가족 관계만큼은 조금 촌스러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간에 마땅히 오가야 할 그 촌스러운 마음, 차지고 뭉근한 교감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바로 주부라는 사실도. 이것이 도이현 씨가 반세기 넘는 세월을 통해 삶으로 체득한, 평범하지만 특별한 가족 경영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