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행복>의 ‘귀 기울여 들어보니-배우 천호진’ 촬영장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가득 채운 삼복더위의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준초이만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이 촬영을 위해 지름 1미터의 강풍기와 거대한 용량의 조명이 동원되었다.
카프카가 그랬다. “세상은 세상대로 가라. 나는 내 갈 길을 갈 테니.” 사진가 준초이 씨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핀볼 게임에서 그의 삶을 밀고 당긴 건 오직 열정이었다. 큰 숨 한번 들이쉬고 나면 곧 예순 살이 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을 찍는 사진가 준초이 씨.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숨찬 그의 연대기는 이미 온갖 매체에서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나마 그의 일대기를 나열하는 건 그 치열하고 지독한 열정시대를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과거는 오늘의 지혜가 담뿍 들어 있는 보고이므로.
젖을 떼자마자 큰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되돌아온 아이, 공부가 하기 싫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한 이야기, 몇 년 놀며 벽지 가게 사장 하다 서울대 다니는 친구를 보고는 유학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그 전초전으로 들어간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 이야기, 여권 한 장 얻기 힘들던 그때 김동리 학장의 추천서로 일본 유학 가게 된 사연, 초콜릿으로 점심을 때워가며 불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등록금을 대던 가난한 시절, 한국에서 낙제생이 일본 최고 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대학교수 자리도 마다한 채 뉴욕으로 건너간 이야기, 리처드 어베든의 조수가 될 요량으로 그가 즐겨 찾는다는 75번가 레스토랑에 웨이터 일자리를 구하던 시절, 패션 사진가 오몬드 기글리의 조수로 일하면서 얻게 된 금요일의 구토증(해발 1200m의 고산에서 촬영하다 하얀 눈 위에 모두 토하고 받은 수모로 그는 미국에 있는 6년 동안 매주 금요일 오후가 오면 속이 메슥거리며 오른쪽 눈이 빠질 듯 아프다가 토하는 병에 시달렸다), 산전수전 끝에 한국인 최초로 맨해튼에 스튜디오를 연 이야기, 1988년 한국에 돌아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을 찍는 ‘광고계의 전설’로 살게 된 시절…. 이렇게 긴 연대기는 인물 사진가로 도약한 사진가 준초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초다. 그의 ‘열정 일대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준초이는 극성스럽다 그는 스토리텔러다. 그는 사진에 피사체의 ‘히스토리’와 ‘스토리’를 담고 싶어 한다. 이해인 수녀님(<행복> 2008년 5월호 ‘귀 기울여 들어보니’)을 촬영할 때의 일이다. 밀폐돼 있는 수도자의 시간, 수도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는 코이프(수녀들이 항상 착용해야 하는 두건) 사이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나온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 긴급 수배된 통선 한 척으로 광안리 바다를 갈짓자로 운항하자 이해인 수녀님의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밀폐돼 있던 수도자의 시간이 슬며시 열리는 듯도 했다. 맘껏 소리 질러 보라는 그의 주문에 코스모스처럼 수줍어하던 수녀님은 마침내 봉선화처럼 웃었다. 소설가 박범신 씨(<행복> 2008년 3월호 ‘귀 기울여 들어보니’)에게서 ‘야수’를 발견한 그는 엄동설한에 63세의 박범신 씨 웃통을 벗기고 물을 뿌려댔다. 가슴에서 끓는 야성을 분출해보라는 그의 말에 우리나라 대표 작가는 늙지 않는 짐승처럼 포효했다.
희한하게도 그가 말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몸을 움직인다. 그가 들려주려는 ‘스토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수 조영남 씨에게 팬티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게 한다든지(‘그냥 냅둬야 할 자유인’ 조영남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보좌관이 도열한 공관 마당에서 호스로 서울시장에게 물을 뿌려댄다든지(지루한 ‘훈남’ 이미지를 벗어나보게 하려고), 죽기보다 싫은 건 모양 내고 연출 사진 찍는 거라는 신구 선생에게 목단꽃 한 송이 들려 카메라 앞에 두 시간을 서 있게 한 것처럼. 그들은 막무가내 같은 그의 요구와 성화에 기꺼이, 또는 마지못해 몸을 움직였다. 물론 사소한 부딪힘이나 삐그덕거림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찍어나가면서 그는 ‘어렵고 조심스러운,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사진가’가 됐다. “좋은 인물 사진이란 작가와 피사체(바로 사람)가 정을 통하고 혼을 나눠야 나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훔쳐보고 그걸 카메라에 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담아낸 그의 인물 사진은 ‘그래도 사람 만세!’를 소리쳐 부르고 싶게 한다.
그의 보물 1호, 자기 긍정의 힘 “우연히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성공할 수 있는 남자의 열 가지 요소가 나열되어 있었다. 나 자신과 견주면서 읽어보니 그 열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남자가 바로 나였다. 그중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성공한단다. 바로 나다. 운동 끝내고 나서 벗은 몸을 거울로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알맞은 신체 구조에 적당한 근육. 그리고 잘생겼다. 앞에서 볼 때 말고 옆에서 볼 때….” 그와 절친한 쇳대박물관 최홍규 대표의 표현처럼 그는 ‘비범함을 넘어서 왕자병까지 가진’ 사람이다(자서전 <메이드 바이 준초이> 중, 디자인하우스). 그 넘치는 자신감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또다른 백그라운드는 투철하고 치열한 준비. 촬영에 임할 때 그의 준비 시간은 짧게는 다섯 시간, 촬영은 5분이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그는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새 사진을 시작할 땐 산모 입덧하듯 하고, 로케이션 하나 잡으려 하루를 배회할 때가 숱하다. 해외 촬영에 나설 때도 400~500kg의 촬영 장비를 가져가야 마음을 놓는다. A안이 계획대로 안 됐을 때는 B안을, 그것도 안 되면 C안을 생각한다.
“나이 먹고 보니까 더 그런데,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하는 게 가장 싫어요.” 타성에 젖어가는 일상의 강물을 거부하는 사진가. 그래서 한때 강박과 신경성 우울증에 시달렸던 남자. 그 신경성 우울증을 처방할 수 있는 치료제가 다시 사진 찍는 일이라는, 못 말리는 남자. 지금도 그는 촬영 의뢰를 받으면 잠을 설친단다.
식구가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 그는 집 안 혼자만의 공간에서 절대자에게 매일 기도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날을 위로받고, ‘오늘은 이런 이런 일이 있으니 잘하게 도와주십시오’ 하며 ‘파이팅!’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자기 암시도 불어넣는다.
(위) 준초이 씨는 키가 작다. 물론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다. 하지만 그건 금세 키 작은 이만이 볼 수 있는 세상, ‘낮음의 미학’ 예찬으로 바뀐다. 가끔은 이렇게 사다리에 올라가 높음의 미학을 즐기며 사진 작업을 구상하기도 한다. 사다리는 홀페이퍼가든, 스탠드는 와츠 제품.
준초이의 은인들 도시코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며 그가 울었다. 나이 든 남자도 어깨울음을 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아주 순진한 울음이었다. 바다 건너 이웃나라에서 온 이름 없는 사진가 지망생 ‘최명준’을 돌봐준 오사와 도시코 아주머니. ‘오사와 운송’이라는 커다란 토목회사 사장이었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그 돈을 한국, 중국에서 온 어려운 유학생들에게 베풀었다.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의 ‘간섭’을 귀히 여기게 된 건 다 도시코 아주머니 덕분이에요. 저는 그저 그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보려는 겁니다. 아무리 폼 잡아봐도 결국은 그분의 큰 걸음, 그 그림자도 좇아가지 못하겠죠.”
그때부터 준초이를 관통하는 화두는 ‘사람’과 ‘인연’이다. 자신을 도와준 은인들,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들, 아는 이의 아는 이, 카메라 앞에 섰던 수많은 사람들…. 그는 그 인연을 허투루 쓸어버리거나 일회성 소모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준초이는 슬퍼서 행복하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물이죠. 눈물이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이 말 때문에 문득 그의 삶에서 슬픔의 근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슬픈 이미지가 있어요. 저는 젖을 떼자마자 큰댁에 양자로 들어갔어요. 저녁 어스름에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를 보면 막연히 슬펐어요. 어두워지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진짜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가지 못했으니까요. 내 집에 대한 상실감이 컸어요.” 어디에도 마음 붙일 부모가 없다는 부재의식은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음의 부모가 없는 대신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의 어머니가 됐다. 일로 만난 어른들에게까지 “어머니, 어머니” 하며 따랐다. 이런 친화력이 그가 사진작가로 우뚝 서는 데 큰 힘이 됐다.
“내 기억 속에 그런 감정이 흘러서일까. 한참 엉엉 소리 내어 실컷 울고 난 후의 청량한 행복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요. 슬픔은 행복을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잖아요. 슬픔이 밴, 외로움이 내재된 행복. 그건, 마치 발가벗겨놓은 것 같은, 포장되지 않은 인간을 들여다보면 다 나와요.” 다니엘(<행복> 2003년 9월호 ‘사진가 최명준이 만난 사람’에 실린 기사)이 그랬다. 선천성 뇌수종을 앓아 점점 안구가 앞으로 쏠리고 있는 다니엘이 작은 손에 꽃 한송이 쥐어 들고 꽃처럼 웃었다. “다니엘이 한나절 놀다 간 스튜디오에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만 조금 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살 난 소년의 표정은, 그 앞에서는 어떤 예술품도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예술의 극치였지요. 슬픔이 배어 있는 강인한 생명력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있을까요?”(‘사진가 최명준이 만난 사람’ 기사 중)
사진과 삶 앞에선 정열적인 독재자였다가 아들과, 자식 같은 강아지 링고 앞에서 순간 헐거워지는 그 얼굴. 국회의원 박찬숙 씨가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전화를 걸었더니 그 시간은 아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기로 했기 때문에 다른 시간을 잡자고 했다는, 그래서 그가 더 좋아졌다는 후일담(<메이드 바이 준초이> 중)이 있다. 그는 아름다움을 향한 예술의 근간은 평화롭고 건강한 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으로 외교를 하고 싶다는, ‘나란 존재가 사회의 어떤 영양분이 되고 몇 사람은 그로써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 여전히 열정 9단을 살고 있는 사진가 준초이의 열정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