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작가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소설 <여행하는 유대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당신의 입술에 난 그 흉터를 빨아주고 싶군요. 하지만 내가 고작 내뱉은 말이라고는…. ‘그 상처는 어쩌다가 생긴 겁니까?’ 였습니다.” 소심한 남자들은 매번 이런다. 톰슨가젤을 쫓는 치타처럼 맹목적인 열정을 불태우기도 바쁜 와중에 설운도의 노래처럼 ‘종로로 갈지, 영등포로 갈지,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지’ 갈팡질팡한다. 그러니 결론은 ‘헛방’일 때가 훨씬 많다. 고민이 늘어지다 보니 과녁을 까먹는 탓이다. 인생의 팔할이 ‘소심’으로 점철된 내가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아직은 싱글이던 시절, 내 소심함은 그리 거창한 문제로 비화될 게 없었다. 고작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좁쌀영감’ 소리쯤 들으면 그만이었다. … 음, 이건 아니다. 거짓말이다. 솔직히 말해, ‘그만’일 정도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전전반측했다. 사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좁쌀’ 얘기는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오만 가지 상념으로 천장에 아로새겨졌다. 그 과정을 TV 프로그램 <1박 2일> 보듯 즐기면 좋으련만, 내 소심함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채 썰 듯 상대의 코멘트를 쪼개다 보면 오욕칠정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런 소심함의 궁극에는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내 소심에 가장 많은 백태클을 건 사람을 골라 짚으로 인형을 만든 뒤 눈을 감기고 대바늘로 찔러대는 것, 그리고 천 개의 대바늘을 꽂은 뒤 슬며시 풀어주는 것.
“경우의 수를 너무 많이 헤아리는 초식동물의 쫑긋거리는 귀.” 얼마 전 어느 시인이 소심에 대해 정의한 것을 읽고 무릎을 쳤다. 소심한 사람에게 경우의 수란 3.141592로 시작되는 원주율의 숫자 퍼레이드만큼이나 끝이 없다. 그 와중에 소심이 갉아먹는 건 ‘확신’과 ‘결정’이다. 여자 친구와 영화 한 편 보려 해도 마의 35km 지점을 눈앞에 둔 삼류 마라토너처럼 헉헉대기 일쑤고, 여행 한 번 갈라치면 엘리트 영한사전 두께만큼이나 염두에 둬야 할 게 많으며, 남들은 열 번의 연애에 쏟을 기력을 단 한 번의 연애에 쏟아붓는다. 그마저 대부분의 시간은 상대의 ‘감정 분석’에 할애된다. ‘3시 30분쯤 광화문 돌담길에서 시립미술관으로 접어들 때 그녀가 던진 코멘트는 어떤 의미일까?’ ‘고흐의 <아를의 고흐의 방>이라는 그림 앞에서 그녀가 날 쳐다본 건, 혹시 뭔가 사달라는 제스추어였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해도 책갈피 같은 기념품 정도는 선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쯤되면 중증이라고? 그래도 싱글일 때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서 좀체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를 두고 ‘좁쌀’이라고 훅을 날리면 ‘심사숙고’라는 카운터 펀치로 응수하면 됐다. 마음이 소금밭에 가긴 했지만, 안 보면 그만이라는 해법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는 조금 달랐다. 싱글일 때와 달리 ‘파트너’라는 상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결정’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백컨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소심한 남자를 심리적 코너로 몰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허약하나마 혼자 살 때 챙겨뒀던 호연지기는 자취를 감췄고, 자잘한 결정 하나하나에 법적 조치가 뒤따를 것 같은 공포심도 일었다. 아파트 평수 정하기, 이삿짐 센터와 흥정하기, 산부인과 정하기, 보모 면접하기, 놀이방과 유치원 위치 파악하기 등등이 예전엔 미처 몰랐던 탐구학습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안을 두고 <100분 토론>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끝장 토론>의 지경에 이르면 기어이 아내와 몇 차례의 설전이 벌어진다. ‘초읽기’에 몰린 소심한 남자의 선택은 단 하나다. 쇠고기 협상에 대해 고민 많은 정부처럼 최종 결론 유보, 그리고 침묵. 물론 이때의 침묵은 대화의 끝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내에 대한 순간적인 감정이 바닥을 치긴 하지만, 채 5분을 넘기지 못한다. 십중팔구 걸어 잠근 방문 안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기 일쑤다. 심하면 소심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니, 소심한 남자의 집에선 수시로 온갖 정서적 방황과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디테일들이 창궐한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오래간만에 이른 퇴근을 하자 ‘온 가족 마트행’을 선언한 아내의 등 뒤에서 난 마음속으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오늘도 유통기한을 챙기지 않고 1+1 행사용 우유를 사기만 해봐.’ 전날 새벽에 열어본 냉장고 안에서 유통기한이 나흘이나 지난 우유를 발견하곤 17시간 동안 마음에 품어둔 결과였다. 아내는 그 우유를 일주일 정도 묵힌 뒤 세안용 혹은 샤워용으로 내밀 게 분명했다. 손바닥에 전해진 남은 분량은 꽤 묵직했다. 아내의 호방한 동선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우 코너에 가선 즐겨 찾는 우유를 단호하게 집어들었고, 야채 코너에 가선 진열된 면의 신선도만 확인한 뒤 바통처럼 내 손으로 넘겼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앙꼬빵’만 선택하는 내 취향을 알면서도 밋밋한 밤식빵을 두 봉지나 골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유 코너에 가서 유통기한을 확인한 뒤 교환하고, 야채는 속까지 까보면서 신선도를 체크하고, 밤식빵 한 봉지는 ‘앙꼬빵’으로 바꿨느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액션을 취하는 일이야말로 소심한 남자가 불침번처럼 경계하는 가장 난해한 상황 중 하나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도상훈련하듯 준비한 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아내에게 안겨줄 대사들이었다. 아내가 쏟아낼 다양한 항변들 사이에 몇 초 정도의 호흡을 유지해야 할 것인가가 고려됐음은 물론이다. 이참에 아내의 그 황망한 동선에 확실한 경종을 울리겠다는 것이 내 비장한 의지였다. 그 마지막 결과는? “다음부터 조심할게. 조심하면 되잖아”라는 짧고 명쾌한 반성 앞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내 대사의 대부분은 허망하게 삭제됐고 소심함의 사이즈는 더 커져버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어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아내가 이 소심함을 눈치 채진 않았겠지?’라는 자연발생적 자문, 이건 또 뭐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팔할의 소심한 인생에 대해 심한 자책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폭주족들의 오토바이 소리가 자정 넘긴 시각의 책읽기를 방해할 때 ‘좀 더 남쪽에 있는 아파트를 보자고 했어야 했어’라거나, 구입한 지 한 달도 안 된 자동차를 타고 가다 정작 사려고 했던 모델 옆에 섰을 때 ‘좀 더 쓰더라도 저 차를 샀어야 했어’하는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소심한 성정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과들의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게 큰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상대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소심함이라면 남자에게도 꼭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하는 지론도 챙겼다. “남들이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지,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을지, 어느 식당이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를 생각해두는 순간에 그는, 우주는 어떤 방식으로 팽창하는지, 지구의 종말은 어떤 형태로 닥칠지, 세계 인류의 언어는 몇 종이나 되는지, 다음 차례의 빙하기는 몇 년도에 시작될지를 생각해두느라 바쁘다. 호방함은 간혹 도를 넘어서, 당구를 칠 때에도 옆 당구대로 공을 훌쩍 넘겨버리고는 공이 사라지는 묘기가 가능해졌다고 기뻐한다. 그에겐 당구대는 물론이고 이 우주가 너무 좁다.” <마음 사전>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호방함’에 대한 묘사다. 내가 지금껏 만난 수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이랬다.
소심함의 주된 매뉴얼 중 하나는 백만 번의 자문자답이다. 거기엔 주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직선의 애티튜드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만약 이 남자들에게 ‘소심함’이라는 미덕이 황금비율로 섞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건 몰라도 아내에게 이런 얘길 들을 확률이 좀 더 높아지진 않을까? “당신이 정의감에 불타는 호라시오 반장(미국 외화마이애미편의 주인공)을 유난히 좋아하는 거, 그 소심함을 감추려는 상대적 심리 아닐까? 괜찮아. 남자의 소심함, 심하지만 않다면 쓸모 있잖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만큼은 위력적이던데?”
* 글을 쓴 문일완 씨는 현미경으로 인터뷰 대상을 들여다보거나, 망원경으로 세상의 트렌드를 내다보는 데 능한 글쟁이다. 월간 <바자>의 기자를 거쳐 30대 남성을 위한 잡지 <루엘luel> 편집장으로 일하는 지금도, 세 가지 필명으로 활약하며 단단한 필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엔 ‘소심도 병인 양 한’ 남자에 그만의 현미경을 들이대 촘촘하고 꼼꼼한 글을 만들어냈다. 참, 그는 강감찬 장군처럼 생겼다.
아직은 싱글이던 시절, 내 소심함은 그리 거창한 문제로 비화될 게 없었다. 고작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좁쌀영감’ 소리쯤 들으면 그만이었다. … 음, 이건 아니다. 거짓말이다. 솔직히 말해, ‘그만’일 정도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전전반측했다. 사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좁쌀’ 얘기는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오만 가지 상념으로 천장에 아로새겨졌다. 그 과정을 TV 프로그램 <1박 2일> 보듯 즐기면 좋으련만, 내 소심함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채 썰 듯 상대의 코멘트를 쪼개다 보면 오욕칠정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런 소심함의 궁극에는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내 소심에 가장 많은 백태클을 건 사람을 골라 짚으로 인형을 만든 뒤 눈을 감기고 대바늘로 찔러대는 것, 그리고 천 개의 대바늘을 꽂은 뒤 슬며시 풀어주는 것.
“경우의 수를 너무 많이 헤아리는 초식동물의 쫑긋거리는 귀.” 얼마 전 어느 시인이 소심에 대해 정의한 것을 읽고 무릎을 쳤다. 소심한 사람에게 경우의 수란 3.141592로 시작되는 원주율의 숫자 퍼레이드만큼이나 끝이 없다. 그 와중에 소심이 갉아먹는 건 ‘확신’과 ‘결정’이다. 여자 친구와 영화 한 편 보려 해도 마의 35km 지점을 눈앞에 둔 삼류 마라토너처럼 헉헉대기 일쑤고, 여행 한 번 갈라치면 엘리트 영한사전 두께만큼이나 염두에 둬야 할 게 많으며, 남들은 열 번의 연애에 쏟을 기력을 단 한 번의 연애에 쏟아붓는다. 그마저 대부분의 시간은 상대의 ‘감정 분석’에 할애된다. ‘3시 30분쯤 광화문 돌담길에서 시립미술관으로 접어들 때 그녀가 던진 코멘트는 어떤 의미일까?’ ‘고흐의 <아를의 고흐의 방>이라는 그림 앞에서 그녀가 날 쳐다본 건, 혹시 뭔가 사달라는 제스추어였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해도 책갈피 같은 기념품 정도는 선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쯤되면 중증이라고? 그래도 싱글일 때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서 좀체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를 두고 ‘좁쌀’이라고 훅을 날리면 ‘심사숙고’라는 카운터 펀치로 응수하면 됐다. 마음이 소금밭에 가긴 했지만, 안 보면 그만이라는 해법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는 조금 달랐다. 싱글일 때와 달리 ‘파트너’라는 상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결정’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백컨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소심한 남자를 심리적 코너로 몰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허약하나마 혼자 살 때 챙겨뒀던 호연지기는 자취를 감췄고, 자잘한 결정 하나하나에 법적 조치가 뒤따를 것 같은 공포심도 일었다. 아파트 평수 정하기, 이삿짐 센터와 흥정하기, 산부인과 정하기, 보모 면접하기, 놀이방과 유치원 위치 파악하기 등등이 예전엔 미처 몰랐던 탐구학습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안을 두고 <100분 토론>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끝장 토론>의 지경에 이르면 기어이 아내와 몇 차례의 설전이 벌어진다. ‘초읽기’에 몰린 소심한 남자의 선택은 단 하나다. 쇠고기 협상에 대해 고민 많은 정부처럼 최종 결론 유보, 그리고 침묵. 물론 이때의 침묵은 대화의 끝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내에 대한 순간적인 감정이 바닥을 치긴 하지만, 채 5분을 넘기지 못한다. 십중팔구 걸어 잠근 방문 안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기 일쑤다. 심하면 소심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니, 소심한 남자의 집에선 수시로 온갖 정서적 방황과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디테일들이 창궐한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오래간만에 이른 퇴근을 하자 ‘온 가족 마트행’을 선언한 아내의 등 뒤에서 난 마음속으로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오늘도 유통기한을 챙기지 않고 1+1 행사용 우유를 사기만 해봐.’ 전날 새벽에 열어본 냉장고 안에서 유통기한이 나흘이나 지난 우유를 발견하곤 17시간 동안 마음에 품어둔 결과였다. 아내는 그 우유를 일주일 정도 묵힌 뒤 세안용 혹은 샤워용으로 내밀 게 분명했다. 손바닥에 전해진 남은 분량은 꽤 묵직했다. 아내의 호방한 동선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우 코너에 가선 즐겨 찾는 우유를 단호하게 집어들었고, 야채 코너에 가선 진열된 면의 신선도만 확인한 뒤 바통처럼 내 손으로 넘겼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앙꼬빵’만 선택하는 내 취향을 알면서도 밋밋한 밤식빵을 두 봉지나 골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유 코너에 가서 유통기한을 확인한 뒤 교환하고, 야채는 속까지 까보면서 신선도를 체크하고, 밤식빵 한 봉지는 ‘앙꼬빵’으로 바꿨느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액션을 취하는 일이야말로 소심한 남자가 불침번처럼 경계하는 가장 난해한 상황 중 하나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도상훈련하듯 준비한 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아내에게 안겨줄 대사들이었다. 아내가 쏟아낼 다양한 항변들 사이에 몇 초 정도의 호흡을 유지해야 할 것인가가 고려됐음은 물론이다. 이참에 아내의 그 황망한 동선에 확실한 경종을 울리겠다는 것이 내 비장한 의지였다. 그 마지막 결과는? “다음부터 조심할게. 조심하면 되잖아”라는 짧고 명쾌한 반성 앞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내 대사의 대부분은 허망하게 삭제됐고 소심함의 사이즈는 더 커져버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어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아내가 이 소심함을 눈치 채진 않았겠지?’라는 자연발생적 자문, 이건 또 뭐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팔할의 소심한 인생에 대해 심한 자책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폭주족들의 오토바이 소리가 자정 넘긴 시각의 책읽기를 방해할 때 ‘좀 더 남쪽에 있는 아파트를 보자고 했어야 했어’라거나, 구입한 지 한 달도 안 된 자동차를 타고 가다 정작 사려고 했던 모델 옆에 섰을 때 ‘좀 더 쓰더라도 저 차를 샀어야 했어’하는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소심한 성정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과들의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게 큰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상대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소심함이라면 남자에게도 꼭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하는 지론도 챙겼다. “남들이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지,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을지, 어느 식당이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를 생각해두는 순간에 그는, 우주는 어떤 방식으로 팽창하는지, 지구의 종말은 어떤 형태로 닥칠지, 세계 인류의 언어는 몇 종이나 되는지, 다음 차례의 빙하기는 몇 년도에 시작될지를 생각해두느라 바쁘다. 호방함은 간혹 도를 넘어서, 당구를 칠 때에도 옆 당구대로 공을 훌쩍 넘겨버리고는 공이 사라지는 묘기가 가능해졌다고 기뻐한다. 그에겐 당구대는 물론이고 이 우주가 너무 좁다.” <마음 사전>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호방함’에 대한 묘사다. 내가 지금껏 만난 수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이랬다.
소심함의 주된 매뉴얼 중 하나는 백만 번의 자문자답이다. 거기엔 주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직선의 애티튜드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만약 이 남자들에게 ‘소심함’이라는 미덕이 황금비율로 섞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른 건 몰라도 아내에게 이런 얘길 들을 확률이 좀 더 높아지진 않을까? “당신이 정의감에 불타는 호라시오 반장(미국 외화
* 글을 쓴 문일완 씨는 현미경으로 인터뷰 대상을 들여다보거나, 망원경으로 세상의 트렌드를 내다보는 데 능한 글쟁이다. 월간 <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