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구에는 김현철 씨의 비디오 아트 ‘108번의 삶과 죽음’이 전시되어 있다.
2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전혁림 씨의 작품 ‘새 만다라’.
돼지우리에 걸었던 진주 같은 작품 3층짜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김이환 관장의 표현대로 ‘쌩얼(맨얼굴)’ 이다. 콘크리트만 노출된 게 아니라 철골 일부도 다듬지 않은 채 돌출되어 있다. “공사를 하던 중 달빛 아래서 건물을 척 보니, 일률적으로 튀어나온 철골 아래 달 그림자가 드리워 있대요. 현대 미술품을 보는 듯하여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내부 또한 장식 없이 단출하다. 오로지 작품의 보관과 진열을 위한 미술관을 짓고자 한 그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작품의, 작품에 의한, 작품을 위한 미술관 건립. 김이환 관장과 부인 신영숙 씨의 바람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2001년 부부는 돼지우리를 개조해 그림을 걸었다. 양돈 사업을 하던 부부가 자신들이 모은 작품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축사 일부를 미술관으로 쓴 것이다. 공장으로 쓰던 폐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해외 사례 못지않게 아방가르드한 발상이었다. 1991년 우리나라 최초로 사립미술관 사업 승인을 받아 2001년에 개관했으니, 한국 1호 사립미술관은 돼지 축사에서 출발한 셈이다. 알려졌다시피 부부는 박생광 화백을 후원하다가 작품을 수집하게 되었다. 한국 전통 색의 강렬한 기운을 되살린 작가인 박생광 화백의 작품을 두고 김이환 관장은 ‘오방색이 펄펄 살아 있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반면 신영숙 씨는 처음 화백의 작품을 봤을 때 ‘솔직히 너무 거대하고 무서웠다’고 한다. “어느 순간 독창적인 화법과 걸출한 서사성에 매료되었어요. 하나씩 모으고 나니 작품을 되팔아서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게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어요.” 아흔이 넘도록 붓을 놓지 않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 파리에서 20년간 그림만 그리다 귀국했던 정상화 화백의 작품 등도 17년 전부터 같은 이유로 수집했다. 그러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길이 남게 하려고 직접 나서서 미술관을 열었고 김이환?신영숙 부부 이름의 중간 자를 따서 이영미술관이라 했다. 허름한 돼지우리에 걸린 작품은 진주처럼 빛났다.
3 김이환·신영숙 씨 부부가 수십 년간 작품을 수집하게 된 근간은 작가들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이다.
4 신축된 이영미술관 외관.
5 김이환 관장의 셋째 딸이자 부관장인 김연진 씨는 앞으로 미디어 아트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미술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걸출한 대작 2년 전, 양돈장 자리에 새 도로가 나며 미술관은 잠시 문을 닫았다. 고심 끝에 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다. 1층부터 3층의 전시 공간은 대작을 걸 수 있도록 천장을 높이고 벽을 넓게 했다. 엘리베이터 높이도 3.5m로 큰 작품을 운반하기 위해 특수 제작했다. 2년여의 준비 끝에 지난 6월 4일 신축을 기리며 오픈식을 했다. 개관전에는 전혁림 화백의 폭이 5m 되는 신작 ‘새 만다라’가 공개되었다. 고재를 깎아서 만든 손바닥만 한 나무 접시에 각각 물고기, 태극, 모란 등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유화로 그려 넣은 뒤 이를 1천50개 이어 붙인 작품이다. 완성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신영숙 씨의 지극한 정성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전혁림 화백을 찾아가 물감과 나무 접시를 건네드렸어요. 아흔이 넘은 화백이 미술사에 끝까지 붓질을 남기셨으면 해서요. 일 년에 50여 차례, 5년이니 2백50여 번 다녀왔더니 문양이 죄 다른 나무 접시 1천50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영미술관은 박생광 화백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과 대규모 작품 등 갤러리에서 볼 수 없는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이번 개관전에는 대표작 ‘명성황후’를 비롯, ‘무녀’ ‘토암산의 해돋이’ 등 한국 현대미술사에 획을 그은 그의 대작들이 오랜만에 공개된다. 마당부터 뒷산까지 김이환 관장이 기른 잘생긴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그 사이사이에 우리 시대 마지막 석수石手라고 불리는 조각가 한용진 씨의 거대한 돌조각이 서 있다.
6 소나무 애호가인 김이환 관장이 옛 터전의 소나무를 2년에 걸쳐 옮겨 왔다.
7 박생광 화백의 대표작 ‘명성황후’.
미술관의 미래 건물만 새로워진 게 아니라 영문 이름도 달라졌다. ‘Leyoung Contemporary Art Museum’, 그러니까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전하는 주축이 되고자 한다. 미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셋째 딸 김연진 씨가 부관장으로 합류해 기획을 맡으며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그가 기획한 개관전은 미술관의 비전을 함축한 전시다. 특히 입구에 놓인 김현철 씨의 비디오 아트 ‘108번의 삶과 죽음’은 박생광 화백의 작품 세계를 1백8개의 화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프로젝트로, 미술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아이콘 같은 전시다. “박생광 화백의 작품을 소장하며 시작된 이영미술관은 앞으로 이 시대의 미적 정서와 철학을 대변할 미디어 전시를 적극적으로 열 예정입니다.” 김연진 씨는 미술관이야말로 설치 및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전시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8 돼지 축사 시절의 이영미술관 전경. 이곳에서 작업을 하던 목탄화가 이재삼 씨 작품.
미술관에 갔을 때 혹시 운 좋게 관장 내외를 만나면, 가슴을 흔든 그림 한 점을 골라 작품 해설을 해주기를 정중히 청해보자. 여기에 걸린 그림들은 관람객이 감동하기 이전에 그들이 먼저 울었던 작품이며 그들이 보고 또 본 작품들이니, 주요 모티프부터 작품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 생전의 작가에 대한 일화까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마치 화폭에 숨어 있는 붓 자국까지 생생하게 펼쳐 보여주는 듯하다. 미술사를 전공한 어떤 명민한 큐레이터에게도 나올 수 없을 인생 이야기다.
* 이영미술관의 개관전은 한국 현대 미술사를 수놓은 걸출한 대작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 이어진다. 문의 031-213-8223, www.icam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