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굼실굼실, 능청능청, 우쭐우쭐 춤추듯 품밟기와 활갯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창처럼 찔러 들어오는
택견 기술을 정경화 씨가 선보이고 있다.
“이크! 에크!” 버드나무 가지가 휘듯 허리가 능청거리며, 벌레가 굼실거리듯 무릎을 굽히고 펴기를 되풀이한다. 보법步法의 하나인 ‘품밟기’를 선보이던 정경화 씨는 ‘이크, 에크, 에이크’ 기합 소리를 연신 추임새처럼 넣는다. 다시 두 손이 아래위로, 양옆으로 갈라졌다가 합쳐진다. 학의 날갯짓 같은 이 동작 ‘활갯짓’에는 어떤 묘가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저 하느작하느작, 훠이훠이 움직이는데도 끊임없이 상대를 휩쓴다. 자신의 허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의 중심을 흩트려놓아 공격의 기세를 둔하게 만든다. 수십 년을 단련한 고수의 몸놀림은 문자의 그물로는 도저히 잡아채기 어려운 묘의 세계다. 휘릭. 이내 그의 옥양목 홑바지 춤이 흔들리면서 허리가 회초리처럼 휘어진다. 다리가 안에서 밖으로 크게 곡선을 그리면서 창처럼 찔러 들어간다. 기습적인 발차기로 가격해 상대를 일시에 넘어뜨리는 ‘째차기’다. 명불허전.
2, 3, 4, 5 택견의 기술은 품밟기·활갯짓·발질·손질과 같은 혼자 익히기 기술,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마주메기기, 견주기로 나눌 수 있다. 손발과 몸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상대방과도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무예다. 거기에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지닌 데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기 때문에 여성이 배우기에도 좋은 무예다. 택견 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택견전수관의 신종근ㆍ원화연 사범.
우리 전통 무예의 으뜸인 택견. 고구려 시대까지 연원이 올라가는 택견은 무예의 강인함과 풍류의 신명을 가진 우리만의 고유 무예다. 하지만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법으로까지 금하는 바람에 그 맥이 끊겼다가, 송덕기 옹과 신한승 선생의 노력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정경화 씨는 택견계의 큰 어른 송덕기 옹과 신한승 선생(택견 인간문화재로, 두 인물 모두 1987년 작고)의 직계 제자로, 현재 유일한 택견 인간문화재다. 고등학교 때 몸의 결함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택견은 그 삶을 관통하는 소명·신앙·표상이 됐다. 폐결핵 3기라는 죽음의 고비에서 풍류산 암자에 들어가 생활하던 중 라디오에서 듣게 된 신한승 선생의 인터뷰는 그의 행로를 바꿔놓았다. 고유 문화에 천착하던 그에게 ‘우리 고유 무예’라는 수식은 마력과도 같은 끌림을 안겼다. 무작정 찾아가 배우기 시작한 택견은 건강을 되찾게 했고, 그 후로 택견은 그 삶의 제2막이 됐다. “신한승 선생님은 품밟기를 강조하셔서, 두 달 동안 품밟기만 시키셨지요. 그때 정말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힘든 산속 수련에서 하는 게 겨우 굼실굼실 춤사위인가 싶었죠. 택견을 10년, 20년 했다고 하더라도 품밟기에 따라 택견의 맛이 달라진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또 굼실거리고 능청거리는 택견을 두고 ‘그게 춤이지, 무술이냐?’는 비아냥도 있어서, 다른 무예에 비해 소외감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춤사위 같은, 하지만 온후 속에 강인을 새긴 그 무예에 빠져 그는 30년 넘게 택견의 길을 걸었다. 결혼도 하고 처자를 부양하는 평균적인 삶도, 낮에는 공무원으로 저녁엔 무예인으로 사는 주경야독의 삶도 함께인 채였다. 이것도 스승 신한승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정작 자신은 택견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기능을 전수받다 가산을 탕진하고 말년에는 열 명 남짓의 수련생들과 지붕도 없는 전수관에서 기거했으나, 제자만은 평균의 삶을 살게 하고 싶었던 스승의 뜻이었다. 1995년 그는 신한승 선생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택견 보유자(보통 이 ‘보유자’를 ‘인간문화재’로 통용해 부른다)가 되었다.
“태권도가 직선이라면 택견은 곡선입니다. 기와집 처마처럼 가뜬하게 치켜 올라가면서 굼실굼실, 능청능청, 우쭐우쭐거리죠. 직선으로 가격하기보다는 곡선으로 휘두르거나 밀어야 하죠. 상대를 해치거나 죽이는 목적이 아니라 조화롭게 움직여 상대방의 공격에 응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죠. 발놀림을 앞뒤로 옮기면서 서로의 움직임을 허허실실 전법으로, 신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예입니다. 외유내강의 무예죠.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1 택견의 기술 중 하나인 뛰어차기를 정경화 씨가 선보이고 있다. ‘신통비각술’이란 별칭까지 있는데, 순식간에 상대의 봉곳(상투를 묶는 끈)을 차 떨어뜨리는 높이차기가 택견 최고의 기술이다.
하지만 택견이 오로지 온후하고 낭만적인 무예만은 아니다. 안에서 우러나오는 엄청난 뱃심이 상대를 일시에 절명케 할 수도 있다. 정경화 씨가 “섰거라!(대련 시작 때 외치는 소리)”를 외치며 살인기술이라는 결련수 몇 가지를 선보인다. 상대를 낚아채며 뒷목을 치는 ‘항정치기’, 반줌(반주먹)으로 턱을 치는 ‘낙함치기’, 쇄골을 부수는 ‘손도끼질’…. 모두 상대의 뼈나 인대를 끊는 살수들이다. 그 다음엔 ‘신통비각술’이라 불리기도 하는 뛰어차기다. 상대의 봉곳(상투를 묶는 끈)을 차서 떨어뜨리더니, ‘두발낭상(앙감질로 뛰어올라 상대의 턱 차기)’을 하는데 보는 이의 뒷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다. “이 기술은 분별력이 부족한 젊은이에게 가르쳤을 때 상대를 죽게 하거나 불구로 만들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무예를 찾는 이들이 대부분 겨루기에 경도돼 있고 점점 이기는 게 미덕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만, 택견의 궁극은 덕德입니다. 남에게 베풀 줄 아는 마음, 바로 덕이지요. 택견의 기본 겨루기 자세만 봐도 불필요한 힘의 소모와 신체 손상을 피하면서 상대와 일정하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는 격식과 존중이 겨루기 기술 하나하나에 들어가 있지요. 진정한 택견인은 온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호연지기를 갖춰야 합니다.” 덕이라는 덕목은 한낱 격투기가 아닌 무武의 예술, 곧 무예의 경지로 택견을 이끄는 요소다. 택견이 오랜 풍파 속에서도 맥을 끊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외공의 기술보다 내공의 정신이 더 셌기 때문이리라.
2, 3, 4, 5 세 박자의 스텝에 맞춰 품밟기와 활갯짓을 하는 정경화 씨. 굼실굼실 움직이는 발놀림과 들썩이는 어깨는 마치 탈춤을 닮았다.
택견은 3박자로 호흡과 동작이 이뤄진 데다 그 움직임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인의 눈에 익고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조차 쉽게 따라할 수 있다. 부드러운 동작과 곡선의 몸놀림으로 이루어져 근육이나 관절에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도 적합하다. 또 발질이나 걸이 기술 등은 근력 보강과 호신 기능에도 탁월하고, 호흡법은 정신 수련과 집중력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택견은 인간이 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놀림의 무예이자 우아한 기예다. 수십 년을 연공한 고수의 몸놀림을 지켜보자면 자신도 모르게 황홀경에 빠져들고 만다. 동작은 바늘 끝처럼 최소한의 모양으로 응축돼 작아진 채로 군더더기 없고, 흐트러짐 없이 고도로 절제되어 있으나, 그 안에서 장중한 힘을 뻗는 고수의 몸놀림. 감탄을 넘어 찬미를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세계다. “택견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간직해온 아름다운 몸짓입니다. 문화유산은 이런 것이죠. 민족의 핏줄로 전승된 것으로, 후세가 반드시 아끼고 지켜야 할 예술.” 태평양보다 더 큰 소명으로 사지를 불태우며 살아온 무예인, 그의 눈은 청년의 몸처럼 호르몬으로 들끓고 있었다.
6 ‘고무다리’로 통했다는 정경화 씨의 발질. 다리를 안에서 밖으로 크게 내차는 ‘째차기’로 발이 그려내는 곡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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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을 배우려면 택견은 태권도처럼 ‘단’ 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괄목할 만한 실력이 연마되면 택견꾼이 되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지도자나 선생으로 대접받는다. 택견 수련은 집중력 연마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섯 살쯤부터 일찍 접하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고故 송덕기 선생에 의해 다시 부활한 택견은 현재 몇 개 단체로 나뉘어 있다. 대한택견협회(02-413-2707, www.taekkyon.or.kr), 결련택견협회(02-733-2469, www.taekyun.org), 택견원형보존협회(02-438-6866, http://taekgyeon.net)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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