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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에 대한 에피소드는 비단 드라마와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중년 여성들의 일만은 아니다. 팔팔한 세일즈맨도 ‘그놈의 기억력’ 때문에 허둥대는 경우가 많다. 가령 길거리에서 만난 은행 과장님처럼 생긴 남자, 분명 안면 있는 사람인데 이름과 소속이 기억나지 않을 때. ‘아악, 고객일지도 모르는데. 어서 기억이 나야 할 텐데, 누굴까?’라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오면 으악, 정말 어디론가 숨고 싶다. ‘디지털 치매’라는 말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람에 기억력이 저하된 상태를 이르는 신조어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기억력 감퇴로 고민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세상에는 ‘기억력 천재’라 불리는 사람도 있다. 1965년생 이스라엘 남자 에란 카츠Eran Katz는 5백 자리의 숫자를 한 번 듣고 기억해 기억력 부문에서 세계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를 돌며 기억력에 관한 강연과 세미나를 하는 그가 기억을 잘하는 노하우에 대해 쓴 책 <슈퍼 기억력의 비밀>(황금가지)이 최근 국내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기억력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실제로 만난 그는 아주 유머러스하고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그래서 답답했던 속사정을 편하게 털어놓았다.

책에서도, 강연에서도 나름의 기억법을 만들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인가요? 무작정 외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잘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창의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기억력 향상법을 소개합니다. 이때 연상작용이 필요한데 저는 특히 ‘유머와 상상력’을 강조합니다. 가령 오늘 통역을 도와주러 이 자리에 온 최원 씨의 이름을 기억할 때는 한국 돈 단위인 ‘원’을 떠올렸습니다.

기억법에서 유머와 상상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언가가 정말 재미있으면, 인상에 남게 마련입니다. 인상에 강렬했던 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그것이 재미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지루하게 읽었던 책의 저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신나게 읽은 책은 몇 년 뒤에도 줄거리까지 다 기억하지요. 자녀가 지리 시간에 배운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시험 점수가 형편없었다고요? 그렇다고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학생들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 선수 이름은 수십 명씩 외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선수가 어떤 게임에서 역전골을 넣었는지도 기억합니다.

지난밤 재미있게 본 영화의 주연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찰나, 그 배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인상 깊게 보았다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저 같은 경우도 누가 갑자기 다가와 “저 기억하세요?”라고 하면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시험 받고 있다’임을 인지하는 순간, 기억하려고 해도 뇌가 정지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기억력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스트레스입니다. 예컨대 현금인출기에 가서 돈을 찾으려는데,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습니다. 그러면 ‘헉, 비밀번호가 뭐였지? 뭐였더라?’ 하면서 패닉 상태에 빠져서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예로 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 이름이 순간 떠오르지 않아 “아, 누구였더라? 있잖아, 그 잘생긴 배우 말이야” 하다 보면 정말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영화를 보며 그 배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으면서도 그의 이름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학창 시절부터 기억법을 훈련했다던데, 공부를 잘했나요? 암기 과목의 경우 남들보다 빨리 외우고 난 뒤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했습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시험 기간에도 즐겁게 지냈습니다.

어릴 적에 받은 이스라엘식 교육이 기억력 증진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닌지요? 전 세계에 사는 유대인은 1천만 명에 불과하지만, 역사상 노벨상 수상자의 40%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학교에서 언제나 질문하도록 격려하고, 토론 수업을 치열하게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배운 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이게 최선인지 등에 늘 호기심을 가지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질문하는 습관이 지식 습득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혹시 지능지수IQ가 높으신가요? 한 번도 검사해본 적 없습니다. 근데 아내랑 결혼한 건 그가 “내가 당신보다 IQ가 더 높아”라고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웃음) 어쨌든 제 지능지수는 평범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멈추고 그는 기자더러 “1. 강아지 2. 컴퓨터 3. 녹차 …하는 20가지 리스트를 임의대로 정한 뒤, 한 번만 읽어주세요”라고 했다. 이 리스트를 듣더니 곧 그대로 외워 보였다. 역순으로도 외웠는데 두 번 모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어떤 방법으로 외우셨는지요? 저는 숙달된 전문가이므로 제 책에 나온 기초적인 단계가 아닌, ‘기마트리아’라는 복잡한 이스라엘식 기억법을 응용합니다. 1은 T, 2는 N 하는 식으로 숫자를 문자화해 기억하지요. 여러분은 연상작용으로 욀 수 있습니다. 가령 ‘강아지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인 1번에 앉아 있다가 컴퓨터를 물어 뜯었더니, 거기서 녹차가 새어나왔다’ 하는 식의 엉뚱한 상상으로 이어가는 거지요.

그럼 방금 외운 것을 일 년 뒤에도 떠올릴 수 있나요? 오늘 한 번 왼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기억법은 단기 기억을 위한 겁니다. 만일 유효기간을 일 년으로 늘리려면, 1주일에 한 번씩 반복 학습을 해야 합니다.

전화번호는 몇 개나 외우고 있으신지요? 저도 여러분처럼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저장해놓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운전 중 통화하다가 누가 전화번호나 계좌번호를 불러주면, 아까의 그 기억법으로 암기할 수 있고 두 시간 뒤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종이에 적습니다.

기억력이 좋으면 외국어를 잘할 수 있나요? 미국의 한 리서치에 따르면 어떤 언어든 6백 단어만 알면 그 언어로 된 신문을 읽을 수 있답니다. 단어 암기도 연상법을 응용하세요. 제가 두 딸에게 ‘blue’와 ‘green’을 가르칠 때는 이렇게 했습니다. “파란 바다에서 물고기가 ‘블루블루(뻐끔뻐끔)’ 하면서 헤엄친단다. 초록색 잔디를 잔디 깎는 기계로 ‘그린그린~’ 하면서 손질한단다.” 재미난 건 동양권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보다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외국어 능력은 기억력보다는 회화에 도전하는 용기에 달린 일일지도 모릅니다.

에란 카츠는 지금까지 전 세계를 다니며 1천2백여 번의 강연과 세미나를 했다. 세일즈맨이 고객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방법, 학생들이 시험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 주부들이 생활 속에서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방법 등을 주로 전한다.

기억력에 관한 강연과 세미나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은 고민이나 질문은 무엇인가요? 단골 질문은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였습니다. 사실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뭐, 괜찮습니다. 그런데 만난 적 있는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척 당황스럽고 미안한 일이지요. 반면에 한 번 만났던 누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 상대가 남다르게 보입니다.

당신이 받은 가장 인상 깊은 질문은 무엇인지요? 와우, 아마도 바로 이 질문이 가장 인상적인 질문인 것 같네요, 하하. 하나 있습니다. 슬픈 질문이었어요. 유대인대학살 때 살아남은 한 노인이 “어떻게 하면 기억을 잊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도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어요. 현재를 즐기며 살도록 노력하시라고.

한국 주부들은 무선전화기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찾기도 합니다. 중년이 되면 건망증이 심해지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나이 탓을 하며 기억력을 불평하는데, 우선 그게 사실이 아님을 믿으세요. 가령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은 일 년에 고작 몇 번이며 오히려 대개의 경우 열쇠를 잘 쓰고 있죠. 분실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한 깜빡 잊는 것은 ‘병’이 아닙니다. ‘산만함’에서 비롯된 현상이지요. 나이 들수록 스트레스도, 신경 써야 할 것도, 걱정도 많아집니다. 반면 어린아이들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생각하니, 집중력과 기억력이 높습니다.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지요. 휴대전화에는 ‘삼성’조차 여러분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비밀 버튼이 있습니다. 바로 ‘전원 끄기’ 버튼입니다. 대개 24시간 내내 켜두시는데, 때론 과감히 끄세요. 일을 하다가 도중에 1분 동안 통화했다면, 그 집중 상태로 다시 돌아오는 데 20분 정도 걸립니다.

<슈퍼 기억력의 비밀>은 이론서가 아닌 실용적인 안내서다. 그리고 유머를 좋아하는 작가가 기억력 감퇴의 원인과 기억을 쉽게 하는 방법 등에 대해 재미있게 풀어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읽는 동안 ‘기억법을 기억할’ 필요도 없이, 즐기다 보면 인상적이었던 기술을 생활에 적용해보게 된다. 어렵지도 않으니 초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자녀에게도 기억법을 가르쳐봤을 텐데. 우리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 글쎄, 저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전문가라고 해도 그들의 아빠이고, 애들은 아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딸들은 시험 때가 되면 방법이 없겠느냐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책에는 다양한 기억법이 수록되어 있으니 자녀의 성향에 맞게 가르치세요. 가령 역사 공부를 시킬 때 예술적인 기질이 있는 큰딸에게는 역사를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구성하게 했고, 논리적인 둘째딸에게는 사건 사이의 관계를 따져보게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쉽게 정보 검색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전화번호도 휴대전화에 저장하면 되지요. 그럼에도 기억력이 좋으면 유익한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뇌를 쓰고 기억 훈련을 할수록 알츠하이머에 걸릴 확률이 줄어듭니다. 뇌를 단련하는기억법은 뇌 건강을 위해서 좋지요. 둘째, 가령 슈퍼마켓에 갈 때도 리스트를 메모한 종이를 손에 든 채 카트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쇼핑에 집중할 수 있지요. 셋째, 이 시대 사람들은 기계에 의존하므로 정신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러니 아마 5백 년 뒤 몸집은 점점 커지고 머리(뇌)는 작아질지도 모르죠. 기억 훈련을 하면 그런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기억법에 대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지요? 모두들 즐겁게 살기를 바라니까요. 제 기억법은 고도의 창의력과 관련됩니다. 연상작용을 하다 보면 상상력이 풍부해집니다. 되도록 평범한 상상이 아닌, 아주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상상을 해보세요. 즐겁기도 하고,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에란 카츠는 강조한다. “기억력은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 없다. 기억력 중 ‘약한’ 부분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