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 ‘불후의’ ‘거대한’ 같은 형용사는 부적합할지도 모릅니다. 45년 넘게 연기하며 그는 여백 같은 진실 한 토막을 우리에게 던져줬을 뿐입니다. 사는 건 그렇게 꿰맨 자국으로 가득한 천 조각 같은 거라는, 인생에는 훌륭한 바보도 있으며 불행한 영웅도 있고 뻔뻔스러운 희생자도 있다는 진실 정도. ‘45년 연기 인생 첫 주연 영화’란 레테르를 매단 <방울토마토>의 개봉을 앞두고 신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나는 일은 복잡한 보물찾기 같았습니다. 수많은 신문사, 잡지사, 방송사에서 그에게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터뷰 요청서들에 이런 답을 주었습니다. “인터뷰는 귀찮다. 젊었을 때부터 기자들은 늘상 같은 말만 물어본다. 인터뷰에서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많지만 연기는 아니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인터뷰를 반도 안 했는데 “다 됐지 이제? 그만하지.”라고 30분 만에 기자를 밀어낸다는 간담 서늘한 풍문도 나돌았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헌신한 배우의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행운이겠다고, 욕심을 좀 부려봤습니다.
<방울토마토>의 기자 시사회를 세 시간 앞둔 오후, 감정의 침입이라곤 한 치도 없이 꾹 다문 입술로 그가 들어섰습니다. 커피숍을 메운 사람들의 눈이 그의 김구 선생 같은 안경에 꽂히고, ‘어어, 허당 신구다!’ 일순에 유쾌한 미소들이 작열합니다. “시트콤 하고 CF 하고 나니까 젊은 친구들이 인터넷에 무슨 내 방도 만들고. 길 가다 애들이 귀엽다는 소리도 해주고. 그러면 나도 기분 좋아져. 애들이 그래도 아무 상관없어.” 누가 자동차를 긁어놓았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눈으로 말합니다. “그랬어어.” 하면서 미# 음계 정도로 늘 끝을 말아올리는 말투, 그러다가도 일순에 명사형으로 닫혀버리는 짧은 답, 눈썹 사이에 온천 마크를 그리면서 말해도 하나도 미워 보이지 않는, 하지만 어딘지 음영이 있는 얼굴…. 현역 배우 중 이순재 선생 다음으로 최고령이라는 일흔세 살의 배우 신구 선생입니다.
나는 애드리브 없는 배우
아버지를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아들이 아버지 소일하시도록 비디오 작동법을 가르쳐 주던 그 장면, 기억하시나요? 많은 이들이 ‘배우 신구의 최고의 영화’로 꼽는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장면입니다. 문틈 사이로 죽음을 앞둔 아들의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 아들이 왜 리모컨 작동법을 가르쳐주는지 가슴팍이 미어지게 느끼면서도, 무심한 듯 내보이는 아버지. ‘아버지 전문 배우’ 신구 선생이 표현해낸 얼굴입니다. 그 무심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는 자칫 헤프게 터져나올 사랑을 단속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처마처럼 완고하게 드리운 그의 눈꺼풀 안에는 삶에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온 자식이 기댈 넉넉한 품이 있습니다. “감정 폭발보다는 억제가 더 중요하지. 그게 더 밀도 있게 전달된다는 얘기. 으응.”
그는 코믹 연기를 할 때도 ‘억제’라는 항목에 항상 방점을 찍습니다. 망가진 색소폰을 주워 왔다는 타박에 색소폰으로 물도 퍼담고 마늘도 빻으면서 맞서는(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노구’ 역) 연기에서도 그는 무표정 일색입니다. “상황은 코믹한데 본인은 심각할 때 진짜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신구 선생님은 코미디를 잘 알고 느낄 수 있는 배우다. 대본에 충실하면서 그 맛을 잘 살리는 ‘준비된 코미디’를 하신다. 과잉되는 느낌이 없어서 순수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연출했던 김병욱 PD는 웃기려는 의도를 감출 줄 아는, 진짜 ‘선수’로 신구 선생을 꼽습니다. 신구 선생이 “토끼 끝이야!”를 외치는 유명 CF를 만든 은세종 감독은 “신구 선생의 연기는 의식적 코믹 연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실적이지만 극중 조연이나 시청자의 반응과 결합해 유머를 완성하는 연기다. 쿠퍼스 광고 2편에서 용왕이 외신 기자의 영어 질문에 당황, 황당, 성가심이 뒤섞인 미묘한 침묵으로 대꾸하는 순간은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시트콤 찍으면 망가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드라마의 한 장르고 연기야. 코믹한 상황이 연출되면 그 흐름을 잘 이해하는 연기가 시트콤이야. 나는 애드리브를 하지 않는 배우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고맙습니다>에서도 내가 한 애드리브는 한 번도 없어. 그만큼 대본에 충실한 거지. 으응. 만약 내가 애드리브를 한 것처럼 보였다면 작가가 잘 써준 덕분이야. 난 대본에 충실한 배우야.” 그는 가볍게 던지는 말조차 드라마에 해가 될까 절제한다고 합니다. “그건 내가 연극하면서 배운 거야. 근데 또 내 성격이 그래. 으응. 스스로 절제를 잘하는 편이야. 많이 참고 남한테 싫은 소리 잘 안 하고. 남한테 손도 안 벌리고. 어차피 자기가 아는 인물을 연기하는 거거든. 배우가 자기를 벗어나서 어떻게 연기를 하나? 모양새나 색깔을 달리할 수는 있겠지만 내 살아온 경험이 연기에 다 나오는 거지. 그래서 배우의 품성이나 생활 반경, 학식 같은 게 중요한 거야.” 웃긴데 슬프고, 슬픈데 웃긴, 참으로 묘한 그의 연기는 이렇게 완성되는 것인가 봅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토끼 끝이야!” “다 먹고 봐!”와 같은 그의 호통은 시청자에게 강속구로 날아와 꽂힙니다. 그에게 ‘니들’로 호명 당한 우리는 고집불통 어른에게 야단맞는 묘한 즐거움을 ‘욕 먹으며’ 얻습니다.
이름대로 오랠 구久
1936년 서울 태생, 김우중·이준용 회장 같은 이가 동기인 명문 경기고 출신, 서울대 상대 낙방 후 2차로 붙은 성균관대 국문학과에서 한 1년 남짓한 공부, 군대 제대 후 찾아간 연극아카데미(서울예대 연극과의 전신으로 유치진 선생이 설립), 전무송 이호재 씨와 함께 누빈 연극아카데미 생활…. 스물다섯 살 이후로 연극이라는 거룩하고도 광포한 예술은 그의 광포한 젊은 날을 휩쓸었습니다. “연극아카데미 마룻바닥에 내 땀 안 묻은 데가 없어. 열심히 했는데 바로 돈 벌 길은 없고. 시간 남으면 다른 극단 무대에까지 출연하면서 동가식서가숙했지. 유치진 선생이 ‘신순기’라는 내 이름 대신 ‘오랠 구久’ 자 써서 지금 이름도 지어주셨어. 그땐 선생님이 어려워서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못했고 결국 가실 때까지도 물어보지 못했어. 아마도 오래 한 길 가라는 뜻 아니었나. 으응. 이름대로인지 일흔 넘어서도 현장에서 오래 일하잖아. 흐흥.”
TV와 영화로 운신의 폭을 넓힌 후에도 그는 본향인 연극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엔 연극만 하고 살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이나 그때나 연극만 해서는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드라마나 영화로 곁눈질한 건데. 지금도 나를 누르고 있는 게 그 강박관념이야.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연극을 해야 된다, 해야 된다 하는데 또 끊임없이 다른 데서 섭외가 오거든. 근데 그거를, 텔레비전 딱 잘라서 제쳐놓고 연극에다 시간을 올인한다, 그게 잘 안 돼. 그래서 지난번에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순정만화> 같은 거, 꼭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드라마 <쩐의 전쟁>이 들어와서 또 못했지. 연극을 하게 되면 매일 나가서 해야지, 빠지면 상대에게 영향을 준다고. 나는 지금 나름대로의 생활 패턴이 있잖아. 예를 들어 3~4개월 일 접고 연극만 해서 내 생활 패턴이 과연 평탄하게 가는지 이런 걸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봤단 말이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면 딱 무 자르듯 자르고 그럴 텐데. 그래서 연극하는 사람들한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 같고, 그래. 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지. 영화 <간 큰 가족> 끝나고 국립극장에서 바로 연극 <떼도적> 한 것도 그런 이유야. 연극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니까. 미인대회 출신으로 갑자기 스타가 된 젊은 배우들은 웃을 이야긴지 모르지만.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의 모태 같은 거니까 없어질 수 없다(‘다’라는 어미를 역시 미 #의 어조로). 배우들이 연극을 꼭 해봐야 돼. 그게 바탕이 된다. 드라마는 철학성, 문학성이 별로 없어. 연극적 체험이 중요하지.” 연극 연출가 이윤택 씨는 신구 선생을 “당대 최고의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의 악마 역)다. 인간이 악마일 수 있다고 연상한다면 바로 신구 선생의 연기”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근데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까맣고 빨간 인물들은 다 내 차지였어. 간첩이나 악마 역할 수없이 했어. 지금이야 늙어서 독이 좀 빠져서 그렇지 그때는 고집도 세 보였고 주인공감으로 잘생기지도 않았으니까. 나 생긴 게 이런데 뭐.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전원주 씨하고 찍은 멜로가 생애 최초 멜로지.” 두 배우 모두 멜로에 한맺힌 배우들이어서였는지 <고맙습니다>에서 보여준 멜로는 지고지순했었지요. 아주 절절했습니다.
“우리 마누라하고 멜로? 장가도 못 가고 한참 연극에 빠져 있을 때지. 그때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 상태론 결혼해서 여자 데려다 놓으면 굶길 거 같애. 그래서 결혼하자고 못하니까 여자가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미국으로 도망가버려서 내가 장문의 편지 써보내고 그랬지. 옷 디자인하던 아가씨였는데, 내 편지 읽고 돌아왔어.
그 실력으로 글 썼으면 작가 다 됐을 거다. 그 아가씨랑 서른아홉 살에 결혼을 했는데, 그러고서도 연극에만 빠져 살았으니까 내가 큰소리칠 입장이 안 됐지. 집에서 자는 시간은 한 달에 닷새밖에 안 되고. 집에 들어가면 고생했으니까 자야 하고. 남편 구실 할 시간도 없고 바람 피울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생겨 먹기를 자상하고 그렇질 못해. 나는 대본 외우고 나 할 것만 하고 살아서, 마누라가 살림을 다 챙겼지. 지금은? 오래 같이 살다 보니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 고맙지. 업고 살진 못해도 잘해줘야지. 행복하냐고? 흐흥. 서로 말 없이 그냥 있다거나, 옆에서 자기는 나하고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아주 편하고 그럴 때, 뭐 손으로 닿거나 만져지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게 행복이겠구나 하지.” 사람들은 세상의 아내들이 평생 밥하느라 불행했고, 남편들은 평생 밥 벌어오느라 불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밥하고, 밥벌이하는 인생을 우리가 불행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비참해집니다. 그의 말처럼 밥하고 밥벌이한 고마운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행복하고 족한 인생 아닐까요.
배우로 끝까지 살려면 출렁거리지 말고 노력해야지
한국 영화가 하늘로 오르는 잭의 콩나무처럼 호황일 때 아버지 역은 그가 도맡았습니다. 그의 분신으로서의 아버지는 색깔이 좀 남다릅니다. 그는 번듯한 집안의 아버지나 재벌 사장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시골 영감 아니면 도시 빈민일 뿐이지요. 평범한 집안 아버지여도 태아처럼 리모컨을 꼬옥 쥔 채 웅크리고 잠든 힘 없는 아버지거나, 아들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있을 만큼’ 친하거나 다정한 사이가 아닌, 남도 아니지만 나는 더더욱 아닌 아버지를 연기했습니다.
“실제 내가 아버지가 된 거는 1974년인데 이미 첫 연극 데뷔할 때부터 아버지 연기를 해왔으니까. 애 낳고도 뭐 아버지 연기를 다시 고쳐봐야겠다 그러진 못했어. 지금은 아들이 성장해서 애도 낳고 그랬지만, 걔한테 내가 아버지로서 바람직하게, 긍정적으로 비쳐졌을까 생각하면 잘한 거 같지는 않아. 그냥 지가 자란 거 같은 생각이 들어. 사실 나는 내 성격이 싫어. 소극적이야.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하고. 그래서 걔는 좀 강하고 나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이렇게 살길 바랐는데 피가 뭐 어디로 가겠어. 나하고 집사람하고 아들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이 없어. 우리 집은 절간이야. 이순재 형이, 와서 냉장고 다 뒤져가더라도 딸들이 낫다고 그러대. 흐흥.”
그는 자신을 두고 ‘사회에서는 아주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휴대전화 문자 확인하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고, 인터넷을 쓸 줄도, 공과금을 어떻게 내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행성에 사는 것으로 운명지워진 스타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연기하는 것 말고는 남들이 느끼는 만큼, 사는 만큼 사는 걸로 행복해하는 아버지. 하지만, 연기만 시작하면 금방 내린 눈처럼 여백만 남은 도인 같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무거운 비밀을 집어삼킨 노인 같기도 한 명배우. “젊은 사람들하고 일하는 게 좋아. 감독이나 배우나 내 연배인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불편할 게 뭐 있나. 지들은 지들 일 하고 나는 내 일 하는 거지. 어린 배우들이 나하고 연기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하는데, 그거 헛소리야 헛소리. 지들이 배우긴 뭘 배워. 다들 똑부러지게 잘하면서. 나 어렸을 때는 저렇게 못했던 거 같은데 말이지. 난 젊은이들하고 작업하면서 NG 내는 거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기억력이나 기력이 쇠퇴하니까 고심도 더 되고 대본도 더 보게 되고. 요즘은 자꾸 까뭇거려. 그래서 옛날만큼 하려고 더 노력하고. 그게 우리 자존심이다. 배우로 끝까지 살려면 출렁거리지 말고 건강 유지하면서 노력해야지.”
출렁거리지 않고 오래 연기하고 싶어 그는 하루에 소주 한 병씩 마시고 편하게 자고(소주 한 병은 그의 활력소다) 어김없이 매일 새벽 네 시쯤 일어나 8km를 속보로 걷습니다. 어제 실수한 거 없나, 술 먹고 헛소리 하지 않았나, 나가서는 애들한테 싫은 소리는 안 했나 생각하며 걷고 걷습니다. “놀랄 게 뭐야. 그나마 내가 운동이라도 해놔야 언제 무슨 섭외가 와도 작업을 잘할 수 있으니까 줄창 날 가다듬고 있는 거지. 사회가 끊임없이 나한테만 행운을 줄 수가 있나. 어차피 나이가 들고 그러면 순환되는 거고. 45년 동안 흡족했던 연기? 그런 게 어디 있나. 아니 또 놀랄 게 뭐야. 45년이 아니라 백 년을 연기해도 똑같은 인물 만날 수 있나. 다 다르잖아. 연기 완성했다는 순간, 그 배우는 다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먹고 살 일용거리는 연기밖에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걸로 돈 벌 재주가 없더라고. 어쩌겠어. 연기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러니까 건강 유지하고 언제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자 그러는 거지. 계획? 계획은 무슨. 없어. 아까부터 계속 말하잖아. 어떤 놈이 줘야지 받지. 주면 받는다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나? 배우는 그런 거라니까. 나이 일흔이 넘어 들어오긴 뭐가 많이 들어와.”
시든 꽃잎에도 영광이 깃들었다고 믿게 하는 그의 연기는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네요. 이순재 선생은 그를 두고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노력으로 하나하나 제치고 정상에 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연기의 공든 탑을 쌓아온 그의 첫 주연 영화 <방울토마토>(사실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겨울 이야기>가 첫 주연 영화지만 개봉하지 못했다. 신상옥 감독 타계 후에 SBS에서 추모 특집으로 새벽 1시에 한 번 방영한 적이 있다)는 희망조차 삶의 무게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철거촌의 폐지 줍는 노인과 혹 같은 손녀가 풀어내는 가족 이야기에서 그는 “살아야지, 그렇고 말고. 무조건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관객들에게 말합니다. 철거촌에서도 쫓겨난 박구 영감(신구 분)이 부잣집 개와 고기 한 점을 두고 싸우는 참혹하고 슬픈 광경에서도 그는 말합니다. “무조건 살아야 하는 거야. 희망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
그를 상대로 긴 질문과 짧은 대답의 느린 신진대사를 벌인 후 든 생각은 그는 세상이 필적할 수 없는, 추종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게 아니라면 장사조차도 못했으리라는 그지만 어떤 연기를 해도 세상 속 지도를 읽어주는 사람, 한 시대의 습속을 보여주는 배우니까요. 이제 그에게 ‘불후의’ ‘거대한’ 같은 형용사를 헌정하고 싶어졌습니다. 새경도 없이 묵묵히 밭을 가는 농부처럼 연기해온 그의 공력 앞에. 여전히 더 좋은 연기를 내놓고 싶어 매일 8km를 걸으며 준비하는 일흔셋의 정열에.
헤어지면서 그가 내 어깨를 도닥입니다. 그 무심한 듯 뜨끈한 손짓에 목구멍이 컥컥해집니다. 아, 돌아가서 그 무심한 손을 잡고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