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필 씨는 나이 40세까지도 ‘꿈’이 없었던 남자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거나 딱히 열정을 쏟아 하고 싶은 게 없어서였을까? 추측은 틀렸다. 그는 젊어서부터 도대체 세상에서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만 ‘꿈’으로 고를 수 없었단다.
덕분에 그의 프로필은 화려하다. <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한국아이비엠에서 PR 매니저로 활동하다가 인텔코리아 마케팅 중역을 거쳐 인터넷 벤처 회사를 차렸다. 여기까지는 젊은 시절의 이력서다. 중년에 접어들어 그의 인생은 훨씬 파란만장해졌다. 그러나 말로 요약하자면 역설적이게도 단 한 줄, ‘종합예술가’이다.
컴퓨터 벤처 사업가, 예술가로 변신 2001년 이상필 씨는 인터넷 벤처 사업을 접고 재즈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아내는 물론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잘나가는 전자 업계 사업가가 갑자기를 회사를 그만두고 춤바람이 났으니 불안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을까. 당시 두 딸은 열한 살, 일곱 살. 한국형 아버지들은 교육비 버느라 한창 바쁠 때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잖게 벌어도 허망한 걸 어쩌겠는가. 정작 그는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지만 끈질기게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
시간이 흘러 아내는 내심 ‘저러다 지치면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체념과 응원이 뒤섞인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백수가 된 이상필 씨는 본격적으로 재즈 공부에 돌입했다. 이미 1999년부터 재즈 가수 윤희정 씨에게 지도받았던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보컬인 양수연 씨와 이영경 씨에게 즉흥 연주와 보컬, 이어 트레이닝을 받았다. ‘전업 예술가’를 꿈꾸었던 그는 하루 열 시간 이상 트레이닝에 투자했다. 청음 감각을 훈련하는 이어 트레이닝은 ‘마치 대리석에 붓으로 글씨를 새기는 기분’일 정도로 고되고 끝이 안 보였다. “재즈 공부는 숨 쉬듯 꾸준히 해야 어느 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재즈가 편안한 공기처럼 제 감각을 들락날락할 수 있을 때까지 무조건 연습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재즈 음악을 감상했다. 2년 동안 재즈 음반 5백여 장을 구입해 죄 들었다. 노력 끝에 ‘윤희정과 프렌즈’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음악에 이어 ‘춤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재즈에 이어 온갖 음악을 섭렵하다 보니, 탱고와 플라멩코 음악에 매료되었다. 이상필 씨는 2004년 탱고 춤과 음악을 함께 공부하러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얼마 뒤 일시 귀국했을 때 플라멩코 음악이 또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전설적인 무용가 후아킨 코르테스 공연을 보고 난 뒤 플라멩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크리스티나 헤렌 재단에서 칸테(플라멩코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소리로 플라멩코의 감성을 표현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다. “나를 툭 열고 노래의 리듬을 타다 보니 몸이 들썩였어요. ‘아, 춤을 춰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플라멩코는 너무 난해했다. 한국에서 취미로 각종 춤을 배워 기본기가 탄탄했던 그였지만, 리듬부터가 한국 정서와 판이한 플라멩코에 몸이 녹아들기란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사바테오(빠르게 발 구르기)’를 연습하다 발톱이 다 빠지고 발등의 뼈가 다 튀어나왔습니다. 순간 깨달았죠. ‘아, 아직 플라멩코를 출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라고요.”
한국에 잠시 귀국했다가 2005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갔다. 탱고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탱고 음악은 유럽 이민자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 배반, 근원적인 슬픔 등을 표현한 음악, 즉 인간의 오욕칠정을 응축한 심장의 소리입니다. 그 민족의 문화를 잘 모르는 제가 들어도 애수가 느껴졌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향수 같은 거죠.” 이때부터 이상필 씨는 프로페셔널 댄서가 될 결심을 했다.
늦깎이가 댄서의 몸을 만들기란 전문 댄서가 되려면 몸을 가다듬어야 한다. 어떤 박자도 소화할 수 있도록 유연하고도 타이트한 근육을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균형감도 갖춰야 한다. 음악을 온몸으로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홀홀단신 아르헨티나로 간 이상필 씨는 잠자는 시간 외에 탱고뿐 아니라 발레와 스트레칭 훈련에 전념했다.
“굳은 뼈와 근육을 풀기란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유연한 젊은이들보다 노력을 배로 들이고, 무섭도록 꾸준해야 하지요. 하루라도 쉬면 몸이 금방 굳어요.” 그는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다. 시간과 돈을 뺏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얼마나 좌절했는지요. 음악 전문가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몸으로 리듬과 음을 표현하려면 몸이 따로 놀았지요. 귀로만 듣는 것과 다른 문제였어요. 게다가 두세 번째 동작을 익히고 나면 첫 번째 동작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며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하는 생각에 불끈 일어났어요.”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 아르헨티나의 춤 강습소에 가서 자그마한 동양인이, 그것도 나이든 남자가 춤을 배우겠다고 하니 위아래 훑어 보더란다. ‘어디 해봐라’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무섭게 춤에 몰입하자 그들은 긴장했다. 허물없이 친해진 뒤 그들은 “넌 분명히 전생에 댄서였을 거야”라며 한바탕 웃었다.
이상필 씨는 20여 년의 직장 생활 경력이 춤을 배우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직장에서 쌓은 프로 정신이 춤을 익히고 스스로 훈련하는 의지를 다지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가령 춤을 배울 때 그는 매주 일주일간 스케줄을 짠 뒤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연습에 돌입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프로젝트를 완수해내던 근성 덕분이었다. “제게는 ‘하고 싶다’는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자랐습니다.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거죠. 이 사명감이 뭔가를 완벽하게 수행하게 만듭니다. ‘하고 싶다’가 예술가의 열망이라면, ‘해야 한다’는 프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죠.”
나는 종합예술가, 여든 살까지 춤출 것이다 요즘 이상필 씨는 아르헨티나에서 탱고 강사로도 활동한다. 이제 어느덧 춤이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아이들의 방학에 맞춰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그는 “이번에 아르헨티나에 가면 노래를 1년 정도 더 공부한 뒤에 탱고 음반을 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연 준비에 돌입할 것이다. 춤과 노래 등이 혼연일체된 공연을 구상하고 있다. 몸, 목소리 등 모든 것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단다. 주제에 따라 수단을 자유롭게 변용할 것이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 장르를 창조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제 꿈은 탱고 댄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플라멩코 댄서나 재즈 보컬리스트도 아니지요. 궁극적으로는 종합예술가가 꿈입니다.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춤과 노래에 관심이 많아요. 전 ‘인생은 즉흥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걸어온 길을 보아도 그렇지요.”
즉흥적인 결심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냈고, 그때마다 고난과 쾌락이 함께 찾아왔다. 비유하자면 남들보다 100m 달리기를 좀 더 자주 한 셈이다. 열정을 다해 출발하지만, 뛰다 보면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웠고, 뛰고 나면 단단하고 유연한 근육이 생겨 중력을 이기는 자유로운 몸이 만들어진다. “원하는 표현을 해내려면 배워서 연습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업과 마찬가지로 아티스트가 되는 길에도 요령은 없더라고요. 동작을 완전히 체득하기 전까지는 고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익숙해진 뒤에 무대에 서면 짜릿하지요.”
음악을 하겠다고 출사표를 낸 지 이제 8년째. 결심 당시 최소 10년 동안 갈고 닦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지난한 고비를 무수히 넘기고 이제 머지않아 많은 이들 앞에 데뷔할 것이다. “데뷔가 끝은 아니지요. 아티스트란 직업이 아니라 곧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계속 갈고 닦기만 하면 여든 살까지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어요. 자기의 에너지 범위 내에서 훨씬 깊이 있는 표현을 할 수 있겠지요.”
이상필 씨의 인생 후반전 노하우
1 춤이든 음악이든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취미 수준으로 생각해서 하다 말다 하면 안 된다. 어느 하나라도 집중적으로 몰두해라.
2 즉흥적인 결심도 좋다. 그러나 훈련할 때에는 반드시 계획을 세워라 ‘하다 보면 되겠지’라는 자세로는 무엇도 이룰 수 없다.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변화를 관찰하며 애초의 계획을 계속 수정해야 한다.
3 무엇보다 즐기면서 해라 욕심이 앞서 너무 과하게 연습하면 제풀에 지쳐서 병이 난다.
4 내 공간을 만들어라 작업실이든 연습실이든, 그게 집의 일부든 독립된 공간이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라.
5 불안해하지 말고 시간이 쌓이기를 기다려라 무슨 일이든 시간이 쌓여야 얻는 법이다. 조바심내지 말고, 수행하듯이 익혀라. 최소 10년 동안 고통과 쾌락을 즐기면서 꾸준히 훈련하라.
덕분에 그의 프로필은 화려하다. <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한국아이비엠에서 PR 매니저로 활동하다가 인텔코리아 마케팅 중역을 거쳐 인터넷 벤처 회사를 차렸다. 여기까지는 젊은 시절의 이력서다. 중년에 접어들어 그의 인생은 훨씬 파란만장해졌다. 그러나 말로 요약하자면 역설적이게도 단 한 줄, ‘종합예술가’이다.
컴퓨터 벤처 사업가, 예술가로 변신 2001년 이상필 씨는 인터넷 벤처 사업을 접고 재즈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아내는 물론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잘나가는 전자 업계 사업가가 갑자기를 회사를 그만두고 춤바람이 났으니 불안하지 않을 아내가 어디 있을까. 당시 두 딸은 열한 살, 일곱 살. 한국형 아버지들은 교육비 버느라 한창 바쁠 때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잖게 벌어도 허망한 걸 어쩌겠는가. 정작 그는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지만 끈질기게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
시간이 흘러 아내는 내심 ‘저러다 지치면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체념과 응원이 뒤섞인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백수가 된 이상필 씨는 본격적으로 재즈 공부에 돌입했다. 이미 1999년부터 재즈 가수 윤희정 씨에게 지도받았던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보컬인 양수연 씨와 이영경 씨에게 즉흥 연주와 보컬, 이어 트레이닝을 받았다. ‘전업 예술가’를 꿈꾸었던 그는 하루 열 시간 이상 트레이닝에 투자했다. 청음 감각을 훈련하는 이어 트레이닝은 ‘마치 대리석에 붓으로 글씨를 새기는 기분’일 정도로 고되고 끝이 안 보였다. “재즈 공부는 숨 쉬듯 꾸준히 해야 어느 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재즈가 편안한 공기처럼 제 감각을 들락날락할 수 있을 때까지 무조건 연습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재즈 음악을 감상했다. 2년 동안 재즈 음반 5백여 장을 구입해 죄 들었다. 노력 끝에 ‘윤희정과 프렌즈’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음악에 이어 ‘춤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재즈에 이어 온갖 음악을 섭렵하다 보니, 탱고와 플라멩코 음악에 매료되었다. 이상필 씨는 2004년 탱고 춤과 음악을 함께 공부하러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얼마 뒤 일시 귀국했을 때 플라멩코 음악이 또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전설적인 무용가 후아킨 코르테스 공연을 보고 난 뒤 플라멩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크리스티나 헤렌 재단에서 칸테(플라멩코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소리로 플라멩코의 감성을 표현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다. “나를 툭 열고 노래의 리듬을 타다 보니 몸이 들썩였어요. ‘아, 춤을 춰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플라멩코는 너무 난해했다. 한국에서 취미로 각종 춤을 배워 기본기가 탄탄했던 그였지만, 리듬부터가 한국 정서와 판이한 플라멩코에 몸이 녹아들기란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사바테오(빠르게 발 구르기)’를 연습하다 발톱이 다 빠지고 발등의 뼈가 다 튀어나왔습니다. 순간 깨달았죠. ‘아, 아직 플라멩코를 출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라고요.”
한국에 잠시 귀국했다가 2005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갔다. 탱고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탱고 음악은 유럽 이민자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 배반, 근원적인 슬픔 등을 표현한 음악, 즉 인간의 오욕칠정을 응축한 심장의 소리입니다. 그 민족의 문화를 잘 모르는 제가 들어도 애수가 느껴졌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향수 같은 거죠.” 이때부터 이상필 씨는 프로페셔널 댄서가 될 결심을 했다.
늦깎이가 댄서의 몸을 만들기란 전문 댄서가 되려면 몸을 가다듬어야 한다. 어떤 박자도 소화할 수 있도록 유연하고도 타이트한 근육을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균형감도 갖춰야 한다. 음악을 온몸으로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홀홀단신 아르헨티나로 간 이상필 씨는 잠자는 시간 외에 탱고뿐 아니라 발레와 스트레칭 훈련에 전념했다.
“굳은 뼈와 근육을 풀기란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유연한 젊은이들보다 노력을 배로 들이고, 무섭도록 꾸준해야 하지요. 하루라도 쉬면 몸이 금방 굳어요.” 그는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다. 시간과 돈을 뺏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얼마나 좌절했는지요. 음악 전문가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몸으로 리듬과 음을 표현하려면 몸이 따로 놀았지요. 귀로만 듣는 것과 다른 문제였어요. 게다가 두세 번째 동작을 익히고 나면 첫 번째 동작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며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하는 생각에 불끈 일어났어요.”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 아르헨티나의 춤 강습소에 가서 자그마한 동양인이, 그것도 나이든 남자가 춤을 배우겠다고 하니 위아래 훑어 보더란다. ‘어디 해봐라’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무섭게 춤에 몰입하자 그들은 긴장했다. 허물없이 친해진 뒤 그들은 “넌 분명히 전생에 댄서였을 거야”라며 한바탕 웃었다.
이상필 씨는 20여 년의 직장 생활 경력이 춤을 배우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직장에서 쌓은 프로 정신이 춤을 익히고 스스로 훈련하는 의지를 다지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가령 춤을 배울 때 그는 매주 일주일간 스케줄을 짠 뒤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연습에 돌입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프로젝트를 완수해내던 근성 덕분이었다. “제게는 ‘하고 싶다’는 마음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자랐습니다.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거죠. 이 사명감이 뭔가를 완벽하게 수행하게 만듭니다. ‘하고 싶다’가 예술가의 열망이라면, ‘해야 한다’는 프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죠.”
나는 종합예술가, 여든 살까지 춤출 것이다 요즘 이상필 씨는 아르헨티나에서 탱고 강사로도 활동한다. 이제 어느덧 춤이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아이들의 방학에 맞춰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그는 “이번에 아르헨티나에 가면 노래를 1년 정도 더 공부한 뒤에 탱고 음반을 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연 준비에 돌입할 것이다. 춤과 노래 등이 혼연일체된 공연을 구상하고 있다. 몸, 목소리 등 모든 것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단다. 주제에 따라 수단을 자유롭게 변용할 것이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 장르를 창조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제 꿈은 탱고 댄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플라멩코 댄서나 재즈 보컬리스트도 아니지요. 궁극적으로는 종합예술가가 꿈입니다.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춤과 노래에 관심이 많아요. 전 ‘인생은 즉흥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걸어온 길을 보아도 그렇지요.”
즉흥적인 결심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냈고, 그때마다 고난과 쾌락이 함께 찾아왔다. 비유하자면 남들보다 100m 달리기를 좀 더 자주 한 셈이다. 열정을 다해 출발하지만, 뛰다 보면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웠고, 뛰고 나면 단단하고 유연한 근육이 생겨 중력을 이기는 자유로운 몸이 만들어진다. “원하는 표현을 해내려면 배워서 연습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업과 마찬가지로 아티스트가 되는 길에도 요령은 없더라고요. 동작을 완전히 체득하기 전까지는 고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익숙해진 뒤에 무대에 서면 짜릿하지요.”
음악을 하겠다고 출사표를 낸 지 이제 8년째. 결심 당시 최소 10년 동안 갈고 닦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지난한 고비를 무수히 넘기고 이제 머지않아 많은 이들 앞에 데뷔할 것이다. “데뷔가 끝은 아니지요. 아티스트란 직업이 아니라 곧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계속 갈고 닦기만 하면 여든 살까지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어요. 자기의 에너지 범위 내에서 훨씬 깊이 있는 표현을 할 수 있겠지요.”
이상필 씨의 인생 후반전 노하우
1 춤이든 음악이든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취미 수준으로 생각해서 하다 말다 하면 안 된다. 어느 하나라도 집중적으로 몰두해라.
2 즉흥적인 결심도 좋다. 그러나 훈련할 때에는 반드시 계획을 세워라 ‘하다 보면 되겠지’라는 자세로는 무엇도 이룰 수 없다.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변화를 관찰하며 애초의 계획을 계속 수정해야 한다.
3 무엇보다 즐기면서 해라 욕심이 앞서 너무 과하게 연습하면 제풀에 지쳐서 병이 난다.
4 내 공간을 만들어라 작업실이든 연습실이든, 그게 집의 일부든 독립된 공간이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라.
5 불안해하지 말고 시간이 쌓이기를 기다려라 무슨 일이든 시간이 쌓여야 얻는 법이다. 조바심내지 말고, 수행하듯이 익혀라. 최소 10년 동안 고통과 쾌락을 즐기면서 꾸준히 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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