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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 번째 돌아온 봄
생의 찬란함이 어찌 한 시절뿐일까. 겨울의 끝에 봄이 기다리고 있듯 우리의 삶 속 형형한 순간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또다시 찾아온 이 계절을 마주한 안현모와 올해로 1백1세를 맞은 그의 외할머니 강정숙 여사. 낭랑하게 빛나던 그들의 아주 특별한 하루를 포착했다.

하운즈투스 체크 패턴 블레이저는 자라, 하프넥 니트는 셀렙샵 에디션, 달 모양 진주 브로치는 민휘아트주얼리 제품. 헤어 장식은 에디터 소장품.

비대칭 네크라인 셔츠블라우스와 올리브 컬러 팬츠는 쉐르, 이어링은 코스, 리본 샌들은 찰스앤키스 제품.
봉오리를 펼친 꽃은 응당 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단어의 심연에는 덧없는 인생의 허무가 고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무르익고 썩는 건 한 번의 사계절 안에서 이뤄지지만, 계절은 무한히 순환한다는 사실을. 춘분을 지나 밤보다 낮이 길어진 4월의 어느 날, 통역사이자 방송인 안현모를 만났다.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후 기존에 진행하던 과학수사 프로그램 <스모킹 건> MC 출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마친 그의 모습은 산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현모의 표정이 유달리 밝아 보인 건 특별한 손님과 촬영장에 동행했기 때문. 겨울 끝자락에 태어나 첫 봄 이후 어느덧 1백1번째 봄을 다시 맞은 그의 외할머니 강정숙 여사가 화보를 찍기 위해 함께 나섰다. 새하얀 벚꽃잎이 온 세상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날이었다.


안현모가 입은 화이트 셔츠는 로렌 랄프 로렌, 라벤더 베스트는 코스, 라운드 이어링은 H&M, 강정숙 여사가 입은 레더 트렌치코트는 아르켓, 플리츠스커트는 셀렙샵 에디션 제품. 모자는 에디터 소장품.


비즈와 시퀸을 장식한 재킷은 자라, 자수정 세팅 링과 바로크 펄 네크리스는 민휘아트주얼리, 하트 셰이프 크리스털 링은 스와로브스키 제품. 헤어 장식은 에디터 소장품.
영원한 남편의 뮤즈
“할머니, 저희 오늘 여기서 사진 찍을 거예요.” 스튜디오 입구에서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안현모와 강정숙 여사가 보였다. 다른 한 손에 든 지팡이로 조심스레 땅을 짚으며 걸어 들어오는 그의 입가엔 고운 미소가 지그시 맺혀 있었다. 1백 세가 넘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영락없는 소녀인 외할머니와 손녀딸이 함께하는 특별한 화보. 이는 안현모의 제안에서 시작했다.

“제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한 포토그래퍼가 저희 외할머니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연락을 하셨어요. 그분과 함께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나니 문득 왜 나는 여태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싶더라고요. 시간이 더 흐르기 전, 각 분야 전문가가 힘모아 찍은 할머니 사진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죠.” 전문 모델이나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수십 명의 스태프가 자신만 바라보는 현장에서 피사체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어딘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한참을 헤맨다. 안현모도 물론 고령인 외할머니의 컨디션과 더불어 이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 그럼에도 뚝심 있게 추진한 건 나름의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의 뮤즈였어요.”

안현모의 외할아버지는 아주 오랜 시간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실력이 상당해 문교부 신인예술상 장려상과 입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 부문 입선 등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다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인 2000년에는 그동안 찍은 사진 중 1백여 장을 추려 비매품으로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제 와 솔직히 말하자면 촬영을 진행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첫 컷을 찍기 직전까지 내심 걱정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셔터를 누르자 강정숙 여사의 표정이 곧장 변했다. 유쾌한 현장 분위기에 깔깔 소리내 웃기도 하고, 중간중간 모니터에 뜬 사진을 보고는 흡족한 듯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안현모는 마치 항복하듯 두 손을 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 오늘 할머니께 완전히 졌어요.”


모델보다 더 모델 같은 모습에 욕심이 난 포토그래퍼가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자 어느 순간 강정숙 여사가 “아이고, 이제 그만!”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할머님 진짜 딱 한 컷만 더 찍을게요”라는 손주뻘 되는 포토그래퍼의 애교 섞인 요청에 금세 다시 포즈를 취했다. 그 모습에 앞서 말한 외할아버지 사진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쓰고 남한산성 담벼락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강정숙 여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떠올랐다. 아마도 가장 아끼는 사진이라 맨 마지막에 배치했을 터. 뒤편으로 울긋불긋한 잎사귀의 나무가 듬성듬성 보이는 걸 보니 아마도 가을의 초입이지 않았을까. 한쪽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쪽 눈은 뷰파인더에 찰싹 붙인 채 무릎을 조금 더 낮춰보라며, 입꼬리를 살짝만 더 올려보라고 말하는 남편과 그만하라고 외치다가도 애정 담긴 요청에 다시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포즈를 취하는 아내. 오직 둘만이 알고 있는, 그러나 이젠 한 사람만이 말해줄 수 있는 아주 오래전의 일을 상상했다.


강정숙 여사가 입은 링클 디테일 크롭트 재킷과 벨티드 원피스는 자라, 리본 모양 진주 브로치는 민휘아트주얼리, 플랫 펌프스는 미소페 제품. 헤어 장식은 에디터 소장품. 링은 본인 소장품. 안현모가 입은 벨티드 재킷과 플리츠스커트는 빠투, 스트랩 펌프스는 찰스앤키스 제품.
변치 않는 손녀의 롤 모델
잠시 쉬는 시간, 안현모가 강정숙 여사에게 물려받은 시계를 꺼내며 이야기했다. “할머니 이거 기억나세요? 저에게 직접 물려주신 거잖아요.” 강정숙 여사가 무심하게 답한다 “내 손을 떠나면 끝이지. 나는 몰라. 기억 안 나.” 그러자 안현모가 애지중지 보관한 건데 서운하다며 투정을 부렸다. 누가 봐도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손녀딸의 모습이다. 하지만 안현모에게 강정숙 여사는 그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예뻐한 외할머니만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가닿고 싶은 롤 모델이기도 하다. “그 긴 세월 동안 누구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가족 중 할머니가 화내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죠. 타인에게 폐 끼치는 것도 늘 경계하시고요. 아까도 촬영을 마치고 할머니만 따로 먼저 모셔다 드리려 하니 택시를 타고 가도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어요. 물론 저희가 설득해 함께 동행했지만요.”

안현모의 말을 실감한 것은 강정숙 여사와 잠시 대화를 나눴을 때다. 당신의 촬영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붙어 종알종알 질문을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귀찮은 내색 없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답해주었는데, 질문 중 하나는 ‘인생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삶에 대한 조언’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오히려 내가 배울 게 참 많아. 지금 시대는 나 때와 너무 달라서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어.” 변화하는 사회를 감지하고, 편협해지는 걸 경계하며, 1백 세가 넘어서도 배울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니 똑 부러지기로 소문난 안현모가 평생에 걸쳐 닮고 싶어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듯했다. “할머니를 보며 늘 소녀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오랜 세월 한결같이 지켜온 삶을 배우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덕분이라는 걸.” 안현모는 이어 외할머니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꽃이란 단어가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번도 진 적 없는 듯한 얼굴로 고아하게 피어난 강정숙 여사의 모습은 이 봄,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떠한 꽃보다도 아름다웠으니. 


외할머니가 물려준 시계와 외할아버지의 사진집. 풍경 및 외할머니, 엄마, 큰 언니의 사진이 담겼다.

화보 진행과 스타일링 정장조 | 사진 김외밀 | 헤어 김은진 | 메이크업 권희선 제품 협조 로렌 랄프 로렌(02-3479-1465), 미소페(02-3479-1357), 민휘아트주얼리(02-544-2313), 빠투(02-3213-2378), 셀렙샵 에디션(1644-2525), 스와로브스키(02-3438-6108), 쉐르(02-3449-5302), 아르켓(02-3277-8416), 자라(080-305-1200), 찰스앤키스(070-8833-5881), 코스(02-3446-4820), H&M(02-3446-4828)

글 양혜연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