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천 년간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는 무엇입니까? 새 천 년을 앞둔 1999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특집 기사에 실린 싱가포르 리콴유 전 수상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바로 에어컨이지요.” 우리보다 뒤늦게 1965년에 독립한 후, 아무런 산업 기반도 없는 서울 크기의 작은 열대 섬나라를 불과 30년 만에 초일류 선진국으로 탈바꿈시킨 지도자의 답변답지요. 적도 바로 아래 일 년 내내 타들어가는 더위에 에어컨이 없다면? 1인당 GDP 5만 달러가 넘는 오늘날의 싱가포르는 한낱 신기루 속 오아시스 같은 꿈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춥다고 보일러 온도계를 만지작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도 싱가포르 못지않게 더워졌지요? 리콴유 수상의 에어컨 예찬에 전적으로 찬동할 수밖에 없는 땡볕 여름입니다. 올봄 북촌 계동에 조그만 한옥을 얻어 연구실로 꾸밀 때까지만 해도 에어컨 없이 올여름을 날 수 있겠거니 했습니다. ‘바람 잘 드는 한옥은 원래 시원하잖아?’ 어릴 적 여름방학 때 시골 외할머니 댁 대청마루에 누우면 얼음 띄운 수박화채와 덜덜거리는 선풍기만으로도 서늘했으니까요. 허허!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무늬만 한옥인 집을 잘못 얻었나? 프레온 가스와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이토록 심대한 것인가? 에어컨 없이 지내려니 요즘 더워 미치겠습니다!
최근 <사이언스>에 발표된 유전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조상이 추운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해서 4만~5만 년 전쯤에 한반도 쪽으로 북상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더운 날씨에 잘 견디는 유전자를 타고난 셈이지요. 그 덕에 이 땅에 정착한 이래 수만 년간 별 무리 없이 여름을 잘 났는데, 지난 몇 년 동안 갑자기 우리네 유전자에 ‘더위 못 참기’ 돌연변이가 생긴 모양입니다. 우리가 연중 찜통 같은 싱가포르도 아니고, 여름 한 철 잠깐 찾아오는 더위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죠. 조금만 땀이 차도 짜증이 치솟는 ‘더워 죽겠다 증후군’이 우리의 유전형질 속에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증후군으로 인해 팔팔한 사람이 실제 죽었다는 사례는 없다지요.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더위 관련 질환은 고작해야 ‘열실신’ ‘열경련’ ‘열사병’ 정도입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더운 날씨에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만 건강한 사람이 여름철 일상 활동에서 이런 탈을 겪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증상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시원한 곳에서 물 한잔 마시고 잘 쉬면 금세 회복하지요. 한의학에서는 오히려 여름을 덥게 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생명과 천지 만물의 기운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순행하는데, 봄에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生) 여름에 무성하게 자랐다가(長) 가을에 거두어 들여(收) 겨울에 그 정기를 씨앗에 저장해두는(藏) 것이 순리라고 봅니다.
여름철이 더운 이유는 생명의 기운을 무성하게 밖으로 펼치기 위한 것이지요. 온도가 올라가면 공기든, 쇠든 팽창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름을 춥게 난 사람은 낮에 햇볕을 보지 못한 꽃처럼 기 氣의 생성과 발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 응축할 생명 에너지가 모자라게 됩니다. 폭염 속에 벼가 제대로 영글어야 가을에 굵고 기름진 쌀알이 맺히는 것을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지요.
“그래, 올여름 제대로 덥게 나보자.” 이번 달 칼럼을 준비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내친김에 에어컨 대신 황학동에서 녹물이 제대로 밴 나름 빈티지풍 선풍기도 한 대 사고, 지인을 졸라 죽부인도 하나 얻었지요. 아, 그래도 덥긴 덥데요. 어쩌다 에어컨 광고만 봐도 귀가 솔깃, 절로 눈길이 꽂힙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덥게 날수록 건강에 좋은 거야’ ‘땀이 나네? 체표의 나쁜 기운이 빠져나와 더 가뿐해지겠구나!’ 어색하지만 계속 주문을 욉니다. 그런데 이것,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효과가 있습니다! 더운 것이 고마운 일이려니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큰 노력 없이 시원할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실낱같은 바람에도 시원하게 땀이 잘 마릅니다. 몸도 정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아랫배가 훈훈하고 코가 맹맹하던 증상도 말끔히 사라졌어요. 하하, 전기세도 지난여름보다 덜 나와 이달에만 20만 원의 공돈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큰 주문을 욀까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모든 에어컨이 고장 나기를! 올여름 제대로 뜨거운 생명의 정기를 달구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쓴 김정우 소장은 서울대와 경희대에서 각각 의학과 한의학을 전공했다. 현재 북촌 계동의 소담한 한옥 상락재 常樂齋에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을 연구하면서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한다. 또 라티아 안티에이징 클리닉(http://clinic.ratia.co.kr)과 대한동서노화방지의학회를 이끌고 있다.
최근 <사이언스>에 발표된 유전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조상이 추운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원래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해서 4만~5만 년 전쯤에 한반도 쪽으로 북상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더운 날씨에 잘 견디는 유전자를 타고난 셈이지요. 그 덕에 이 땅에 정착한 이래 수만 년간 별 무리 없이 여름을 잘 났는데, 지난 몇 년 동안 갑자기 우리네 유전자에 ‘더위 못 참기’ 돌연변이가 생긴 모양입니다. 우리가 연중 찜통 같은 싱가포르도 아니고, 여름 한 철 잠깐 찾아오는 더위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죠. 조금만 땀이 차도 짜증이 치솟는 ‘더워 죽겠다 증후군’이 우리의 유전형질 속에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증후군으로 인해 팔팔한 사람이 실제 죽었다는 사례는 없다지요.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더위 관련 질환은 고작해야 ‘열실신’ ‘열경련’ ‘열사병’ 정도입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더운 날씨에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만 건강한 사람이 여름철 일상 활동에서 이런 탈을 겪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증상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시원한 곳에서 물 한잔 마시고 잘 쉬면 금세 회복하지요. 한의학에서는 오히려 여름을 덥게 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칩니다. 생명과 천지 만물의 기운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순행하는데, 봄에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生) 여름에 무성하게 자랐다가(長) 가을에 거두어 들여(收) 겨울에 그 정기를 씨앗에 저장해두는(藏) 것이 순리라고 봅니다.
여름철이 더운 이유는 생명의 기운을 무성하게 밖으로 펼치기 위한 것이지요. 온도가 올라가면 공기든, 쇠든 팽창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름을 춥게 난 사람은 낮에 햇볕을 보지 못한 꽃처럼 기 氣의 생성과 발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 응축할 생명 에너지가 모자라게 됩니다. 폭염 속에 벼가 제대로 영글어야 가을에 굵고 기름진 쌀알이 맺히는 것을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지요.
“그래, 올여름 제대로 덥게 나보자.” 이번 달 칼럼을 준비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내친김에 에어컨 대신 황학동에서 녹물이 제대로 밴 나름 빈티지풍 선풍기도 한 대 사고, 지인을 졸라 죽부인도 하나 얻었지요. 아, 그래도 덥긴 덥데요. 어쩌다 에어컨 광고만 봐도 귀가 솔깃, 절로 눈길이 꽂힙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덥게 날수록 건강에 좋은 거야’ ‘땀이 나네? 체표의 나쁜 기운이 빠져나와 더 가뿐해지겠구나!’ 어색하지만 계속 주문을 욉니다. 그런데 이것,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효과가 있습니다! 더운 것이 고마운 일이려니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큰 노력 없이 시원할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실낱같은 바람에도 시원하게 땀이 잘 마릅니다. 몸도 정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아랫배가 훈훈하고 코가 맹맹하던 증상도 말끔히 사라졌어요. 하하, 전기세도 지난여름보다 덜 나와 이달에만 20만 원의 공돈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큰 주문을 욀까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모든 에어컨이 고장 나기를! 올여름 제대로 뜨거운 생명의 정기를 달구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쓴 김정우 소장은 서울대와 경희대에서 각각 의학과 한의학을 전공했다. 현재 북촌 계동의 소담한 한옥 상락재 常樂齋에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을 연구하면서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한다. 또 라티아 안티에이징 클리닉(http://clinic.ratia.co.kr)과 대한동서노화방지의학회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