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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루醋慺에 담긴 흑초의 시간
산 좋고 물 맑기로 소문난 전라도 남쪽의 끝자락 보성군 득량면 시골 동네에 터를 잡은 이곳의 이름은 초루다. 이름에 중층적 의미가 숨어 있을수록 작명을 잘한 것이라는데, 초루가 그러하다. 노지에 자리한 항아리밭에서 정성으로 숙성시키는 흑초의 공간을 뜻하기도 하고, 흑초를 기반으로 한 복합 공간으로 누마루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풍류를 즐기기 적합한 곳이라 알려주는 듯도 하다. 무엇이 되었든 이곳에서는 한국의 여섯 가지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얼·흥·정·멋·맛·격이 그것으로, 그 심지는 자연과 진정성에 기반한다.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

초루에 들어서면 어머니 품 안에 안기듯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오봉산과 해평호수, 삼나무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분지에 자리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다.

3년산과 5년산 흑초와 발사믹흑초, 구슬흑초 등을 맛볼 수 있다.
세상의 부러움을 살 만한 너른 부지의 땅이 있다고 치자. 풍수적으로 보아도 명당으로 불릴 만하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곳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물론 목적에 따라 결과물도, 당장에 주어질 주머니 사정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새로운 건축물과 창조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느 순간에 행복한가?” 초루는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최진섭·한상미 부부가 그에 대해 내놓은 현답이다.

“이곳은 분지로 폭 감싸는 지형입니다. 전라도 말로 표현하자면 ‘옴팍집니다’. 풍수적으로도 거리낄 것이 없지만 자연 조건이 워낙 훌륭합니다. 이 공간을 망치는 일은 무엇이 됐든 하지 않는 것이 제1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환경적이고 친생태적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인위적인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자연을 해치지 않으려고 고심하며 공들였지요. 자연에 둘러싸여 쉼을 통해 어머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이 흑초입니다. 12년째 유기농 현미와 쌀누룩 그리고 천연 암반수로 식초를 발효·숙성시키고 있습니다.”


알코올이 식초로 변화되는 과정으로 보름이 지나면 생기는 얇은 초산막. 이틀에 한 번 점검해 발효 촉진을 돕는다.

빌려 쓰는 만큼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최진섭・한상미 대표.
초루는 최진섭 대표가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농장을 꾸리고 싶은 꿈을 실현한 곳이자, 20여 년간 심리치료연구소를 운영한 한상미 대표가 많은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시금 회복하고 다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녹아난 공간이다. 진지한 질문으로 들어선 길이라 그 여정이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만큼 진정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이와 엄마가 손잡고 심리치료실에 들어설 때와 치료를 하고 나갈 때의 모습은 표정부터가 달라요. 그 맑게 개인 모습을 초루에서 재현하고 싶었어요. 일상에서 벗어나 사회적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할까요. 시간의 켜가 만들어낸 흑초를 맛보고, 자연을 오감으로 체험하면서 자신의 원형을 느낄 수 있도록요. 따로 또 함께 말이에요.”


발사믹 그리크 요구르트 볼에 발사믹흑초를 적당량 담고 요구르트를 넣는다. 그 위에 제철 과일, 견과류, 그래놀라 등을 취향대로 올린다. 발사믹구슬흑초를 토핑으로 올린 뒤 발사믹흑초를 한 번 더 뿌린다.
흑초맨드라미차 흑초(15ml), 메이플 시럽(30ml), 맨드라미 우린 물(150ml)을 잘 섞는다. 맨드라미차는 붉은 컬러가 식욕을 자극하고 여성의 자궁 건강에 좋지만, 없다면 물만 섞어도 무방하다. 여기에 레몬즙을 약간 섞는다.
흑초 레몬 디톡스 물(1L)에 레몬(1개)을 슬라이스해 넣은 후 5년산 흑초를 소주잔으로 ⅔ 정도(30ml) 넣어 잘 섞는다.

흑초유자된장현미주먹밥 흑초・된장・유자청을 적당량 섞어 핸드 믹서로 갈아 양념장을 만든다. 현미밥에 양념장과 녹찻잎 그리고 매실장아찌나 무초절임을 다져 넣고 잘 섞어 주먹밥을 만든다. 그릇 위에 연근칩을 놓고 주먹밥을 올린 뒤 흑초블록을 그라인더로 갈아 곁들인다.
땅에서 비롯된 비범한 흑초
노지에 자리한 초루의 2천5백여 개 항아리밭에서는 자연의 기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연 발효 흑초가 익어간다. 내로라하는 식초 장인의 훌륭한 흑초도 실외에서 발효할지언정 자연 그대로의 흙 위에서 맛이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이니, 초루 흑초의 비범함은 땅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선으로 치자면 양식이 아닌 자연산이랄까. 노지에서 태양의 에너지를 오롯이 받고, 바람과 비를 맞으며 발효・숙성하는 자연의 산물인 것이다. 낮에는 햇볕의 온기가, 밤에는 단단한 토양이 흑초 항아리를 지켜준다. 3백 년 동안 9대째 이어온 이학수 옹기 장인의 항아리를 사용하는 이유도 땅기운을 고스란히 식초에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보성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차도 아니고 왜 식초, 그것도 흑초에 이토록 공을 들이는 것일까?

“발효 식품을 매개로 체험도 하고, 명상도 하는 복합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식초는 역할에 비해 유독 과소평가된 발효 식품이에요. 보성 땅에 차가 잘되는 이유는 온도와 습도는 물론 천혜의 자연환경이 그에 걸맞기 때문이지요. 식초도 커피나 와인 못지않게 테루아가 중요한데, 이 땅이 그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십수 년을 식초 양조를 공부하고 연구해온 최진섭 대표는 누가 봐도 식초 전문가요 기술자지만,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식초 장인으로 불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포장하는 꾸밈말은 아끼면서도 식초 이야기엔 표정부터 신이 난다. 평생을 다져온 사업가의 기민한 감각을 사로잡은 아이템을 제대로 선보이기 위해 애정으로 다져온 기술인 것이다.

“좋은 식초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술이 필요합니다. 좋은 술을 얻기 위해서는 전분을 당화시키는 곰팡이 효소, 바로 누룩을 만들어야 하지요. 초루의 흑초는 우리 쌀로 만든 누룩과 현미 고두밥, 지하 80m에서 끌어 올린 천연 암반수로 해마다 5~6월에 딱 한 번 술을 빚고 식초를 만듭니다. 첫 담음부터 당화 알코올 발효, 초산 발효, 숙성 발효까지 하나의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는 것이 초루 흑초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해가 거듭될수록 흑초의 산미가 부드러워지고 은은하면서 향긋해진단다. 그저 자연에 맡긴 채, 발효하면서 생성되는 초산균이 만드는 얇은 초산막을 자주 걷어내는 일만 거든다. 초루의 흑초를 자연과 시간이 만든다고 설명하는 이유다.


자연 속에 쏙 숨은 초루 건물이지만, 안에서 바라보면 사면이 통창으로 모두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

보성 현미, 쌀누룩, 천연 암반수로만 만든 초루 흑초는 향이 은은하고 맛이 부드러우면서 깔끔하다. 과실 발효액을 섞은 발사믹흑초, 발사믹블록, 구슬흑초 등 종류도 다양하다. 내년엔 7년산도 출시할 예정이다.
은은한 맛과 향으로 속이 편안하도록
오늘날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식초는 엄연한 인류 최초의 조미료다. 1만 년 전, 술이 발효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식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조미료이자 약재였으며, 살균제이고 해독제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우리 조상 역시 식초를 단순한 양념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식초 발효 용기인 초두루미를 부뚜막에 올려놓고 생활에서 가까이 즐겼으며, 길일을 택해 만들 정도로 식초를 신성시했다. 한국 전통 식초는 고주古酒라고도 일컫는 곡물초로, 그중에서도 현미식초를 발효시킨 흑초는 검은 빛깔을 띠며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건강에도 이로운데, 한상미 대표는 물에 섞어 마시기만 해도 몸이 개운해진다고 설명한다.

“흑초에는 몸에서 합성하지 못해 꼭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만 하는 필수아미노산이 들어 있어요. 오래 숙성할수록 된장이나 고추장의 맛이 깊고 강해지듯이 식초의 산미도 그럴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오히려 흑초의 산미가 부드러워지며 은은하고 향긋하게 바뀐답니다. 숙성 기간이 긴 흑초일수록 음용으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이유지요. 따뜻한 물 150ml에 흑초를 15~20ml 넣어 차로 마시면 입안이 깔끔해지고 속도 편안해집니다.”


노지 항아리에서 태양과 바람과 시간으로 숙성한 초루의 흑초는 첫 담음부터 당화·발효·숙성까지 전 과정이 단일 항아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당분과 아미노산의 결합 반응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빛깔은 검어지고, 영양과 맛은 좋아진다.
초루에는 현재 3년산과 5년산 흑초가 있다. 내년이면 7년산도 선보일 예정이다. 그뿐 아니라 보성 현미와 흑미를 사용해 담근 흑초와 녹찻잎을 함께 넣어 발효·숙성한 흑초도 있고, 맛과 향이 일품인 발사믹도 있다. 이탈리아어로 ‘향기가 좋다’는 뜻인 만큼 초루의 발사믹은 3년 숙성한 흑초에 과실 발효액으로 사과, 망고 등을 사용해 향기롭게 만든다.


자연과 통하는 공간
건축이란 ‘마음의 소리를 담은 그릇’이라 했던가. 초루는 식초를 정성스럽게 짓는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비니거 파크Vinegar Park라고도 부르는 자그마치 188만 4297㎡(약 57만 평) 부지에 지은 첫 건축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삼나무 계곡에 섬세한 경사로 위에 터를 잡은 초루 건축물은 작년 4월에 오픈했는데, 이 공간을 살펴보면 초루의 마음과 근본이 더욱 잘 느껴진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을 경험하는 듯하다. 근본을 세우면 도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으로, 이곳의 근본은 자연에 있으니 공간에도 격조가 있다.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초루 건물은 한옥 구조를 모티프로, 자연과의 공존을 원칙으로 설계했다. 두 그루 삼나무를 살리기 위해 브리지에 구멍을 뚫은 것이 인상적이다.
초루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돌보고 소통하며 공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곳곳에서 전한다. 전체적으로 검은 철제와 나무 덱, 옹기, 식물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럽고 모던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도 보일 듯 말 듯 자연 속에 쏙 숨어 있는데, 해평호수를 따라 메타세쿼이아가 길게 늘어선 900m 흙길의 진입로를 느릿느릿 걷다 보면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나무 사이로 건물이 길게 수평으로 자리해 가까이에 가야 보일 정도다. 가늘고 긴 철제 가구식 구조는 전통 한옥 공간을 닮았다. 3×3m 크기의 모듈이 격자 체계를 이루는데, 5×8칸의 내부 공간은 세 개 켜로, 중심의 두 칸은 중정, 그 주변으로 서비스 공간, 시음 및 체험 공간의 켜가 둘러져 있다. 외곽의 켜는 ‘겹집’으로 사용하는 온돌방과 연결된다.

건물은 계류와 숲 사이에 낮은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건물을 감싸고 흐르는 계류를 따라 아랫길과 윗길 두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굴곡진 지형 속에서 두 길은 중정의 계단을 통해 순환하는데, 숲과 옥상을 잇는 윗길의 브리지에서도 공간의 근본을 단번에 찾을 수 있다. 삼나무 두 그루를 살리기 위해 다리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초루는 사방이 회랑처럼 자연으로 둘러져 있어요. 사면 모두 유리로 마감해 자연을 바라보고 열려 있지요. 그래서 어느 자리에 앉아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요. 바깥 자연이 훌륭한 인테리어니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단조롭게 구성했습니다.”

사실 초루를 소개하면서 식초 제조 공정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초루는 6차산업 그 너머를 지향한다. 1차산업인 생산, 가공·제조를 하는 2차산업, 유통·관광·체험 등 3차산업에 하나를 더 더해 1천 년 된 절터인 개흥사터의 스토리까지 시간을 거스르는 역사 체험의 순간도 선사하고자 하는 것. 포도밭을 둘러보고 와인 맛을 즐기는 와이너리 투어처럼 항아리밭과 차밭, 숲과 우리 문화유산의 터전을 둘러보는 식초 공간을 꿈꾼다. 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마음이 한가해지는 청복淸福을 취해 누리고 싶다면 초루를 찾고, 이곳의 흑초를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오봉산, 해평호수, 개흥사터, 철 따라 피는 꽃과 나무…. 자연 속에서 명상하며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도 더불어.


‘초루’를 <행복>에 소개한 한선주 섬유예술가는 현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섬유・패션 전공 교수로 정년퇴직하였다. 제1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광주의 디자인’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국내외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초루로 향하던 해평호수 옆으로 난 진입로 및 자연과 한 몸으로 어우러져 있던 건축물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소개한다. 제철의 꽃과 나무를 고스란히 보고 느낄 수 있어 사계절 모두 방문하며 자연의 기운을 오롯이 느끼고 싶은 곳이라고. 초루의 발사믹흑초는 샐러드 위에 올리브유와 함께 드레싱으로 즐기는데, 쇠고기 위에 뿌려도 일품이란다.

촬영 협조 초루(061-853-3309, www.choru.co.kr)

글과 진행 신민주│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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