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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생약연구소 고문 백운·오지나 헤드 셰프 정미애 가족 제주에서 만난 치유 밥상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은 내일의 내 몸이 된다. 그렇기에 올바른 섭생은 건강한 삶의 첫 단추다. 몸에 필요한 음식을 바르게 먹으며 잃었던 건강을 되찾은 백운 고문과 그의 가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주 잊고 사는 이 단순한 진리를 레스토랑 오지나를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제주 부영농장에 모인 한라산생약연구소 백운 고문의 가족. 부영농장은 40여 년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2022년 팝업을 통해 처음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레스토랑 오지나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약이 되는 음식을 알리는 이 가족은 언젠가 부영농장에 오지나부터 숙박까지 모든 게 모인 종합 치유 스테이를 만들길 꿈꾼다.
오지나 마당 뒤편에 늘어선 장독대들. 직접 담근 홍삼 된장·간장, 옻 된장·간장 항아리 및 1백29년 된 씨간장 항아리가 자리 잡았다. 오지나에서 선보이는 요리의 맛을 내는 장은 모두 이곳에 있는 걸 사용한다.
매일의 끼니는 우리 몸에 살점을 대고 피를 돌게 한다. 이 말인즉 오늘 내 식탁에 오른 음식은 내일의 나를 살게도, 또 죽게도 한다는 뜻이다. 아침에 눈떠 저녁에 잠들기까지 입으로 들어간 식선食膳 중 몸에 이로운 것이 몇이나 있을까 찬찬히 손으로 셈해본다. 하루는커녕 일주일 동안 먹은 걸 되짚어도 열 손가락을 다 접지 못한다. 빳빳하게 뻗은 손가락이 무색할 따름이다.

적절한 시기, 적당한 양의 물을 머금지 못한 식물은 시든다. 필요할 때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지 못한 인간은 병든다. 잎이 누렇게 뜨다 못해 줄기까지 말라비틀어진 식물을 다시 살리려면 심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이라고 다를까.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한 채 살아가다 손쓰기 힘든 큰 병을 얻고 나서야 섭생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입이 아닌 몸이 원하는 먹거리로 건강을 되찾고, 자신의 깨달음을 다시 음식에 담아내는 한 가족에 대한 것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은 아버지, 그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구해 온 귀한 식재료로 차를 우리고 음식을 만들던 어머니, 올바른 식사로 시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좋은 먹거리를 찾고, 만들고, 전달하는 세 남매. 참다운 음식을 찾아 떠난 이들이 쓰는 서사시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코스의 애피타이저로 내는 홍해삼샐러드. 호두기름, 레몬, 꿀, 식초 등으로 맛을 내는데 식초 역시 직접 숙성한 것을 사용한다.
표고, 송이, 능이, 느타리 등 버섯잡채에 들어가는 말린 버섯들. 모두 물에 불렸다가 손으로 하나씩 찢은 후 버섯별 고유한 향을 살리기 위해 각각 따로 볶는다.
내 몸을 살린 밥상
한라산생약연구소 백운 고문의 가족을 만난 건 제주, 레스토랑 ‘오지나’에서다. 입구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에 놓인 가마솥이 쉴 새 없이 수증기를 내뿜고, 밭에는 양배추·파·마늘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오지나의 영업날은 주 3일, 금·토·일뿐이고 저녁 코스 메뉴만 선보인다. 하루에 한 팀, 많으면 두 팀까지만 식사할 수 있는 이 신비로운 레스토랑의 역사는 백운 고문의 건강을 되찾아준 밥상에서 시작했다. “처음 당뇨를 진단받고 병원과 약에 의존했어요. 그러다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으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의사의 처방과 약에 의존하는 게 답이 아닐 수 있겠다.”

약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직접 스스로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기초 단위인 음식으로. 백운 고문은 좋다는 약초와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이때 함께한 사람이 아내이자 현재 오지나의 헤드 셰프인 정미애 씨다. 그는 중국에서 유학 중인 자녀들을 두고 홀로 귀국해 백운 고문과 전국 곳곳을 다녔다. “시작은 차였어요. 날이 좋으면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르고 가을이 되면 바닷가에서 나는 해국을 따다 남편과 차를 우려 마셨죠.” 약차에서 시작한 건강한 먹거리는 밥상으로 이어졌다.


백운 고문의 가족을 만나러 제주로 향한 날 레스토랑에 무려 2kg짜리 홍해삼이 들어왔다.
가니시를 더해 전복찜을 마무리하고 있는 황지원 셰프.
전복찜 재료인 제주 자연산 전복은 500g 이상 되는 것을 사용한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이 가장 잘 안다. 몇 해에 걸쳐 시력을 조금씩 되찾고 나니 건강한 음식이 필요한 주변 사람들이 백운 고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부부는 그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차를 건네고 밥을 대접했다. “저희 집 근처를 지나다 ‘백운 선생님 집에서 밥 먹고 갈까?’ 하면서 들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많을 때는 하루에 8~9번씩 저녁상을 차리기도 했죠.” 세 자녀는 방학이면 부모님이 계신 제주로 와 장독을 닦고 작두로 약초를 자르며 도왔다. “친구들과 함께 집에 놀러 가면 다 같이 항아리부터 닦은 기억이 있어요. 한참 일을 도와드리고 나면 그제야 밥을 먹을 수 있었죠.” 막내딸 황지원 셰프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올바른 섭생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친 세 남매가 학업을 마친 뒤 부모님과 뜻을 같이하게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밭에서 파를 수확하고 있는 황지원 셰프. 오지나에서 사용하는 어지간한 채소는 모두 직접 기른다.
네 몸을 살릴 밥상
동네 사람들에게 밥을 대접하는 것에서 시작해 백운 고문이 따로 식단을 관리해주는 이들을 위해 운영하던 레스토랑이 오지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2020년 7월 무렵이다. “오스틴 강 셰프와 보육원 봉사 활동에서 만났어요. 오스틴 강 셰프는 원래 주로 양식을 하지만 폭넓은 요리를 하고 싶어 한식을 배우고자 했죠. 봉사 활동에서 만난 인연을 계기로 저희 가족과 제주도에서 농사도 지어보고 어머니께 요리를 배우기도 했어요.” 황지원 셰프가 지난 날을 회상했다. 이후 오스틴 강 셰프가 팝업 레스토랑을 제안했고, 황지원 셰프와 장녀 황나비 디렉터가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레스토랑 이름은 각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오지나라고 지었다. 물론 한시적 성격을 지닌 팝업 레스토랑은 끝났다. 그러나 가족과 꼭 인연이 있지 않은 이들에게도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지나를 계속 운영하기로 했다. 현재 오지나에서는 어머니 정미애 헤드 셰프를 필두로 황지원 셰프가 함께 요리를 한다. 중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을 공부한 황나비 디렉터는 운영 전반을 도우며 예약 손님의 몸 상태에 따라 알맞은 음식과 그렇지 못한 음식을 가리고 어울리는 차와 술을 페어링한 식단을 짜 주방에 전한다.


여정실, 산머루, 산삼, 도라지 등 각각의 재료를 넣고 담근 약술. 평균 여덟 가지 술이 메뉴와 페어링해 나간다.
오지나의 전경. 현판에는 공자의 <중용>에 나오는 ‘인막불음식 선능지미人莫不飮食 鮮能知味’ 란 글귀가 적혀 있다.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진정한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으로 오지나가 추구하는 음식 철학과 맞닿아 있다.
오지나의 유일한 메뉴인 저녁 코스는 열두 가지 안팎의 요리로 구성한다. 제일 처음 내는 건 따뜻한 물에 1백29년 묵은 씨간장을 섞은 간장차. “옛날 우리 어르신들 밥상을 보면 꼭 간장이 올라갔어요. 본격적인 식사 전, 침샘을 열기 위해 간장을 숟가락으로 콕 찍어 먹었죠. 침이 충분히 나와야 소화가 잘되고 음식 맛도 좋아지거든요.” 이어 호두기름, 레몬, 꿀, 식초로 맛을 낸 홍해삼샐러드, 오지나 참기름을 곁들인 제주 자연산 전복찜, 제철 채소전, 더덕구이와 버섯잡채, 20년 된 솔잎 소스를 곁들인 발효시킨 민어찜, 14년 묵은지 흑돼지김치찜 등이 나온다. 

물론 메뉴는 철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메뉴의 가짓수에 이미 입이 떡 벌어졌겠지만, 사실 메뉴 가짓수는 요리에 들어가는 정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대표 메뉴인 버섯잡채는 11종의 버섯을 말렸다가 불려 모두 손으로 하나씩 찢은 뒤 볶아내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각 버섯마다 고유한 향이 살아나도록 각각 따로 볶은 뒤 섞는 거죠.” 정미애 헤드 셰프의 설명이다. 또 다른 대표 메뉴인 14년 묵은지 흑돼지김치찜 역시 사골 육수를 내는 데에만 열 시간, 김치와 고기를 찌는 데만 다섯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더 대단한 건 요리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재료를 직접 키우고 만든다는 점이다. 텃밭과 비닐하우스에서는 파, 쪽파, 마늘, 양배추, 쌈 채소, 방울토마토, 깻잎, 방앗잎, 미나리 등 다양한 작물이 자라난다. 마당 뒤편에는 직접 담근 홍삼 된장·간장, 옻 된장·간장 항아리가 연도별로 늘어서 있고 그 끝엔 1백29년 된 씨간장을 담은 커다란 항아리가 자리 잡았다. 닭도 키워 알을 받고 요리에 사용하는 발효액, 식초 등도 손수 숙성시킨다. 이 모든 걸 레스토랑 안에서 만들고 보관할 수는 없을 터, 이는 인성물산 대표인 장남 황효진 씨가 담당한다.


왼쪽 반려견 ‘다나’와 함께 부영농장 산책로를 걷고 있는 황나비 디렉터.
인성물산에는 귀한 발효액을 모아놓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언젠가 부영농장 안에 공간을 따로 마련해 전시할 계획이다.
결국 시작은 좋은 식재료
결국 좋은 음식의 근원은 좋은 식재료다. 오지나의 요리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식재료 창고라 부르는 인성물산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여기가 한 1천6백 평 정도 될 거예요. 일단 숙성실부터 보실까요?” 식재료 창고가 궁금하다는 말에 곧장 자리를 옮겨 소개해준 황효진 대표의 말처럼 인성물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숙성실이다. 40년근 이상의 장생도라지부터 야생 더덕, 지리산 황매실, 덕유산 머루 등 전국 각지에서 공수해 온 재료를 숙성한 발효액, 이를 베이스로 만든 식초와 와인, 그리고 오지나의 모든 요리에 뿌리는 산삼 소스까지. 시간과 정성이 깃든 발효 식품이 가득 찬 5백여 개의 발효통이 숙성실에서 익어간다. 이 외에도 무주까지 찾아가 담근 김치, 직접 만든 저염 고추장,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맞지 않은 돼지고기와 쇠고기, 제철 생선, 말린 나물 등 오지나 메뉴에 필요한 모든 식재료는 인성물산에 보관한다.

인성물산이 만든 식재료는 오지나와 백운 고문이 식단을 관리해주는 이들뿐만 아니라 몇몇 셰프에게도 전해진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함께 팝업을 진행했던 오스틴 강 셰프, 그리고 뉴욕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메주meju를 운영하는 김훈이 셰프가 있다. 먼 타국에 있지만 김훈이 셰프는 시간이 될 때마다 이들을 찾아와 음식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식재료를 챙겨 가 자신의 레스토랑 요리에 활용한다. 때론 황효진 대표가 먼저 새로 만든 것을 권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래도 익숙한 식재료를 선호하죠. 그래서 바로 소비자를 만나기보다 이를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셰프님들에게 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인성물산의 식재료를 잘 만든 요리로 접하고, 좋은 식재료의 진가를 몸으로 느껴볼 수 있도록요.”


숙성실 안에 있는 다양한 발효액이 담긴 숙성통은 약 5백 개에 달한다.
전시실에 진열한 발효액. 잎사귀가 하얀 것은 산삼을 발효한 것으로 오랜 시간 숙성하면 엽록소가 빠지며 잎이 하얘진다.
이 가족이 꿈꾸는 치유
2022년 여름, 40년 넘게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제주의 비밀 정원에서 팝업이 열렸다. 정원의 이름은 부영농장. 4주의 팝업 기간 동안 매주 새로운 카페와 로스터리가 내려와 커피를 내려주었다. 이후로도 부영농장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브랜드 및 인물들과 함께 좋은 먹거리를 선보이고 음식과 치유를 주제로 한 토크 세션이 있는 팝업을 열었다. 아마 짐작했겠지만 이 역시 황효진 대표가 선보인 행사다. 부영농장은 본래 백운 고문이 식단 관리를 해주며 연을 맺은 노부부의 정원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섭생으로 몸을 치유하고 이를 주변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백운 고문의 가족과 뜻을 같이해 농장을 맡겼다. 녹슨 빨간 철제 대문을 열면 보이는 빽빽한 나무들, 녹음 위로 물감을 떨어뜨린 듯 다양한 과일이 탐스럽게 맺혀 잘 익어가는 3천 평 규모의 정원. 참고로 말한다면 오지나의 요리와 인성물산의 발효액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귤, 청귤, 포멜로, 무화과 등은 모두 부영농장에서 자란 것이다.

부영농장은 팝업이 아닐 때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하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보는 것도 좋겠다. 이 가족에게는 다 뜻이 있으니. “언젠가 이 농장 안에 오지나를 비롯해 귀한 발효액과 약재를 전시하는 공간, 티 하우스, 그리고 잠잘 공간까지 들이려 해요. 단기간이 아닌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머물며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 꾸리고 싶어요.”황효진 대표의 말을 듣고 부영농장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정갈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의 생경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억지로 다듬지 않은 야생의 것만이 내뿜을 수 있는 생명력이 몸에 스미는 듯했다. 이곳의 미래를 상상하며 나무에서 떨어진 귤이 옹기종기 모인 산책로를 걸었다.

글 양혜연 기자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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