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진 수풀에 둘러싸인 김소영 명장의 집은 너른 창을 통해 푸른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의 취미인 피아노를 중심으로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거실에 온 가족이 모였다. 왼쪽부터 남편 제임스, 딸 제이미, 김소영 씨.
“그에게 ‘적당히’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증오였다.” 천명관 작가의 소설 <고래>에 나오는 이 구절은 바로 그를 두고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적 스타 셰프 토머스 켈러를 비롯해 국내외 저명한 셰프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김소영 치즈 명장을 만나기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26년 전, 그는 보스턴 심포니홀에서 열린 음악회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와 첫눈에 서로 반해 4개월 만에 약혼했고, 프랑스 여행길에 들른 시골 장터에서 맛본 치즈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그의 삶에는 ‘적당한’ 사랑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강렬한 화학작용이 존재했다. 약한 불로는 물이 잘 끓어오를 수 없듯이, 몰입의 경지에 이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100℃ 이상의 뜨거운 열정이 필요했다.
페탈루마의 푸른 초원에서 건강하게 자란 산양의 젖으로 치즈를 만든다.
100% 수공업 공정으로 우유를 옮길 때도 펌프를 사용하지 않는다.
소금에 재를 섞어 뿌린 검은빛 ‘아카펠라’ 치즈.
붉은색 후추로 장식한 ‘론도’ 치즈와 염소 젖에 타임을 넣어 만든 ‘듀엣’ 치즈 등 다양한 맛과 형태의 김소영표 치즈.
공방을 함께 일궈나가는 라파엘라와 마르셀라는 든든한 동지다.
치즈에 소금을 뿌려 잡균을 없애고 유산균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치즈
연세대학교와 카이스트에서 식품공학과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과학자로서 진로를 착실히 따르던 김소영 씨는 어느 순간엔가 문득 이대로는 더 이상 행복할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한때 빵을 굽는 제빵사가 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치즈는 선택지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농가에서 머무르며 마을에서 매일 열리는 시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체더·콩테 등 경성 치즈부터 브리·카망베르 등 연성 치즈, 신선 치즈, 돌처럼 딱딱하고 큰 치즈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치즈를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어떻게 우유라는 단순한 재료에서 이렇게 다양한 맛과 질감, 모양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죠.” 치즈의 변화무쌍함이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에서 낙농학을 공부하면서 노부부에게 빌린 작은 공방에서 친구에게 소젖을 받아 치즈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수제 치즈의 명맥이 끊긴 캘리포니아에서 혼자 실험하고 독학한 끝에 만든 치즈를 오크빌이라는 그로서리 숍에 납품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그의 치즈를 맛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다이닝계의 전설 토머스 켈러였다. 이후 곧바로 그를 자신의 레스토랑인 프렌치 런드리로 초대했다. 토머스 켈러는 김소영씨가 가져온 치즈를 먹어보더니 “양은 상관없으니 매일 오후 3시 30분까지만 배달해달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순간 얼빠진 사람처럼 멍했죠. 치즈를 만든 지 6주밖에 안 된 시기였거든요.” 토머스 켈러와 첫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김소영 명장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프렌치 런드리에 치즈를 배달한다.
과연 무엇이 그녀의 치즈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페탈루마Petaluma라는 작은 지역에 설립한 그의 치즈 공방인 ‘안단테 데어리’를 직접 찾았다. 마침 김소영 씨는 14년째 함께 치즈를 만드는 동료이자 친구 라파엘라, 마르셀라와 치즈에 소금을 뿌려 살균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목장에서 키우는 산양의 젖을 짜는 일부터 산양유를 응고시키고 커드를 틀에 넣어 굳혀 숙성시키는 일, 그리고 마지막 청소까지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한다. “손으로 느끼고 냄새를 맡지 않으면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없어요. 기계보다 더 정확할 때가 많아요.” 과학자 출신이라 정밀하게 계량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학은 하나의 언어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감각을 더욱 신뢰한다. 아침마다 집 안 정원에서 키우는 로즈메리와 타임에 물을 주면서 맡는 공기 냄새를 기억하고, 이를 치즈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한다. 이렇게 허브 향을 담아 새로 운 풍미를 품은 치즈, 천연 설탕을 발라 숙성한 치즈 등 정통 치즈와는 또 다른 김소영 명장만의 아르티장 치즈가 매일 그의 정성과 땀을 먹고 탄생한다.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은 그녀의 친구가 손수 연꽃을 그려 구운 타일이다.
창밖으로 푸른 녹음이 내다보이는 주방에서 김소영 명장은 매일 가족을 위해 요리한다.
숲 속 오두막 같은 정겨운 집. 정원에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2층으로 통한다.
정원에 핀 튤립을 꽂은 화병과 가족사진이 자리한 다이닝 공간.
세 식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저녁 식사 시간. 이날 메뉴는 오븐에 구운 훈제 연어, 구운 비트와 감자를 넣은 채소 샐러드, 그리고 김소영 명장이 만든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치즈다.
시간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우유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 처음으로 섭취하는 음식이다. 포유동물이 임신하고 출산을 하면 생성되는 젖으로부터 생명이 자라고 생태계가 순환한다. “나이 마흔에 딸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기르니 실로 치즈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죠.” 인생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되어준 딸 제이미와 남편 제임스,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는 단란한 집을 방문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북동쪽에 위치한 스태니안 스트리트Stanyan Street로 향했다. 태평양 해안선을 마주하며 골든 게이트 파크Golden Gate Park를 품은, 작지만 푸르고 평온한 마을이었다. “수목이 우거진 숲길이 보여 공원인 줄 알고 들어와보니 집 한 채가 있더군요. 마치 숲속에 튼 둥지처럼 포근한 느낌이 좋아 이곳에 살기로 결정했어요.” 집 앞의 작은 정원에는 겨자꽃, 유채꽃부터 수령이 오래된 나무 사이로 피는 오밀조밀한 꽃과 열매가 객을 맞이한다. 넓은 통창으로 청명한 하늘이 내다보이는 거실 중앙에는 소파와 피아노가 놓여 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김소영 씨를 위한 작은 무대다. 치즈 공방 이름이 악곡의 빠르기를 뜻하는 ‘안단테’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이 흘러가는 시간대로 숙성되는 음악 같은 치즈는 그의 삶 속에서 묻어나온 것이 아닐까.
그의 집은 수수하지만 구석구석 인생의 뚜렷한 장면이 남아 있다. 주방 벽면에는 화가인 친구가 연꽃을 핸드 페인팅한 타일이, 다이닝 협탁에는 딸 제이미가 갓난아기에서 소녀로 성장해가는 사진과 <와인 스펙테이터>에 실린 김소영 씨의 기사가, 침실에는 남편과 함께 읽은 책들이 자리한다.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느끼는 행복을 한국에서도 나누기 위해 2020년 강원도 평창에 ‘안단테 데어리 코리아’라는 치즈 공방을 열 계획이다. 공명심이나 애국심의 발로가 아닌, 작게는 마을에 크게는 국가라는 커뮤니티 안에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제가 전파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버릇이에요. 끊임없이 성실하게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 그가 말하는 사소한 버릇이 쌓여 끝내 아르티장의 영혼을 완성한다. “한결같이 노력하다 보면 세상이 바뀌어요. 결코 마법이 아니지만 마법 같은 일이죠.” 정직하게 일한 시간을 배반하지 않는 치즈처럼 시간도 그의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 미국 최고의 치즈를 만드는 김소영 명장 자연이 흘러가는 시간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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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작은 치즈 공방에서 김소영 명장은 20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최고의 치즈를 만든다. 미국 최고의 셰프 토머스 켈러를 비롯한 수많은 셰프가 사랑해마지않는 치즈메이커 김소영 명장은 그 역시 치즈를 사랑하고 치즈를 잉태하는 자연을 사랑하며, 그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삶을 예찬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