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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요리사 하미현 맛을 찾아내고 기록해서 향유하는 삶
우리 곁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전통 음식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식 요리사 하미현. 각 지역 마을에 남아 있는 내림 음식의 원형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현대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하고 자꾸만 먹어봐야 현재와 전통을 잇는 연결 고리가 생긴다. 진짜 음식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기록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 그가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한식 요리사 하미현은 각 지역의 마을에서 사라져가는 음식의 원형을 기록한다. 다이닝 공간은 손님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는 소중한 곳이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건축가는 집을 짓고, 요리사는 밥을 짓는다. 모든 ‘수작手作’의 결과물에는 그 사람이 쌓아온 시간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다. 하미현 요리사의 손끝으로 짓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손으로 옷을 짓고 광고를 만들던 그가 짓는 밥에는 한 마을의 역사나 다름없는 내림 음식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프랑스 파리 의상 학교 스튜디오 베르소에서 의상학을 전공하고, 광고 아트 디렉터로 탄탄히 다져온 삶을 내려놓고 그가 자신의 손끝으로 기록해서 나누고 싶은 음식은 어떤 맛일까. 


1, 3 하지 감자를 곱게 갈아 반죽해 만든 옹심이는 여름 음식으로 그만이다. 매콤하게 무친 고수 배무침과, 김치, 매실장아찌를 곁들이면 여름 초대상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2 음식과 관련한 골동품과 무쇠 용품을 모으는 것이 취미다. 
음식과 나의 연결 고리
알고 보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는 강렬한 ‘끌림’의 연속이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저마다 지닌 매력에 이끌릴 때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게 된다. 하미현 요리사에게 강렬한 끌림은 음식이었다. “광고 일을 하면서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한 번도 든 적이 없어요. 4년 전 일에 한창 지쳐있을 무렵 문경에 있는 한 사찰에 들렀죠. 공양간에서 사찰음식을 먹었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특별한 음식도 아니었어요. 그저 평범한 맛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어요. 그 이후로 틈만 나면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설거지도 도와드리고 요리도 배우면서 3~4일씩 머무르곤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요리사의 길을 걸을 줄은 몰랐다. 어느 순간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음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더니 요리하는 인생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파리 유학 시절 박물관과 전시회를 둘러보며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른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음식이나 식재료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한 것이다. 그 시작이 도심형 장터인 마르쉐였다. 광고 일을 그만두고 마르쉐에서 사찰 음식을 핑거 푸드로 만들며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도심 속 옥상 텃밭 프로젝트인 홍대 다리 텃밭에 참여했고, 지역 농부들을 초대해 워크숍도 진행했다. 사찰 음식과 마르쉐 그리고 도시 텃밭을 통해 자신이 어떤 음식을 만들고 싶은지 확고해졌다.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 그 맛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궁금했고, 이를 따라가보기로 한 것이다. “2014년 인비트로 플랜트의 김대현 대표와 함께 지역 식재료를 개발하는 일을 진행했어요. 강원도의 여덟 개의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마을마다 전해 내려오는 내림 음식이 있더군요. 그 음식이 바로 밭을 일구던 농부의 음식이며 결국 한식의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그가 시작한 일이 각 지역 마을마다 남아 있는 음식의 원형을 기록하는 것이다. 단지 전통만 강요했다면 뻔한 이야기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음식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요,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해 같이 향유할 수 있는 맛이다.



1 방축리 마을의 어르신들은 삭힌 감자 가루로 감자범벅과 감자떡을 만들어 먹었다. 반면 그는 삭힌 감자 가루로 고기 소를 넣은 만두를 만들어 선보였다. 2, 3 할머니들과 함께 감자떡을 만들고 그 레시피를 기록하는 일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사라져가는 내림 음식을 붙잡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구절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가치가 보이기 마련이다. 하미현 요리사가 강원도 양양 방축리 마을의 삭힌 감자떡을 발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원도에서는 쌀이 귀했던 터라 마을 할머니들은 밥이 썩어도 물에 씻은 후 쪄 먹었어요. 삭힌 감자떡의 출발도 결핍과 생존이었지요. 하지에 감자를 수확하다 상처가 난 것들을 죄다 광주리에 담고 물을 부어 썩혀요. 1년 뒤 광주리 뚜껑을 열면 감자가 썩고 문드러져 고약한 냄새가 나고, 감자 살은 끈적거리는 액으로 변해 있지요. 썩은 감자의 껍질만 퍼내고 여러 번 씻어 체에 거르면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흰 덩어리만 남아요. 이를 뚝뚝 떼어내 햇볕에 말린 다음 체에 내리면 삭힌 감자 가루가 완성됩니다. 쿰쿰한 냄새가 남아 있지만 시판 감자 전분과는 쫄깃함의 정도가 달라요.”

할머니들에게 삭힌 감자 가루는 겨울을 버티기 위해 음식을 저장하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는 경험으로 축척되고 전해졌지만, 누구도 기록한 적 없는 감자떡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았다. 조리법을 알고 있는 전향자, 김순옥, 황혜자 할머니를 만나 삭힌 감자떡과 옹심이를 배웠다.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며 자꾸 숨기려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마르쉐와 슬로푸드 페스티벌에 함께 참여해 삭힌 감자떡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삭힌 감자 가루를 익반죽한 후 콩을 넣어 만든 전통 감자떡과 만두를 자신만의 레시피로 풀어냈다. 자꾸 먹어봐야 그 맛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삭힌 감자떡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잡기 위해 콩 대신 팥과 계피, 꿀을 섞은 소를 넣는다. 기존 감자떡에 단맛이 더해져 누구나 먹기 좋게 만든 것. 마치 보물찾기처럼 음식을 찾아내는 것에서 그는 재미를 느낀단다.

하미현 요리사는 강원도 일대에 숨어 있는 음식 이야기를 찾아 책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방축리 마을의 감자 음식을 비롯해 옥천에 있는 화전민의 음식, 태백 광부의 음식을 하나하나 기록해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일하느라 바쁜 농부가 음식을 기록할 시간은 없었을 거예요. 기록의 문화가 아니어서 안타까운 거예요. 게다가 저 역시 그 음식이 먹고 싶고 재미있기에 기록해 공유하고 싶어요. 제 밥상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맛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시작한 거지 인류애나 사명감처럼 집착하고 싶지는 않아요.”

4 느릅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오디오를 둔 휴식 공간. 5 일상 상차림에 주로 사용한 오래된 그릇과 함. 6 테라스에 장독을 두어 간장, 된장 등을 보관한다. 7 베개는 스승에게 받은 귀한 선물이다. 

탐방과 기행 사이
하미현 요리사는 자신의 안목으로 기록하고 싶은 마을 음식을 찾는 것처럼 음식을 탐방하고 기행하면서 만난 민예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일도 별개로 여기지 않는다. “음식 속에는 요리하는 사람의 손과 부엌 풍경, 이를 품고 있는 집 안 모습까지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지닌 기운이 음식으로 전달되고, 그 사람의 취향이 묻어난 그릇에 담아 그 공간에서 맛을 함께 나눌 때 즐거움이 배가되지요.”

그래서 그는 취향이 담긴 물건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면서 그 즐거움을 누린다. 화전민이 손으로 꼬아 만든 망태기에 감자를 담아 베란다에 걸어두는가 하면, 해남을 여행할 때 만난 대장장이에게 구입한 칼로 재료를 손질한다. 오래된 소반에 다과상을 차리기도 하고, 제주도의 붉은 흙으로 만든 옹기에는 간장과 고추장을 저장한다. 손님이 오면 골동가게에서 구입한 빈티지 그릇에 정성껏 요리한 음식을 담아낸다. 이런 조합이야말로 그에게 더없이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인 셈. 하미현 요리사가 보여주고 싶은 음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잊혀가는 마을 음식도 골동품처럼 자주 보고 일상생활에서 향유한다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마따나 전통 음식이나 내림 음식도 결국 골동이라는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고 꺼내서 쓰다 보면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에 매료된다고. 전통과 현대의 연결 고리로 그의 삶에 내림 음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처럼 우리 역시 그 맛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1 부엌은 요리하는 공간이자 소반과 도마, 도자기 등 그가 아끼는 살람살이를 볼 수 있는 갤러리 같은 공간이다. 2 계피와 꿀을 넣어 만든 달큼한 감자떡과 생강조청으로 만든 에이드, 오디와 산딸기를 소반 위에 차려냈다. 3 해남 전통 오일장에서 만난 대장장이에게 구입한 칼과 실제로 요리할 때 사용하는 도마와 떡판.

글 김혜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