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여행
1 오카나간 호수를 배경으로 차린 알프레스코 디너 테이블. 샴페인과 핑거 푸드를 즐기며 저녁놀을 감상하고 종이 울리면 테이블로 가서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자유롭게 앉아 식사를 시작한다.
2 식사를 하는 동안 낯선 사람과 어느새 친구가 된다.
좋은 사람과 모여 앉아 잔잔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느라 시간이 어찌 흐르는 줄도 모르면서 식사를 하면 즐거운 포만감에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든든해진다. “아~, 이런 시간이 인간다운 삶이구나!” 라는 감탄사로 꽉 막힌 영혼을 솔솔 쓸어 내려본 사람은 공감하리라. 행복한 식사는 요리는 물론 대화와 분위기가 좌우한다는 이치를.
작년 여름 다녀온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오카나간 지역. 이곳 주민들은 바다같이 망망한 호수를 해변이라고 부르며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산다. 호숫가 주변은 캐나다 유일의 사막 지형으로, 일조량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해 프랑스 남부 같은 포도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작은 문패를 내건 농장마다 ‘캐나다의 과일 바구니’라는 멋스러운 애칭으로 불릴 만큼 달콤한 과일이 지천이다.
캐나다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이곳은 작년에는 무려 10여 년 만에 자연산 연어가 오카나간 호수로 돌아오는 생태계의 기적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미국 국경 지역의 댐 건설로 돌아올 길이 막혀 이 지역 원주민의 주식이던 통통하고 부드러운 연어가 자취를 감추자, 주민들이 총출동해 미국 정부를 설득했고 결국 댐 아래를 뚫는 노력으로 십수년 만에 자연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정부가 허가한 주민은 매일 호수에서 싱싱한 연어를 잡을 수 있었다.
알프레스코 디너는 지역 식재료와 와인 생산자를 소개하는 무대가 된다.
목요일 저녁,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사뿐한 원피스를 입은 숙녀와 편안한 셔츠를 입은 신사가 모였다. 작은 저택의 정원 아래로 오카나간 호수가 펼쳐지고 새하얀 오픈 키친에선 요리사가 빵을 굽느라 분주하다. ‘호수의 노을이 이토록 아름다웠나, 저 부부는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하는 생각의 숲을 거니는 순간 들려오는 경쾌한 종소리. 여든 명을 위해 준비한 기다란 식탁에 사람들이 둘러앉는다. “여러분, 알프레스코 디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 식사에 와인을 선물한 이웃 농장의 와인메이커 부부를 소개할게요.”
홈파티 형식의 이 알프레스코 디너는 오카나간 여행의 하이라이트. 지역 미식 회사가 여름철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저녁 호숫가 언덕 위의 저택에서 주최하는 식사 이벤트다. 목요일은 지역의 와인 생산자와 연계한 ‘와인메이커의 요리 시리즈’이며, 일요일의 식사는 지역 농장의 제철 재료를 중심으로 한 만찬을 여니 미리 예약하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마치 영화 속 피로연에 온 것처럼 호숫가에서 오늘 처음 만난, 국적이 다른 여든 명이 모여 식사를 한다. “오~, 음~” 이라는 미식 공통어가 있으니 언어 소통도 문제없다.
밭에서 갓 딴 얇은 호박꽃에 신선한 치즈를 채운 전채 요리, 갓 잡아 온 자연산 연어를 싱그러운 올리브 오일에 재워 입속에서 사르르 녹는 연어 콩피에, 유기농 애플코트를 갈아 허브를 올린 셔벗 등이 교향곡처럼 이어지는 수준 높은 정찬. 이 미식의 향연을 이끄는 수줍은 지휘자는 이웃 농장의 독일인 와인 생산자 부부였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마다 일어나 직접 선별한 와인과 농장 이야기를 들려주니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식사에는 대화와 웃음이 과일 바구니처럼 풍성하다. 여행은, 식사는 신이 우리 삶에 내린 가장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잊지 못할 여름밤이었다.
사진 김동오 기자 문의 +1-250-493-8657, www.joyroadcatering.com
식탁 위의 사유
1 홍대 텃밭 다리에 좌식 테이블을 놓고 소박하게 차린 행복 테이블.
2 다리의 도시 농부를 지도하고 자신의 노지에서 유기농 채소를 기르는 박정자 도시 농부의 ‘메이드인마포’ 천연 식재료.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식사 시간 테이블로 가져와 일상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게 해보려고 합니다.” 도심의 옥상 텃밭에서 도시 농부 밈과 하미현 텃밭 요리사의 자연 농법 요리로 식사하자는 기분 좋은 초대장. 일찌감치 배달된 그 초대장에는 간단한 물음이 있었다. “( )인 나” “주변 사람과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나요?’’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나요?” 등 다섯 가지 질문이다.
행복 수련을 돕는 재단법인 행복마을 동사섭에서 용타 스님이 요즘 사람에게 제시하는 다섯 가지 행복 원리인 정체正體, 대원大願, 수심修心, 화합和合, 작선作善 중 첫 번째 원리인 ‘정체’에 관한 물음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내가 가장 편히 대답할 수 있는 나에 대한이야기. 간단한 내 이야기를 하고 같은 질문에 다른 답을 하는 다른 사람의 일상도 들을 수 있으니 처음 만난 사람들과 둘러앉아 식사할 때 마음을 편하게 열게 해주는 대화 주제로 적절하다. 또 평소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사람도 설레는 식사 초대를 받고 매일 자신이라는 숲을 산책하며 식사 날짜를 기다리니 일상의 즐거운 이벤트가 되고, 다른 사람의 답을 생각해보며 왠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도 공통된 주제로 연결된 듯 느끼게 만드는 속 깊은 지혜와 재치가 담긴 초대가 아닌가.
늦여름 저녁, 홍대 텃밭 다리의 작물 사이로 기다란 좌식 식탁을 놓았다. 하늘빛 천을 두른 식탁 위는 도시 농부이자 플로리스트인 모리 씨와 예술가 친구가 앞마당에서 기른 허브 식물로, 시각도 후각도 감미로워지는 꽃 장식을 했다. 애플민트, 스피어민트, 페퍼민트, 마저럼 사이로 레몬버베나잎이 길쭉하게 솟아나고 들에서 핀 방아꽃이 수줍은 보랏빛을 자랑하는, 자연의 온갖 향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꽃다발을 또 어느 곳에서 보겠는가.
텃밭 요리사 하미현은 깨끗하게 잘 기른 식재료를 이용해 재료 본연의 맛을 고스란히 살린 요리를 선보였다.
도시 농부 밈은 ‘메이드인마포’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기르는 탐스러운 채소와 직접 담근 피클과 잼을 내놓았다. 유기농 피망으로 만든 잼, 쪽파로 담근 피클, 얼마 전 수확한 단호박과 가지 등도 선물로 주었는데, 겹겹이 포장한 화려한 선물만 받아보던 식사 참여자들은 작은 바구니에 담긴 자연빛 채소를 보며 자연의 산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주는 좋은 선물인지를 그곳에서 비로소 느꼈다. 하미현 텃밭 요리사가 농작물을 가져다 갖가지 채소는 쓱쓱 잘라 들기름에 살짝 굽고, 홍감자는 살짝 쪄서 속에 소스를 채운 핑거 푸드로 만들어냈다. 맛도 맛이지만 자연의 색감을 믹스 매치한 솜씨가 멋스러워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 노각을 얇게 채 썰어 맛국물에 띄워 먹는 노각국수, 찐 호박을 그릇 삼아 밥을 담은 리소토 역시 건강식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했다.
초콜릿을 납작하게 만들어 일일이 허브를 올린 디저트와 꽃 장식을 한 떡 케이크까지 여러 사람의 놀라운 재능과 부러운 감각이 더해진 색다른 요리를 선선한 여름 저녁에 값없이 대접받으니 나의 정체가 절로 높아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상을 물리고 옆의 정원으로 옮긴 자리.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석우 문학박사가 일어나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는 짧은 문장을 읊자, ‘내 마음은 무엇을 듣고 자랐나’ 하는 새로운 질문이 밀려왔다. “나는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기 위해 산다”라는 가수 겸 작곡가 김반장의 익살스러운 고백에 오늘도 허상을 좇다가 온 마음 한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지금, 여기에 의식이 머물러야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이명아 심리학자의 일상 철학에 모두가 무릎을 쳤다. 머리가 육체를 움직인다고 믿었으나 목수가 되어 가구를 만들다 보니 손을 써야 머리가 맑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조남룡 사진가의 고백에는 공감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고 저이의 삶이 내 삶이며, 사람은 여름밤의 이 식사 자리처럼 하늘 아래 모두가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상쾌하게 머릿속에 놓였다.
올해 장소와 요리사를 달리해 다섯 번의 특별 기획으로 진행하는 행복 테이블은 동사섭 홈페이지와 SNS로 신청할 수 있다. 다음 행복 테이블은 또 어떤 정성과 감동으로 마음을 두드릴까. 잘 대접받는 식사 한 끼로 정체한 마음이 깨어나고 미약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내가 할 대원, 수심, 화합, 작선을 생각하게 되다니, 실로 놀라운 밥심이다.
사진 이우경 기자 문의 행복마을 동사섭 서울센터(02-3499-1016, online.dongsasub.org)
식탁 위의 다름
1 이찬오 셰프는 늦여름의 식재료로 민어를 선택해 그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요리로 참여자에게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공했다.
2 언쎄임 다이닝을 이끌어가는 이찬오 셰프, 이근상 대표, 정유리 대표.
미국 고등학교 교사인 브라이언 보다닉은 그가 자주 다니는 타이 레스토랑에서 한국계 셰프가 만들어주는 요리를 맛보는 게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한국 음식도 선보이고 싶은데 기회가 없네요”라는 셰프의 바람을 들은 브라이언은 낡은 창고를 빌리고 SNS에 실험적인 식사를 하러 오라는 뜻의 ‘디너 랩Dinner Lab’이라는 초대장을 올렸다. 창고로 찾아온 2백여 명이 떡볶이와 어묵, 호떡 같은 한국의 길거리 음식을 베이스로 한 실험적 퓨전 음식으로 깜짝 번개 식사를 했다. 결과는 대성공! 뜻밖의 호응을 경험한 브라이언은 ‘디너 랩’이라는 회원제 식사 프로그램을 론칭했고, 시카고와 LA를 비롯한 미국 30개 도시를 유랑하며 낡은 창고나 다리 위 등에 깜짝 레스토랑을 열고 있다. 연회비도 상당하고 선착순 마감으로 탈락 가능성도 농후한데,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에 디너 랩이 찾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전혀 새로운 장소, 실험 정신이 강한 셰프의 파격적 요리,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테이블에 차려내는 디너 랩이 미국 외식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가 된 것이다.
지난 8월 19일, 첫 번째 식사를 진행한 언쎄임 다이닝은 광고 회사 KS 파트너스 이근상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서울 시내에 즐비한 높은 빌딩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많지만, 즐겁고 좋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깨어 있는 사람은 소수인 사회. 그림, 사진, 음악이 도처에 넘쳐나지만 취향과 안목은 희귀한 사회에 경쾌한 자극과 경험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떠오르면 터뜨리는 광고인의 근성에 따라 미식 마케터 정유리 대표와 마누테라스의 이찬오 셰프가 힘을 합쳐 지난 4월에 첫 번째 프리뷰를 열었다. 언쎄임unsame, 즉 뻔한 저녁 식사가 아닌 새로운 감각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일반 사람이 평소에 잘 가보지 못하는 곳에 테이블을 차려야 한다.
첫 번째 프리뷰는 작은 정원에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 백혜영 갤러리, 두 번째 프리뷰는 청담동 한가운데 사이더스 HQ 사옥의 루프톱, 대망의 그랜드 오픈은 고급 웨딩 홀인 드레스가든의 야외 식장 등 독특한 장소에서 식사를 했다. 외곽의 갤러리, 빈 건축물 등 앞으로의 식사 역시 우리가 평소 가보지 않아 우리에게 색다른 감각과 분위기를 느끼게 해줄 곳을 선정할 계획이다.
언쎄임 다이닝은 사람들이 평소 가보기 어려운 멋스러운 공간을 찾아 독특한 요리를 선보인다.
요리의 주제는 제철 식재료. 봄날의 도다리를 미처 구하지 못한 4월에는 ‘미리 온 민어’라는 주제로 식사를 준비했고, 두 번째 식사는 여름의 장미를 주제로 ‘밤에 피는 장미’라는 타이틀로 선보였다. 세 번의 식사를 차려낸 이찬오 셰프처럼 초창기에는 도전 정신이 강한 오너 셰프가 리더가 되겠지만, 프로그램이 안착하면 제철 재료를 공지한 후 여러 셰프의 지원을 받아 가장 남다른 방법으로 요리하겠다는 셰프에게 그달의 언쎄임 다이닝을 맡길 계획이다. 솜씨는 남다르나 그간 기회가 없어서 빛을 보지 못한 젊은 셰프에게는 길을 열어 주고,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의 경험’이라는 신선한 자극을 주기 위함이다.
그랜드 오프닝의 식재료는 다시 돌아온 민어. 페이스북으로 신청한 70여 명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청담동의 근사한 야외 결혼식장에 모여 ‘복날을 다시 한 번’이라는 주제로 초복에 놓친 장어, 중복에 잃어버린 전복, 말복에 날아간 오리, 또복또복 굴러온 수박과 와인을 곁들인 색다른 만찬을 즐겼다. 식사 중간에 샹송 가수가 자진해 감미로운 샹송을 부르자 모두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IT 전문가이지만 고기 굽고 소주 마시는 외식 외엔 별다른 관심이 없던 회사원은 다음 달에는 꼭 아내를 데려오고 싶다고 했고, 한 회사원은 광고 회사 디자이너의 초극감성이 담긴 포스터와 멋스러운 테이블 세팅,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요리를 경험하며 인생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했다.
식사를 함께 하며 이내 친해진 사람들은 서로의 감상을 이야기하느라 식사가 끝난 후에도 늦은 밤까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즐긴 사람이 그 행복한 에너지를 일상에서 보이는 과정’을 실험하고 싶다는 언쎄임 다이닝. 바람이 선선해진 10월의 저녁 식사는 영국에서 돌아와 경상도 어느 곳에서 파인 다이닝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남다른 고수가 등장해 옛스러워 더욱 멋스러운 어느 문화 공간에 지금껏 보지 못한 식탁을 차릴 예정이다.
사진 제공 언쎄임 다이닝 문의 www.unsamedin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