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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아 '슬로 피시Slow Fish' 맛있는 물고기 밥상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은 슬로 피시 행사가 지난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제노아 안티코 항구 일원에서 열렸다. 전 세계 어업 관계자들이 모여 고갈되는 어족 자원을 되살리고, 지속 가능한 바다 음식과 윤리 의식에 대해 고민하는 슬로 피시 행사의 생생한 보고서.

이탈리아어로 와인을 전시하고 구매할 수 있는 장소를 뜻하는 에노테카enoteca에서는 5백여 개의 이탈리아 전통 와인을 슬로 피시 푸드와 함께 맛볼 수 있다. 
슬로푸드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깨끗하며 공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슬로푸드는 1989년 파리에서 국제본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세계인의 입맛을 획일화하는 패스트푸드에 반대하는 활동이었는데, 지금은 ‘생물 다양성(biodiversity)’ 보존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국제식량 농업기구(UN-FAO)에 따르면 다양한 식용식물의 75%는 이미 멸종되었고, 미국의 경우 무려 95%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전통 음식과 동식물 종을 보존하기 위해 2003년에 슬로푸드에서는 생물다양성재단을 설립했다. 1996년부터는 ‘맛의 방주(Ark of Taste)’ 프로젝트를 통해 소멸 위기에 처한 전통 음식과 식재료를 기록해 지역 식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1 슬로 피시의 공식 후원사인 아탈리아 파스타 브랜드 파스티피치오 디 마르티노Pastificio G. Di Martino는 종이배에 다양한 파스타를 담아 디스플레이해 눈길을 끌었다. 
2 생산자 마켓에서 만난 피에몬테 주 브라 지역의 질 좋은 건어물. 

시민의 바다, 바다의 시민
슬로푸드 철학은 26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세계인의 식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고품질 음식을 지지하는 슬로 와인Slow Wine, 슬로 치즈Slow Cheese 운동이 자리 잡았고, 미국에서는 최근 ‘좋은 고기를 적게’ 먹는 슬로 미트Slow Meat 운동으로 건강한 육식 섭취를 추진 중이다.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에서도 지난해부터 사라져가는 지역 고유의 차를 살리고 이를 생산하는 소농을 지원하기 위해 슬로 차Slow Cha 운동을 시작하였다.

슬로 피시Slow Fish는 지속 가능한 어업과 소비자의 책임 있는 수산물 소비를 지향하는 운동이자 국제 행사를 일컫는데, 국제 행사는 2003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지중해 항구도시 제노아Genoa에서 처음 열린 후 홀수 해마다 열린다. 슬로 피시는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을 농업에서 어업으로 확장했다. 땅뿐 아니라 강과 호수, 바다에서도 많은 먹을거리가 생산된다. 유기농이 있다면 ‘유기어’ 도 있는 것이다. 인류는 바다를 막연하게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여기지만 바다는 결코 화수분이 아니다. 최근 1백 년간 인간이 바다에 저지른 환경 파괴의 대가를 어쩌면 앞으로 1백 년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

1 홀수 해마다 슬로 피시 행사가 열리는 안티코 항구의 제노아 아쿠아리움. 
2 다양한 재료로 만든 색색의 페스토. 특히 바질 페스토는 제노아의 특산품으로 신선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흰색 크레인이 있는 안티코는 이탈리아 제1의 항구로, 이곳에서 열린 제7회 슬로 피시 행사는 전 세계 어업 관계자들이 모여 고갈되는 어족 자원을 되살리고, 지속 가능한 바다 음식, 와인과의 마리아주, 음식 종사자의 윤리 의식, 맛과 품질 유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 기타 바다 및 물 관련 친환경 제품의 확산과 발전을 위한 자리였다.

슬로 피시 행사장은 이탈리아의 유명 식품 판매점인 ‘이탤리Eataly’와 수족관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국의 여느 축제와 마찬가지로 행사장에는 먹을거리를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입구에는 멸치튀김을 손에 든 청년들이 맥주잔을 기울이고, 이탈리아 지방의 각종 생선 요리를 판매하는 부스들이 늘어서 맛을 내고 있었다. 슬로푸드 행사장의 특징답게 사고(Buy), 먹는(Eat) 부스뿐 아니라 배우는 (Learn) 프로그램 또한 곳곳에서 열렸다. 슬로 피시의 개최 목적이 ‘어부와 사귀기, 어부에게 배우기(Know Your Fisherman)’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행사 주최 측인 이탈리아 슬로푸드협회(Slow Food Italia)가 주관하는 토론회는 물론 지방정부가 자기 지역의 고유한 수산 환경과 생선 음식을 소개하는 워크숍이나 스폰서 기업의 미니 워크숍,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맛배움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마련했다. 단순한 슬로푸드 행사가 아닌 슬로푸드 교육 현장으로 큰 울림을 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맛배움터는 생산자와 셰프의 이야기를 들으며 슬로 피시 푸드를 맛볼 수 있는 미각 교육과 체험 공간이다. 
뜻깊은 맛 배움의 시간
‘맛배움터(Taste Workshop)’ 프로그램은 스물한 개가 일찌감치 매진되어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제노아 시내 식당과 연계해서 진행한 네 개의 ‘디너 데이츠Dinner Dates’ 역시 유명 요리사가 지역 식재료를 이용해 ‘개념 있는 물고기 음식’을 선보이면서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 밖에 요리 교실 여덟 개, 물 워크숍 열네 개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 세심하게 준비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중 5월 16일에 개최한 ‘식초와 물고기: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Vinegar and Fish: Between Tradition And Innovation)’ 라는 이름의 워크숍에 20유로를 내고 참석했다.

프랑스 남부 해안 페르피냥Perpignan에 있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라 갈리네트La Galinette에서 근무하는 젊은 요리사 마르크 메야Marc Meya가 프랑스산 바뉼 식초를 이용한 생선 요리를 선보이는 ‘맛 배움의 시간’이었다. 셰프가 만든 생선 요리와 거기에 사용한 바뉼 식초, 함께 짝지어 나온 화이트 와인을 맛보면서 각각의 맛과 밸런스를 느껴보았다. 예전에는 식초를 요리와 식품 보존에 제한적으로 사용했다면 오늘날에는 부엌에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혁신 재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슬로푸드의 미각 교육은 맛보기 체험을 통해 지역과 전통, 땅과 식재료를 배우는 시간이면서 농부와 요리사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1 바질 페스토 시연 현장. 슬로 피시의 개최 목적인 ‘어부와 사귀기, 어부에게 배우기’를 보여주듯 행사장 곳곳에서 생산자와 셰프가 직접 요리 시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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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갈리네트의 마르크 메야 셰프가 선보인 프랑스산 바뉼 식초를 이용한 생선 요리. 

다음 날인 5월 17일에는 제노아 시내에 있는 발딘Baldin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번에 열린 네 개의 디너 데이츠 프로그램 중 하나인 ‘토리노에서 제노아로 전해진 살렌티네 반도(From Torino to Genoa via the Salentine Peninsula)’ 모임에 참여한 것이다. 30여 석 규모의 작은 식당에 모인 참여자들은 토리노의 바스티멘토Bastimento 레스토랑에서 온 두 명의 요리사, 지지Gigi와 파브리치오Fabrizio가 이탈리아 지도에서 ‘발뒤꿈치’에 해당하는 살렌티네 반도에서 공수해 온 생선으로 만든 멋진 요리를 대접받았다. 바스티멘토 레스토랑은 이오니아 해안의 어부들이 잡은 해산물을 갈리폴리Gallipoli 항을 통해 일주일에 두 번 받아 와서 손님에게 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날 바스티멘토 요리사들의 메시지는 아주 멋졌다. “우리는 황금 휴일의 점심으로 살렌티네 반도에서 난 해산물을 먹음으로써 이탈리아의 양쪽 끝에 위치한 두 지역 사이에 형성된 바다와 해산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남쪽의 반도에서 잡아 올린 각종 생선과 문어 등 해산물과 아티초크, 채소, 향신료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토리노에서 그리던 작가가 근처 제노아로 와서 맛깔나게 버무려낸 이날의 음식은 예술품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농부와 요리사는 식재료가 빛나도록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가다. 한국의 독자들도 좋은 작품과 예술가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최근 먹방, 쿡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좋은 독자가 좋은 작품을 만드니 더 즐기고 더 감사할 일이다.

1 생산자 마켓의 싱싱한 굴. 이곳에서는 슬로푸드에서 인정한 어부들이 직접 잡은 생선과 해산물을 맛보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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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슬로 피시 안내판. 어부를 인어로 표현한 일러스트가 재미있다. 

그 밖에 슬로 피시 행사장에는 ‘슬로푸드 철학을 지지하는 요리 사연합회’에서 시민들이 물고기를 이용한 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고의 정성을 쏟아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부스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슬로푸드에서 인정한 어부들의 국제적 물고기 마켓이 흥정과 시식으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전체적으로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전통 어업 방식과 소규모 어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바다의 지속 가능한 이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행사였다.

남북한의 농토를 합치면 몽골보다 크다는 주장이 있다. 근거는 한국의 주변 바다까지 합치면 그렇다는 말인데 그럴싸하다. 우리는 먹을거리를 땅뿐 아니라 강과 호수, 바다에서도 얻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식량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구가 2.9개 필요한 정도로 한국의 소비 패턴이 지속된다면 물고기 음식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어업과 물고기 음식 소비에 대한 성숙한 시민 의식이 절실한 때다.

이제 바다와 물고기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가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바다는 어부나 선박 회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다는 모두의 것이다. 바다에 소비자가 더 많이 개입해서 후손을 위해 가꾸어나가지 않으면 더 이상 지구와 바다의 미래는 없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 민국의 미래와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한국 사회는 물고기 생산과 소비에 대해 더 많이 묻고 답하며 맛있는 물고기 밥상을 차려야 한다. 

글 김원일(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사무총장) | 사진 제공 디자인융합연구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