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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텃밭의 행복
마을 어귀마다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겨울이 유난히 따뜻했기 때문인지, 이곳 남쪽엔 봄이 보름 이상 빨리 찾아왔습니다. 너나없이 부지런한 농부들은 미리 밭을 갈아두었습니다. 지금 들녘엔 봄의 활기가 충만합니다.


들녘에 봄이 왔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로서는 남도의 짧은 겨울마저도 지루했던 모양입니다. 크게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밭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마늘 끝이 타고 꼬시라져서…!” 이날 마늘 고랑엔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 들어갔습니다. 자기 새끼 입에 밥 들어가듯이.

밭을 갈아 기름진 흙이 포슬포슬한 상태로 씨앗을 기다리는 풍경. 작물로 가득한 한여름의 밭도 좋지만 곱게 간 텅 빈 밭, 무언가가 벌어지기 직전의 이 모습이 너무나 좋습니다. ‘무늬만 농부’인 저도 간만에 괭이를 잡고 밭을 갈았습니다. 다만 작년의 ‘무모하던 3백 평 텃밭’은 아닙니다. 다시 ‘겸손한 30 평 마당 밭’으로 돌아왔지요. 기계 없이 농사짓기엔 너무 넓은 밭과 근육 없이 덩치만 키운 몸의 부실한 체력과 박약한 의지, 하나도 모르면서 생산 관리, 위기 관리랍시고 시도한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 유기 재배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경험과 지식…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수확물들을 내다 팔 계획은커녕 갈무리조차 못 해 이리저리 이웃의 도움(고추 건조기, 냉 장 창고…)을 찾아다닌 뼈아픈 기억과 반성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일단 후퇴, 숨 고르기, 주제 파악하기, 텃밭 일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길 다짐하며 새봄의 텃밭을 엽니다.


냄비에서 살짝 찐 완두콩의 달콤함, 이 맛을 안 이상 텃밭에서 완두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감자는 숭겄는가?’
예쁘게 준비한 텃밭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선수는 감자입니다. 심기 두 주 전에 석회와 나뭇재를 먼저 밭에 뿌려두었습니다. 석회는 산성화된 토양을 잡아주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한 주 전엔 퇴비를 깔고 삽괭이와 쇠갈퀴를 이용해 30cm 높이의 두둑을 만들어두었습니다.
밭이 마련되면 씨감자를 따뜻한 곳에 두어 싹을 냅니다. 큰 것은 소독한 칼로 조각내 상처가 저절로 아물길 기다립니다. 그곳에 재를 묻히기도 합니다. 올해는 강원도 사람끼리만(?) 먹는다는 ‘선농 감자’도 심었습니다. 포슬해서 쪄 먹거나 구워 먹기에 그만이라는 이 품종은 수미 감자에 비해 알의 굵기가 작고 수확량도 적어서 시중에서는 만나기 힘들지요. 자기 밭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체로 개량되지 않은 토종 씨앗들이 그러합니다. 작고 못났지만 맛과 영양은 좋답니다.
“감자는 숭겄는가?”, 요즘 마을의 안부 인사입니다. 그런데 감자는 심었다 해도 “벌써?”란 말을 듣거나 아니면 “아직도 안 숭겄어?”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새봄에 가장 먼저 밭에 심는 것이 감자거든요. 급한 맘에 서둘렀다간 늦서리에 동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감자만 해도 10cm 깊이로 심어라, 아니다, 얕게 심어라, 뒤집어 심어라, 바로 심어라… 시골 농부의 지도와 편달은 제각각입니다. 농사에 한 가지 답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캐묻다 보면 새겨들을 만한 이치가 하나 둘 나옵니다. 헛골(높은 고랑의 한쪽 어깨 정도)에 심으라는 것은 나중에 북 줄 때 꼭대기 흙을 무너뜨려 덮으면 편하다는 것이고 싹 난 부분이 아래로 향하게 하라는 것은 싹이 빛을 향해 자라 나오자면 땅속을 기는 부분이 넓어져 감자가 많이 달린다는 이유입니다.
지역마다 땅과 기후가 다른 것은 물론이려니와 땅마다 이력도 다르고, ‘미기후’라고 바로 옆의 밭과도 그 환경이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그냥 어르신들 말씀에 토 달지 말고 “네~ 네~ 근데 왜요?” 하는 게 ‘선수들’이 있는 시골에서 텃밭 농사를 짓기 위한 요령이자면 요령입니다. 자신만의 농법과 농사 캘린더를 완성할 때까지는 말이지요. 그래서 농사 일지를 쓰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직접 길러 수확한 양파는 남주기 아까울 정도로 대견합니다. 

인생에도 텃밭에도 ‘설계’가 필요하다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평수의 농사는 ‘텃밭’이어서 더 알뜰하고 살뜰한 맛이 있습니다. 내다 팔 것이 아니니 흠 없이 기르기 위해 농약과 제초제를 칠 필요도 없습니다. 힘들게 자란 아이들이 향도 맛도 더 강합니다. 벌레가 먹으면 먹은 대로 거기만 떼어 내고 먹으면 됩니다. 벌레가 정 싫고 무서우면 벌레한테 양보하는 법도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쑥갓을 포기했습니다. 벌레들이 잎 뒷면에 깨알 같은 작은 알들을 심어놓거든요. 그것 말고도 상추, 치커리, 루콜라 등 먹을 건 많습니다. 규모가 작으니 크게 망할 것도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골고루 심고 토마토가 풍년이면 토마토를 먹고, 가지가 풍년이면 가지를 많이 먹으면 됩니다.
“약을 안 하면 못 먹는다”는 고추도 한 가족 먹을 양 정도는 돌려짓기로 유기 재배가 가능합니다. 같은 밭에 한 가지 작물만 계속 지으면 그 작물이 좋아하는 영양소만 집중적으로 땅에서 빠져나가는 데다, 뿌리 부분에 그 작물을 좋아하는 미생물과 균이 급격히 늘어나 병에 잘 걸립니다. 그래서 3년 정도 간격으로 흙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작물을 바꾸어 심는 것입니다. 당근의 앞그루 작물로 파를 심으면 당근의 껍질이 좋아진다고 하고, 척박한 땅에는 공기 중 질소 성분을 잡아주는 콩과 식물 을 먼저 심어서 땅을 비옥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집을 짓기 전 논이던 탓에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고 가물면 상추조차도 솎을 수 없는 딱딱한 땅이던 마당 밭도 2~3년 봄가을로 퇴비를 주며 돌려짓기 했더니 이제 제법 쓸 만한 밭으로 변신했습니다. 흙이 건강해졌다는 것은 이곳을 찾는 손님이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저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마당의 크고 작은 뱀들, 이 녀석들이 오는 것은 두더지나 개구리 같은 먹을 것이 있어서이고, 또 그것들은 지렁이 같은 먹을 것이 있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렁이는 땅을 숨 쉬게 하고 비옥하게 만드는 아주 훌륭한 일꾼이지요.

밭에 심은 감자는 하지에, 늦어도 장마 전에 수확을 하니 그다음에 무얼 심을지도 미리 생각해놓고 계획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올해는 미리 모종을 낸 바질basil을 심어볼까 합니다. 바질은 자리를 옮겨도, 줄기를 꺾어 심어도 잘 적응하는 착한 녀석입니다. 더위를 아주 좋아하고요. 흙 없이 뿌리를 뽑아두었다가 다음 날 심어도 됩니다. 이렇듯 작물마다 심는 때와 거두는 때가 다르고, 좋아하는 흙, 필요한 영양소, 좋아하는 햇빛과 온 도와 수분량, 자랐을 때의 키가 다르고, 줄기가 퍼지는 정도 또한 다르기 때문에 몇 평 안 되는 텃밭도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한해 경작을 위한 ‘텃밭 설계’도 해야 합니다. 어디에 무엇을 얼마나 심고, 그 옆엔 무엇을, 그다음엔 무엇을 심을지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요.
작은 텃밭에 심고 싶은 것은 많고, 이런저런 것을 고려해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이게 무슨 12차 방정식 문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궁리가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시골 할머니들은 옥수수 사이사이에 콩 심고, 매실나무 아래로 열무 심고, 감나무 아래 취나물 기르고, 양파 고랑 사이사이에 시금치씨 뿌리고, 참깨 심은 이랑은 어느새 고랑이 되고 고랑은 메주콩 이랑이 되고, 하여간 손바닥만 한 땅뙈기조차도 놀리지 않습니다. 잡초가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고수의 경지이지요.

고수, 루콜라, 바질, 로즈메리 같은 허브.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를 월남쌈, 샐러드, 피자에 펑펑 넣어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텃밭 농사의 큰 기쁨이지요.


지지대를 세워서 기르는 호박, 오이, 수세미. 아침에 환하게 웃는 호박꽃을 만나면 더없이 반가워 마치 벌인양 수꽃 암꽃을 찾아다니며 가루받이를 해준답니다. 


몸과 맘을 살리는 행복한 노동
텃밭을 일군다고 할 때, 대부분 ‘자기 먹거리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킨다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은 땅속의 일꾼들인 벌레와 미생물을 죽이고, 땅이 본래 지닌 위대한 힘을 죽입니다. 비료를 사용해 억지로 키우고, 그래서 병해충가 늘어나니 농약을 쓸 수밖에 없고… 그런 씨앗은 한 해 거 두고 나면 다음해 엔 제대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불임 종자’ 인 것이지요. ‘몬산토’ 같은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종자 개량이 라는 미명하에 토종 씨앗들을 없애고 불임 종자를 팝니다. 그리고 매해 독과점에 의해 종자값은 올라갑니다. 그래서 텃밭 선배들은 토종 종자를 지키고 나누는 일에도 앞장섭니다. 건강을 넘어 환경과 생태로 생각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변 친구들에게 “일단 도시 농부가 되어보라”고 극구 추천하는 까닭은 거창한 뜻 이전에 흙을 만지며 보내는 시간이 주는 행복감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느리게 갑니다. 사부작사부작 단순한 일을 반복합니다. 사람도 일을 하지만 하늘의 태양과 구름과 땅의 도움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나무를 끊어다 오이 지지대를 박고 팽팽히 줄을 매고 할 때는 함께 잡아줄 손이 필요합니다. 이웃과 협동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남과 경쟁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거, 그리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거. 농사만 한 ‘지천명대인사’ 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밭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추운 땅을 뚫고 나오는 부추 싹의 대견함, 한여름 호박꽃의 해맑음, 향기로운 꿀을 찾아 꽃밭을 누비는 나비와 벌의 부지런함, 며칠 못 본 사이 부쩍 자란 오이, 호박, 가지, 수세미와 끝도 없이 주렁주렁 열매를 내주는 토마토의 고마움, 벌레가 극성을 부려도 노오란 속을 채워가는 배추와 희고 토실한 무의 듬직함, 농가 한구석에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도라지꽃의 찬란함까지! 아름다운 것은 눈과 마음을 동시에 정화하고 그 누구도, 무엇도 방해할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장화와 몸뻬 차림에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는 내 자신이 좀 괜찮은 인생을 잘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좋은 일에 친구들을 초대할 밖에요. “하루 동안 행복하고 싶으면 돼지를 잡고, 한 해 동안 행복하고 싶으면 결혼을 하고, 전 생애를 행복하고 싶으면 밭을 일구라.” 농부 철학자인 피에르 라비가 즐겨 말한 중국 격언이라고 합니다.

#귀촌 #남도
글과 사진 정현선 | 담당 김민정 수석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