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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위에 오른, 산과 들의 봄
마실을 나가다 보니 마을 입구 회관 앞에 청년들이 모여 있습니다. ‘청년’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오십줄, 초로의 나이지만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들마저 일하시는 시골에선 ‘사지 육신 멀쩡한 시퍼렇게 젊은 축’에 속합니다. 어쨌건 이들이 파란 트럭을 끌고 모여든 걸 보니 어느덧 정월 대보름! 달집 태울 날이 머지않았단 이야기입니다.


겨울을 지난 풀은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키 작고 때론 볼품없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힘들게 자란 것일수록 영양소가 많고 맛도 더 달고 향도 좋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들의 어린 풀을 보며 행여 다칠까 봐 벌벌 떠는 삶을 반성해본다.

이월은 한 봄이라 경칩 춘분 절기로다(중략)/ 반갑다 봄바람이 변함없이 문을 여니 / 말랐던 풀뿌리는 힘차게 싹이 트고 /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도다(중략)/ 산채는 일렀으니 들나물 캐어 먹세 /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 / 달래김치 냉잇국은 입맛을 돋우나니 / 본초강목 참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라 / 창백출 당귀 천궁 시호 방풍 산약 택사 / 낱낱이 적어놓고 때 맞추어 캐어두소 / 촌집에 거리낌 없이 값진 약 쓰겠느냐.

다산의 둘째 아들이자 농시農時에 따른 농사 기술을 최초로 우리말 노래로 만들어 보급한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중 이월령입니다. 물론 여기서 2월이란 음력을 말하지요. 농사란 게 자연의 시간을 앞서 나갈 수도 없고 또 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공간적 의미뿐 아니라 자연의 시간에 맞춰 몸을 눕히고 일으키는 시간적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한층 삶의 원형질에 닿아 있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남쪽에서 시속 1km의 속도로 봄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한 뼘 한 뼘 언 땅을 녹이며….


시장통 할머니의 좌판엔 벌써 봄이 왔다. 좌판에 있던 호박과 가지 등 말린 나물이 달래, 냉이, 씀바귀, 시금치, 봄동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묵은 나물에서 새 나물로
봄을 재촉하는 마음에 성급히 봄나물을 찾아 장에 나갔습니다. 혹시나 할머니들은 벌써 그것을 구하셨나 싶었지요. 구례의 오일장! 인구가 적은데도 인근 남원, 하동보다 그 규모가 큽니다. 지리산이 준 나물과 약초는 물론이려니와 바닷가에 면한 도시 순천과 여수가 가까워 해산물도 풍성한, 볼 것도 살것도 많은 명물 장입니다. 그중에도 채소전은 시장 중앙통에 있습니다. 규모가 큰 가게도 있지만 항상 제 발길을 붙잡는 것은 근처 마을의 할머니들이 유모차(시골에서 유모차는 허리 휜 할머니들의 길동무이자 운송 수단입니다)에 싣고 와서 벌이는 좌판입니다. 채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은 철 따라 그 구성이 바뀌는데 감자, 고구마, 팥, 콩, 깨, 참기름, 배추, 무, 상추, 시금치, 호박, 가지, 토란, 은행, 밤, 단감 등…. 자급자족하는 할머니에게서 나오는 것들이니만큼 없는 게 없습니다.
한창 겨울의 끝을 달리는 요즘, 좌판을 채우는 것은 각종 말린 나물과 달래, 냉이, 씀바귀, 시금치 같은 이른 봄의 나물입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다고나 할까요. 남도에선 벌써 봄이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제가 수도 서울에서 300km나 떨어진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맑고 푸른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짧은 겨울과 풍성한 먹거리! 인심 또한 곳간에서 난다고 하지 않던가요.
지난해 밭에서 거두어들이고 말려둔 호박이며 가지, 시래기, 묵나물, 취나물, 박나물, 토란대, 고구마 순 등은 이번 정월 대보름을 기점으로 끝이 날 것들입니다.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젓가락은 봄나물에 갈 것이니, 서둘러 팔고 어서 먹어야 합니다. 오곡밥과 아홉 가지 말린 나물의 상원채上元菜로 지나간 시간에 작별을 고하고, 다가올 봄 생명의 기운을 맞이해야 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남아 있는 반찬을 모두 넣어 밥을 비벼 먹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것을 맞기 위한 모종의 의식과 기원….


봄의 산과 들에는 먹을 것이 지천이다.들의 나물을 먹고 나면 산나물이 난다. 산수유, 생강나무, 매실나무에도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

봄을 캐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겨우내 삶아서 말리고 다시 불려서 삶아 조리한 구수한 풍미의 나물을 먹다 보면 어느덧 생채의 향긋함, 아삭함, 새콤달콤하고 쌉싸래한 맛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그때쯤 들에 나가보면 냉이와 달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해엔 냉이라고 한 바구니 가득 캐 가지고 왔더니 냉이는 없고, 몽땅 못 먹을 지칭개뿐이라고 해서 동네 어르신들께 망신만 당한 기억이 납니다. 냉이는 된장국도 좋지만 그냥 생으로 올리브오일, 된장, 다진 마늘을 넣고 샐러드처럼 살짝 무쳐 먹는 게 가장 간단하고, 손님들 반응도 폭발적입니다. 뭐 조금 더 공을 들이자면 잣, 마늘, 파르메산 치즈, 올리브 오일과 함께 페스토로 만들었다가 비장의 스파게티 소스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불면증에 좋다는 달래로는 김치를 담그기도 하지만, 비빔장을 만들어 밥을 비빈 후 살짝 구운 햇김에 싸 먹으면 한 끼 뚝딱 상큼한 별식이 됩니다. 저는 생표고와 은행 몇 알을 넣어 지은 밥을 비벼 먹었더니 아주 그만입니다. 만들기도 쉽고 싸고, 다른 반찬 낼 것도 없어서 설거지도 적지요.

서울에서 온 친구들에게 좀 으스대며 낼 만한 것으로는 민들레가 있습니다. 봄비라도 몇 차례 내리고 나면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 여기저기에 민들레가 연한 새싹을 내미는데, 그중에도 약성이 좋다는 토종 하얀 민들레를 잎만 따서 이용합니다. 뿌리째 뽑지 않고 두면 여름이 오기 전에 몇 차례 더 연한 잎을 내주거든요.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쌉싸래한 맛이 강한 민들레는 들깨, 청양고추와 함께 도토리묵무침에 넣어 먹는게 최고이지 싶습니다. 막걸리를 부르는 아이템입니다.
들에 흔한 잡초인 개망초는 ‘내 밭에 나면 보이는 대로 뽑아야 할 잡초이고, 남의 밭에 나면 반가운 찬거리’가 됩니다. 무릎 즈음 올라온 순의 끝을 똑똑 따서 된장국에 넣어 먹습니다. 지난 여름, 동네 어르신들이 밭에서 일하는 내게 궁금한 척 다가와 무심히 개망초 한 줌씩 끊어서 가시는 걸 보고 배웠습니다.
노랑과 주황색 꽃을 피우는 원추리 또한 관상용 꽃으로만 알았는데, 이른 봄에 올라오는 납작한 순의 하얀 아랫부분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 양념에 무쳐내니 상큼하고 씹는 맛도 좋습니다.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서시천 양쪽 자전거 길에 널린 게 원추리니 부지런을 떨면 한 접시쯤은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를 맑게 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부추는 기르면서 여러 번 잘라 먹을 수 있지만 겨울을 지내고 처음 올라오는 순이 향도 좋고 몸에 좋다고 해서 “초벌 부추는 사위도 안 준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향이 좋은 부추는 부침개보다는 생으로 쫑쫑 썰어 두부된장찌개와 함께 넣고 쓱쓱 비벼 먹는 게 제격입니다. 산부추 씨앗을 받아 심은 것도 있으니 올해는 꽃만 구경할 게 아니라 두 부추의 맛을 비교해볼 작정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흔히 아는 나물 외에도 봄의 산과 들에는 먹을게 지천입니다. 그래서 봄날의 산책길엔 주머니 속에 비닐봉지와 함께 조그만 나물도감을 찔러 넣고 다닙니다. 보면서 이름도 익히고, 먹을 수 있는 거면 한 줌 뜯어서 밥상에 올리는 것이지요. 사실 어르신들은 단오 전의 어린순은 웬만한 건 다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식물에 있는 약간의 독성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사라지고, 여러 가지 재료와 섞이는 과정에서 중화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봄철마다 한 번씩은 방송에서도 알려주는 ‘독이 든 나물’은 조심해야 합니다. 곰취와 거의 흡사한 동이나물, 그리고 이름은 나물이지만 먹으면 안 될 요강나물, 피나물 등…. 도시에서는 이런 것보다 길가의 오염된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쑥은 도로변에선 채취하면 안 됩니다. 자동차 타이어의 마모된 먼지부터 가로수에 뿌린 살충제나 제초제 따위가 묻어 있기 쉽거든요.


보드랍고 통통한 찐빵 반죽 위에 매화가 피었다. 찐빵이 누리는 호강에 먹는 사람의 눈도 호사를 누린다. 삶의 즐거움은 먼 데 있지 않다.

숲 속의 보물찾기
들에 비해 햇빛을 적게 받는 숲 속엔 봄도 늦게 옵니다. 그나마 이른 산나물을 만나려면 물이 흐르는 계곡 쪽을 훑어야 합니다. 제가 뒷산에서 가장 쉽게 만나는 것은 취나물입니다. 그 다음이 고사리, 고비, 머위…. 어쩌면 아는 게 없어서 그것들만 눈에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요.
취나물을 산에서 채취한 것, 밭에서 기른 것, 비닐하우스에서 기른 것을 비교하며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비교하나 마나였습니다. 하우스의 것은 키도 크고 포기도 크고 깨끗하고 연하지만 향이 약하고, 산에서 채취한 것은 작고 볼품없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일일이 허리 굽혀가며 채취해야 해서 몸은 고되지만 그 맛과 향은 가장 강했습니다.
나무에서 채취하는 나물도 있습니다. 봄나물의 귀족이라 하는 두릅, 닭백숙의 재료로도 친숙한 엄나무의 순 같은 것이지요. 이런 것은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장아찌로 만들면 갑작스레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비장의 무기가 됩니다.

산수유나무와 비슷해서 꼭 나뭇가지를 분질러 냄새를 맡아보고야 “아, 생강나무 맞구나!” 하는 봄의 생강나무도 부드러운 잎을 따서 쌈을 싸 먹으면 그 맛이 아주 특별합니다. 달콤하면서 비릿하고, 동시에 솜털이 주는 부드러운 식감이 있습니다. 콩잎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잎을 먹는데 아래 사는 이웃은 어린 꽃 순을 따서 차를 만들어 먹더군요. 백목련과 백련으로도 차를 만들고, 어린 뽕잎과 댓잎으로도 차를 만드신다고 하는데 이런 고수들에겐 저 산이 얼마나 보물 창고 같을까요? 자연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산과 들이 주는 선물을 누리는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멋진 일인지요.
<주머니 속 나물도감>의 저자, 이영득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희귀식물 멸종 위기 식물들은 손대지 말고, 뿌리째 캐지 말고, 냉이 같은 것이라도 어린 뿌리는 남겨두고, 여러 포기에서 조금씩, 아는 나물만 뜯으라”고. 아마도 사람들에게 산과 들의 먹을 것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악착같은 삶의 방식이, 끝없는 욕심이 자연을 못살게 굴까 봐 말이지요. 

글과 사진 정현선 | 담당 김민정 수석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